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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어를 바꾸어 하나님의 목적어가 되자 (창 4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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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를 바꾸어 하나님의 목적어가 되자 (창 45:1~10)
  

오늘은 어떤 책의 한 구절을 읽어 드리면서 말씀을 시작할까 생각합니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사람은 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특별한 선물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어왔다. 나는 모두들 자신의 내면에 잠자는 거인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아직 계발되지 않은 어떤 재능과 자질, 그리고 자신만의 천재성을 갖고 있다> 이 부분을 들으시고 어떤 책인지 아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앤서니 라빈스>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의 일부입니다. 이 책은 전 세계에서 천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 셀러입니다. 

이 책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며, 그 가능성이 우리 안에서 잠들어 있으니, 그 가능성을 깨우면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깨우라는 것입니다. 

요즘 이런 성격의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 또 이 분야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 등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모두 인간 안에 있는 가능성만 개발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위대한 존재로 여기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인간을 아름답다고 여겼습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 당시에 선수들은 옷을 입지 않고 경기를 했습니다.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벗은 몸을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조각상들을 보면 거의 나체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인간이 추악한 존재라는 생각이 퍼지면서 그리스적 생각은 묻혀갔습니다. 인간의 벗은 몸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점차 옷으로 가리게 되었습니다. 중세 당시에 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린 복장도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적 생각이 다시 되살아난 것은 14세기 이탈리아 남부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시대부터입니다. 르네상스란 부활, 재생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죽은 것을 부활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부활시킨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예전의 그리스 로마 문화, 즉 <그레코로만>을 말합니다. 르네상스 학자들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인간을 중심에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점차 인간을 찬양하는 노래들이 등장하고, 인간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습니다. 

그 이후 등장한 문명, 인간을 중심에 세운 문명을 소위 <근대 문명>이라고 부릅니다. 근대 문명은 인간을 신으로 믿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만 개발하면 굳이 하나님이 돕지 않아도 얼마든지 낙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을 위대하게 여기는 생각들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인간은 분명 놀라운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과 비교해 볼 때, 대단한 존재입니다. 과학문명을 건설하고, 문학과 예술을 합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여기에 우리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간은 위대하다고 신처럼 생각하던 근대 문명의 놀이터에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과학은 발전하고, 기술은 향상되어 조금만 있으면 낙원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대는 빗나갔습니다. 낙원 대신 지옥이 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그 처절하고 비참한 현장을 보면서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인간은 낙원을 건설할 수 없다. 인간은 과학은 발전시키지만, 그 과학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 인간은 과학의 힘으로 지옥을 만들었다>고 탄식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절망적인 허무주의적 실존주의가 찾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날 다시 인간의 가능성을 찬양하는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다시 사람들은 우리 안에 있는 거인을 깨우기만 하면 위대한 인생을 살고, 위대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여러분은 요셉을 어떤 사람으로 여기십니까? 많은 교인들이 요셉을 위인처럼 여깁니다. 노예 상태에서 총리가 되었으니,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입지전적 인물로 여깁니다. 설교할 때 요셉을 추켜세웠습니다. <요셉은 위대한 사람이다, 요셉은 일찍부터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니 우리도 꿈을 가지자. 요셉은 그 힘든 고난을 참고 견딘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도 어려운 고난을 잘 참고 또 참자. 그러면 멋진 날이 온다. 요셉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부지런했다. 그러니 우리도 불평하지 말고 부지런히 최선을 다하자. 그러면 우리도 성공한다. 옛 말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설교를 해 왔습니다. 

이런 설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멋진 가슴 설레는 설교입니까? 그러나 여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말씀은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위대한 인물 요셉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흠이 많은 연약한 요셉을 보여줍니다.성경의 메시지는 <요셉은 처음부터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개발했고, 노력해서 성공했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요셉은 연약했고,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시고, 하나님께서 들어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위대한 게 아니라, 요셉을 쓰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할 때가 있지만, 놀랍게도 애굽 왕 바로는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한 후에 바로 왕이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창세기 41장 39절을 보면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다>고 합니다. <네가 똑똑해서 이 꿈을 해석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바로 왕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알게 하셨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애굽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요셉은 도저히 관직을 줄 인물이 못됩니다. 그는 노예 출신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중죄인을 가두는 감옥에 있던 죄수입니다. 더구나 그에게 붙어 있는 죄는 자신이 모시는 안주인을 강간하려고 했던 강간미수범입니다. 비록 요셉이 누명을 쓴 것이지만, 애굽인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런데 강간미수법을 풀어주기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하루아침에 그것도 말단 공무원이 아니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 자리를 준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요셉을 발탁한 이유는 요셉 때문이 아니라, 요셉 안에 계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바로 왕이 요셉을 세운 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왕은 요셉을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요셉도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자신이 애굽에 온 것, 총리가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았습니다. 결코 자신이나, 형님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형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7-8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라고 합니다. 보세요. 요셉은 주어를 바꾸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주어가 되시고, 요셉은 목적어가 됩니다. 

