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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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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4:14~21)
 

한 사람이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오는데 분위기가 이상해서 뒤를 돌아 보았더니 귀신이 산발을 하고 쫓아 오더랍니다. 두려움이 밀려 왔지만 순간적으로 찬송을 부르면 귀신이 도망간다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막상 찬송을 부르려고 하니 생각나는 찬송이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답답한 마음으로 찬송가를 생각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찬송이 한 곡 생각나서 얼떨결에 뒤로 돌아 귀신을 향해 불렀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이 사람은 이 찬송을 부르면서도 ‘앗! 이것은 아니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찬송을 들은 귀신이 다행히도 주춤거리며 도망을 가는 겁니다. 귀신이 도망을 가면서 이 사람을 쳐다 보며 답가를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노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사람이 웃겨서라도 어색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웃지 않는 사람은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제가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할까요? 시간상 다음 주에 우리 교회 성도들의 인간성이 얼마나 좋은지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참으로 어려운 점이 많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설교입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강의를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 보다는 좋은 조건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배우는 학생들의 수준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는 나이와 수준들이 비슷 비슷합니다. 

또 한 가지는 학교는 배우는 학생들이 매년 마다 바뀐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은 3년, 4년이 지나면 배운 학생들은 다 졸업을 하고 새로운 학생들이 들어옵니다. 그러기에 가르친다는 것을 항상 어려운 일이지만 가르치는 내용에 있어서는 한번 만든 교안을 가지고 조금씩 변화를 주고, 새롭게 연구한 부분을 첨가해서 가르치면 됩니다. 

그런데 설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설교를 듣는 대상이 다양합니다. 지식 수준이 다릅니다. 연령 분포도가 넓습니다. 직업이 각각 다릅니다. 관심과 취미도 다릅니다. 경제적인 수준의 차이도 큽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교인들이 대체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옮기기 전에는 교인들이 바뀌지 않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목회자와 교인들은 수십년을 함께 신앙 생활을합니다. 

제가 한번 계산해 보았더니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설교하는 횟수가 일년에 약 400번이 넘습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심야기도회, 새벽기도회에서 설교하는 수입니다. 각 가정 심방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토요일과 주일에 새벽 기도회가 없어서 그렇지 일주일 내내 새벽기도회를 하는 교회 목사님들은 일년에 500회 이상을 설교합니다. 설교 내용이야 어떻든지 그 만큼 설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 만큼 설교를 하기도 어려운데 더 어려운 것은 성도들이 매번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항상 새롭고, 신선한 내용을 듣기를 원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서 설교를 통해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듣기를 원합니다. 목회자가 애를 쓰면 일 이년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한 교회에서 10년 동안 설교를 하고 나면 더 이상 설교할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목회자가 한 교회에서 10년 정도 설교를 하면 목사는 더 이상 새로운 내용을 말할 것도 없고, 성도는 더 새로운 것을 들을 것도 없습니다. 제가 조금 철이 들어 가면서 한 교회에서 수 십년을 목회하고 은퇴하시는 분들을이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은 설교로 목회한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목회를 하셨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인격이 뒷받침 되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실 때 한 교회에서 수십년의 목회가 가능한 것입니다. 

목사에게 매우 충격적인 설문 조사가 있습니다. 설교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을 설문 조사한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100개 교회를 선정해서 주일 예배를 마치고 10분 이내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오늘 설교 본문과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설문에 응답한 사람들 중에 4%만이 설교 본문과 설교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00명 가운데 4명만 설교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가 끝난지 10분 밖에 안되었는데 설교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듣고 10분 안에 다 잊어 버린다는 것은 목사를 위해서는 은혜입니다. 그렇게 쉽게 잊어 버리니 또 설교를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설교를 하기가 힘든데 모든 설교를 다 기억하고 있으면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자꾸 잊어버려야 다시 설교하지요. 그러나 설문 조사의 결과를 가지고 어떤 식으로 위로를 해 보아도 조사 결과는 목사로 하여금 답답한 마음에 한 숨을 쉬게 만듭니다. 영향력 있는 설교를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목사에게 설교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삶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인 지도자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이 주목해서 봅니다. 성도들이 봅니다. 지역 주민들이 봅니다. 목사의 외모도 보지만 그들은 목사의 삶을 봅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용납되는 것이 목사이기에 용납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목사답게 살지 못하면 바로 비난과 비판이 일어납니다. 목사의 삶은 목사 한 사람의 삶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아내를 봅니다. 목사의 자녀들을 봅니다. 목사의 부모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와 목사의 가정은 투명한 유리병에 들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목해서 봅니다. 목사와 목사의 가정답게 산다는 것은 설교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목사는 말이면 말, 행동이면 행동, 자녀면 자녀, 아내면 아내, 습관이면 습관 모든 것이 가장 모범적인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저처럼 허술하고, 실수가 많고, 다혈질인 사람은 목회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러 모양에서 목사답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이만큼이라도 목회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 여러분들의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들은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을 읽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바울의 이와 같은 모습이 부럽습니다. 성도들을 향해 나의 삶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목회자라면 그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설교는 다른 사람을 향한 설교가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을 위해서 하는 설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허물과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성도 여러분들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의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데 조금 더 철이 들고,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숙해져서 언젠가 부분적으로 나마 성도 여러분들을 향해 ‘나의 이런 모습을 본받으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목회자는 물론이거니와 교회 안에 믿음의 본된 일꾼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에 처음 등록한 성도나, 일반 성도들이 ‘나도 저 분처럼신앙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교회는 좋은 교회이고 그런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반면에 ‘야, 저렇게 믿으려면 차라리 믿지 않는게 낫겠다’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교인과 교회 일꾼 가운데 많으면 그 교회는 항상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일에 열심을 품고 앞장 서서 일하는 분들은 더 성숙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들이 섬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생활하면 언제나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삽니다. 그런 분의 삶은 교회와 목회자에게 덕이 됩니다. 그러나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상처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를 줍니다. 그런 분의 삶은 결국 교회와 목회자에게 아픔이 됩니다. 

