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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겔 33: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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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겔 33:30~33)
 

애굽은 앗수르와 동맹하여 바벨론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동맹군은 B.C 605년에 유브라데스강 유역의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패하고 말았습니다(렘 46:2). 이쯤되고 보니 이제 세계의 지배권은 바벨론(갈대아)인들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 왕 여호야김을 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왔습니다. 

그 당시 유다는 매우 영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정을 하지 못하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있을 때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제 2차 예루살렘을 습격했습니다. 이때 바벨론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여호아김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서 여호야긴이 왕 위에 올랐습니다. 석 달이 지난 후에 여호야긴도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히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예루살렘 도성과 백성들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이때 수많은 지도자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무렵에 여호야긴 왕과 에스겔이 같이 끌려갔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에게 이른바 포로민 특구가 제공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곳에서 포도원을 만들고 곡물을 수확하고 상업에도 종사하는 이른바 종의 신분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 구역생활이 허용되었습니다. 

그 후 스룹바벨의 인도로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날 때 물질적인 공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물질적인 풍요는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동인이 되었습니다. 

열왕기하 24장 14절에 의하면 B.C 597년경의 바벨론 포로의 숫자는 17,000여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느부갓네살에 의해 끌려간 유대인 포로의 숫자는 숫자적으로 약간의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무려 50,000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요 정착지인 그발강가는 유다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집회 장소가 되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오늘날 너희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포로민 주제에 전혀 각성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외쳤으나 백성들은 오히려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겉으로는 듣는 체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단지 음악을 듣는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했고 그들의 생활은 본능적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이러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가리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했습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무질서하게 되고 결국 패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고 했습니다.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고 한 말씀은 


Ⅰ. 유다 백성들의 타성(惰性)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타성적이었습니다. 

본문 33장 30절에 『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 가 들어보자 하고 』라고 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타성적으로 듣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심정으로 들어보자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의 흐름으로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오늘도 모이는 날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나 보자'라는 뜻의 말입니다. 이렇게 유다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성적인 예배에 젖어 있었습니다. 

여기 『 담 곁에서 』는 은밀하고 비밀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 집 문에서 』는 공공연하게 공개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 자 가서 들어보자 』라는 말은 단지 새로운 소식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냥 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기대하는 바 없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기도 전에 예측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 교회 예배시간에 있었던 웃지 못할 일이 있습니다. 그 교회 어떤 교인이 설교가 시작될 무렵 밖으로 나가더랍니다. 한참 후에 설교가 다 끝난 다음에 다시 예배당에 들어오더랍니다. 안내를 맡은 장로님이 어디 다녀오십니까? 라고 했더니 그 성도가 하는 말이 이발관에 가서 머리 좀 깎고 왔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어떻게 설교시간에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성도가 하는 말이 내가 주보에 나온 설교를 보니 다 아는 설교이고 해서 앉아서 조는 것보다는 머리 깎으면서 조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답니다. 

웃고 지나갈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낯익은 설교라고 해서 그 내용을 예측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설교 원고를 읽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이해하는 데서 멈추면 안됩니다. 그 설교를 듣는 가운데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성도들을 감화 감동시켜서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도록 일깨우는 것이 설교의 사명입니다. 


2)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이 타성적이었습니다. 

본문 33장 31절에 『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라고 했습니다. 

타성적으로 모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실로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사람들이 에스겔 선지자 앞에 많이 모였습니다. 타성적으로 모이는 그런 사람들처럼 모이고 하나님의 백성처럼 에스겔 네가 하는 말을 듣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처럼 듣고 있으나 그들은 결코 나의 친 백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타성에 젖어서 모이는 상습적인 회집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1장 12절에 『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고 했습니다. 


3) 그들의 사랑이 극히 이기적이었습니다. 

본문 33장 31절에 『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고 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데에는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문설주와 바깥문(매주자)에 기록했습니다. 

신명기 6장 8-9절에 『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실천적 순종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헌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들은 모양으로는 굉장한 것 같지만 실속 없는 경건 즉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아니하고 그들은 탐욕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포로 생활 속에서도 재물의 맛을 보았습니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의 일들을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욕망의 수효를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5절에 『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신뢰하지 못했을 때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여기 『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의 극에 달하는 이기주의가 자연스럽게 이중인격(표리부동)으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위선으로 포장된 속과 겉이 상반된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고 한 말씀은


Ⅱ.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자에 대한 바른 인식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종을 공연히 괴롭히지 말라는 말입니다. 

본문 33장 30절에 『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라고 했습니다. 
공직에 있는 선지자를 헐뜯었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소견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여과 없이 그대로 선지자를 향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실한 종들은 얼마나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사는지 모릅니다. 주의 종들이 그것을 다 안다면 낙심할 수도 있을 터인데 오히려 욕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은혜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담벽이나 문간에서 하는 모든 말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말할 자유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는 자유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종을 직업인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본문 33장 32절에 『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에스겔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고 엉뚱한 짓을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노래나 부르고 인간들의 감성에 호소하여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대중가요를 불렀다는 말이 아닙니다. 

유다 백성들이 에스겔 선지자를 직업인처럼 대했다는 말입니다. ① 이국땅에서 포로민의 서러움을 달래주는 그러한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② 괴롭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신을 달래주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무엇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에스겔 선지자를 그들은 이 세상에 한 특별한 직업인으로 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직업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사명자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직업의식을 가졌을 때 이미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3) 하나님의 종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본문 33장 31절에 『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라고 했습니다. 

32절 하반절에 또 말하기를 『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종 에스겔 선지자를 선지자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선지자로 대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인간의 감정을 잘 다스려서 하루하루의 삶을 재미있게 해 주는 한 직업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쯤되고 보니 그들이 에스겔 선지자가 하는 말을 신적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 들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선지자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인데 오늘 우리가 이들에게 더 큰 것을 요구하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선지자의 말로 듣지 않고서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4) 하나님의 종 선지자의 말은 반드시 응(應)한다는 말입니다. 

본문 33장 33절에 『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고 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에스겔을 선지자인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들과 포로민으로 이국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었지만 이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이면 선지자를 욕하고 흉보고 따라주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향하여 내 말이 성취될 때는 그들이 너를 선지자인 줄 알 것이라고 하시면서 에스겔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타성적으로 습관적으로 듣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설교 듣는 것을 즐기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앞에 때가 되면 타성적으로 습관적으로 모이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신뢰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주의 종을 공연히 괴롭히지 말기를 바랍니다. 목사는 직업인이 아닙니다. 목사는 사명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고집스러운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기를 애태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을 잘 먹고 잘살게 하기 위하여 목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하기 위하여 목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과 같은 삶을 살고 가정생활을 같이 하는 것 때문에 심리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얼굴을 자주보고 대화를 자주하기 때문에 신선한 영적 감정이 고갈될 필요는 없습니다. 목사가 성도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피차 자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도 국부적으로 주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 혹은 주님 앞에 섰을 때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목사를 특별한 직업인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를 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목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에 『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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