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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 신앙의 정립과정 (요 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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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정립과정 (요 2:13~22)
  
      
청개구리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엄마 말씀을 지독히도 안 듣는 청개구리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이리로 오라하면 저리로 가고, 이 일을 해라 하면 저 일을 하고, 공부하라고 하면 놀고, 놀라고 하면 그때는 정말 놀고. 엄마가 하라는 말씀의 반대로만 했습니다. 그 엄마가 병이 들어서 세상을 떠나게 됐는데 나를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묻어달라고 했다가는 분명 개울가에 묻어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일부러 내가 죽으면 개울가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제서야 청개구리가 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은 순종하려고 어머니를 개울가에 묻어드렸습니다. 그래서 비가 올 때마다 어머니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개굴개굴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말을 지독히도 안듣는 놈을 청개구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가르치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느냐?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이 아니고 부활하신 다음입니다. 이것이 청개구리 이야기와의 차이점입니다. 

청개구리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철이 들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철이 들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돌아가시기만 하고 부활하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모든 것은 물음표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진리가 아니고 하나의 큰 물음표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짧은 편지를 빅터 휴고가 썼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가 레미제라블을 출판한 다음에 책이 얼마나 잘 팔리는지를 물어보려고 출판사에 물음표 하나만을 써서 편지를 보냈더니 ‘엄청 잘 팔립니다.’라는 뜻으로 출판사에서 느낌표 하나를 써서 답장을 보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물음표만 있고 느낌표는 없는 종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과거에 의인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 소크라테스니 석가모니니, 간디니, 마틴 루터 킹이니, 이들의 의로운 죽음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세상의 불의함과 맞서고 또 장렬하게 순교한 인간의 정신,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용기, 진리의 힘, 평화의 힘, 이런 것을 몸소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도 우리에게 감명을 줍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가치를 가르칠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에요. 만일 예수님이 이와 같은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오신 분이라면 예수님은 오시지 않아도 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그 정도를 가르치는 선생은 세상에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새롭게 기여하는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씀이 많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한 예입니다. 19절 말씀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돼 있는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돼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비판자들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수께끼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비판자들이 대답하기를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 지었는데 네가 삼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이렇게 반문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이 그 말씀을 기억하고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21, 2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성전된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읽으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고 당신의 육체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일컫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리라’ 예수님의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한 구절 말씀은 예수님이 왜 오셨으며, 왜 죽으셨으며, 예수님의 부활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구절 안에 설명해 주는 아주 귀한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가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전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육체의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한마디 말씀이 그 많은 진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이 구절을 읽어야 그것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것이지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 말씀은 수수께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당시에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라는 것을 증빙해 줍니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도 이해하지 못한 말씀을 돌아가신 다음에 이해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을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는 더욱 더 이해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치에도 닿지 않는 말씀을 모아서 책으로 펴낼 일이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이치에 닿지 않는 미치광이의 말로 잊혀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remember’,  ‘기억하고’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는 단어입니다. 기억했다,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잊어버립니다. 자기와 상관이 없는 말은 잊어버립니다. 이해가 되는 말도 잊어버리는 통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마음에 담아둘 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도 잊어버렸어요. 휴지통에 집어넣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고 나니까 그 말씀이 기억이 났다는 것입니다. ‘아, 그때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 그거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그게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말씀이었구나!’ 그제서야 그것을 기억하게 되고 깨닫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했다는 말은 본문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신약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누가복음 24장 6절에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아침에 천사가 제자들에게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저희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기억했다는 말이 누가복음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두 번 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도 기억한다는 말이 또 등장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패턴을 보여줍니다. 기독교 신앙이 정립될 수 있었던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기독교는 폐업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창업주는 돌아가셨지요,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요, 예수님이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사람들이 그것을 저버렸습니다. 폐업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폐업할 위기에 처했던 기독교가 살아난 것 뿐만이 아니라 그때까지 수수께끼 같던 예수님의 말씀이 별안간 새로운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제자들이 그 말씀을 담대히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떤 사건이 일어났길래 이와 같은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2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그 말은 믿음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궤변이 되고 말았을 것이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 속에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느냐? 부활의 경험이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고 하나님의 선하심의 경험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해 줍니다. 기독교는 고난이 유익하다고 가르치지만 그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고난만이 우리의 몫이 아니고 그 이후에 반드시 축복과 영광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감사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할 때 그 이후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평강과 영광과 능력과 승리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고난이 과연 헛되지 않았고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고 여기에는 반드시 선한 결과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은 그 자체로 보면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내 자신을 부인하라든가, 십자가를 지라든가,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면 잃고 잃으면 얻는다든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든가,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용서하라든가,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고 용서하라든가, 이런 말씀들은 그 자체로 보면 별로 이치에 닿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믿으라는 얘기입니까. 그러나 그것을 순종해보면 그 이후에 결과에 의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또 승리하게 하시고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 주시고 오히려 축복받게 하시고 넉넉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이 정말로 옳구나! 내가 이렇게 하기를 잘했구나! 내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잘했구나! 하나님은 정말로 옳으신 분이구나!’하는 것을 경험하고 그제서야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치만 가지고, 이론만 가지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가슴으로 배우고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터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제자들이 성경과 및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믿은 것처럼 그때가면 우리도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정립되는 과정입니다. 개인에게도 그렇고 교회에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과거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이 믿음이 세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 과정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부활의 영광과 당신의 이름이 모든 이름위에 높아지는 그 영광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겟세마네의 고민과 고독함과 골고다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과한 다음에 죽음이 이길 수 없는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라고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생명의 길이요, 승리의 비결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길이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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