예를 들어 무더운 여름과 혹독한 추위가 있는 겨울에 차량 안내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중심으로 주차합니다. 주차하기 쉽고, 빠르게 빠져 나갈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그래서 차량 안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짜증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 항상 웃으면서 차량 안내를 하는 모습은 상대방에게 감동을 줍니다. 상대방에게 믿음의 본이 됩니다. 어느 교회가 한 동안 주방이 운영되지 못했답니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가운데 권사님들 끼리 대판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 주방에서 솥뚜껑 주인이 되는가 하는 주도권 문제로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남은 음식을 가지고 누가 싸갔네, 안 싸갔네 하는 문제로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일로 교회가 어수선해지고 헌신적으로 섬기던 교인들이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기도 하며 그 갈등과 상처로 인해 교회가 한 동안 진통을 겪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문제를 수습하느라 아주 힘들었답니다. 

교회에서 앞장 서서 일하는 직분자들의 생각과 언행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히 항존직자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들의 믿음 생활을 지도해 나가는데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직분을 주심은 교회와 목회에 힘이 되고, 성도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고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기도, 그리고 섬김과 교회의 재정을 뒷받침하는 헌금 생활까지도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헌법에 보면 교회가 장로 한 사람을 세우는데 세례 교인 30명당 한 명을 세울 수 있습니다. 장로 한 사람을 세울 때 그 기준이 세례 교인 30명에 한 명을 세운다는 것은 장로는 최소한 세례 교인 30명 이상을 돌보며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수집사와 권사는 그러한 인원수의 기준은 없지만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돕는 일에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 직분자들은 교회 생활과 신앙 생활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신앙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또 다른 목회자가 되고,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저를 참 사랑해 주시는 선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섬기는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교회의 일반 예산과는 전혀 관계없이 1년에 약 3억 5천 정도의 재정을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합니다. 외국인 노동자 60명이 그 교회가 마련한 기숙사에서 생활합니다. 숙식이 모두 무료입니다.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 10명을 신학교에 보내 신학을 공부시키고 있습니다. 전액 장학금을 지급함은 물론이고 한 달에 생활비 50만원씩을 지원합니다. 그들이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되어 본국으로 돌아가 목회를 하는데 약 5000만원 정도를 들여 교회를 세워줍니다. 그리고 자립할 때까지 목회 생활비를 지원합니다. 대단한 사역입니다. 

그 목사님이 외국인 노동자 목회를 그렇게 보람있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교회 한 분의 장로님과 권사님 내외분의 열정적인 헌신과 지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일은행 부행장으로 있는 조상호 장로님과 부인되는 김상숙 권사님입니다. 제가 그 분들을 아직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한번 만나 볼 생각입니다. 그 분들은 목사님의 목회를 도와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는데 헌신적인 삶을 삽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큰 사고를 당하거나, 큰 병에 걸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한번도 거절하는 적이 없답니다. 수술과 회복의 모든 비용을 다 그분들이 제공하며 정성을 다해 그들을 돌본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 분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고 병원에서 치료비가 7백만원이 넘게 나오자 의료 보험이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접수하면 의료 보험이 적용되니 그렇게 하자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조장로님 내외분은 ‘좋은 일을 하려면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그 돈을 그대로 다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3백명이 채 안되는 교회에서 일년 교회 예산과는 별도로 일년에 3억 5천만원 정도의 재정이 지출 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의 섬김과 사역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내는 후원금이라고 합니다. 조장로님 내외분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서 지원하는 금액이 일년에 일억원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주일이면 그 냄새나는 외국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며 악수하고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그들에게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는 모습은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고 자랑이 된답니다. 그 분들은 그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기에 전심을 다해 행복한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 사모님께서 ‘서목사님, 우리가 목회자 가정이지만 그 분을 보면 정말 본받아야 할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그 분들의 섬김을 보고 얼마나 감동을 받는지 모릅니다. 그 분들로 인해 교회에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정리되고, 교회 분위기가 얼마나 화목한지 몰라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교회의 항존직자들은 항존직자로서, 교회의 일꾼들은 일꾼으로서, 성도들은 성도로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작은 예수가 되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잔잔한 믿음의 감동을 만드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삶의 내용이 예수님을 본받는 모습이 되어 예수님의 향기로 우리 삶의 자리를 가득 채우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주일 아침에 ‘나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외침에 신앙의 도전을 받아 우리도 ‘나를 본받으라’고 외칠 수 있는 교회와 성도로 성숙하게 성장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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