신앙은 문장의 주어를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했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셨어>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신앙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 저를 써 주옵소서>라고 말할 때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어를 바꾸십시오. 우리 인생의 인도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주어가 되면 안 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주어가 되셔야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의 목적어가 되어야 합니다. <I sentence>에서 <He sentence>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 바로 그 분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위대하게 산다>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대하게 살게 하신다>고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렇게 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요셉처럼 꿈을 꾸자>고 말하는 대신에 <요셉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 저희에게도 꿈을 주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요셉처럼 참고 견디는 인내를 배우자>고 말하는 대신 <요셉으로 하여금 고난을 참고 견디게 하신 하나님, 저에게도 고난을 이기는 힘을 주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요셉처럼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고 말하는 대신에 <요셉으로 하여금 힘든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게 하신 하나님, 저도 맡은 일에 충성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요셉처럼 우리도 지혜롭게 말하고 행동하자>고 말하는 대신에 <요셉에게 꿈을 해몽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하나님, 저희에게도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성경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십니다. 사람은 약합니다. 그러나 능력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강해집니다. 사람은 더럽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깨끗해집니다. 사람은 무지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이 계심으로 지혜로워집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마른 막대기처럼 보잘것없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쓰시면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려면 실패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해서 하시면 승리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믿으면 넘어집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입니다. 자신에 대해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타드 벤트리>란 사람을 아십니까? 이 분은 여러 해 전부터 미국 플로리다를 중심으로 치유 집회를 열면서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수많은 사람은 기적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2002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교회성장학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도 그가 신 사도행전을 열어간다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타드 벤트리는 그의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여자 스텝과의 부정한 관계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람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기적의 현장에도, 능력의 현장에도, 위대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 곳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적의 주인공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주님을 버려도 난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했습니다. 다윗 같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도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무너져도 저 분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고든 맥도날드> 같은 목사님도 쓰러졌습니다. 가장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전도의 문을 막습니다. <세상이 다 주님을 떠나도 난 달라>라고 말하면서 출발했던 우리도 얼마나 많은 순간 주님을 섭섭하게 했습니까? 이게 우리 인생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자신을 믿지 않고, 자신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인생을 사는 태도가 다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얻으려는 인생>을 살지 않고, <누리려는 인생>을 삽니다. 얻으려는 인생은 스스로 쟁취하려고 애쓰는 인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누리는 인생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사는 인생>을 말합니다. 얻으려는 인생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대로 합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길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 자기 방법대로 합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대신 자신이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 결과는 기쁨이 아닌 불행입니다. 

요셉은 이런 인생의 모델을 아버지 야곱에게서 보았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세요. 야곱은 <얻으려는 인생>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고통뿐이었습니다. 형 에서에게 돌아갈 복을 속임수를 써서 얻었지만, 그 결과 형을 피하여 20년이나 외삼촌의 집에 얹혀 살아야 했습니다. 외삼촌의 딸들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결과 가정이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외삼촌의 재산을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그 결과 외삼촌과 원수처럼 되었고, 결과적으로 소떼 양떼 때문에 세겜에서 딸이 겁탈당하는 일도 생겼고, 아들들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요셉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요, 형님들도 아니요,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도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았기에 요셉을 축복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요셉의 팔이 힘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손을 힘입었기 때문이고, 오늘날 총리의 복을 누리게 된 것도 전능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곱도 <얻으려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는 인생>이 복되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어가 되지 마십시오. 이젠 하나님의 목적어가 되십시오. <내가 ...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이렇게 만드셨다>고 하십시오. 바울 사도는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또 <내가 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하나님, 저를 사용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아름다운 일을 이루시길 기대합니다. 주께서 우리의 가는 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실 줄 믿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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