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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가치를 따라 사는 여정 (요일 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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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가치를 따라 사는 여정 (요일 2:15~17)


인간은 세월이 흐르게 되면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든 모든 사람들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늙은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미숙한 사람들을 봅니다. 최근 이 땅에 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동시에 증가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노인 범죄입니다. 

최근의 유명한 남대문(숭례문)방화 사건, ‘노인과 바다’ 사건으로 불리운 전남 보성 어부의 연쇄 살인 사건, 그리고 지난 7월의 할머니 소매치기단 4인조 사건이 모두 70대 노인들의 범죄 사건들이었습니다. 

지난 4월 25일에 황혼 범죄에 대한 통계 발표가 있었습니다. 1996년부터 2006년 까지 노인 인구가 전국적으로 46가 증가하는 동안 61세 이상의 노인 범죄는 무려 139가 증가한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자연 연령이 정신 연령의 성숙을 보증하지 못한다는 통계적 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연륜이 더해지고 교회에서 보낸 세월이 많아지다 보면 우리는 교회 직분도 받게 되어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교회 직분의 타이틀이 우리의 영적 성숙의 지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 직분과 상관없이 여전히 영적으로 미숙한 성도들을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영적 성숙과 영적 미숙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의 하나가 바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신앙적 가치관을 얼마나 내면화하고 사느냐,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적 가치관을 붙들고 살고자 하는 모습이 과연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적 가치관과 비성경적 가치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비성경적 가치관의 핵심은 한마디로 세속성이요 순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떤 분이 교회 생활을 오래 했어도 그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순간적인 가치에 붙들려 살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영적으로 미숙한 성도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세속적 가치에 붙들린 인생과 반대로 영원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생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속적 가치-지향적 인생과 영원한 가치-지향적 인생, 도대체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세속적 가치 지향의 인생의 모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속적 가치 지향의 인생이란 한마디로 본문 사도 요한의 가르침에 의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런데 이 세 가지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마귀가 인간을 유혹하고 파멸시키고자 태초부터 사용해온 무기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에덴의 동산에서 첫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본 순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느끼게 한 것입니다. 먹음직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요, 보암직이 바로 안목의 정욕이요, 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만큼 지혜로와 진다고 함이 바로 이생의 자랑이 아닙니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금식하고 계신 광야의 예수님을 찾아온 마귀는 다시 이 세 가지 무기를 사용합니다. 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육신의 정욕의 시험이지요.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 주며 절만 하면 다 주겠다고안목의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여기서 뛰어 내려 보라고땅에 몸이 닿기 전 천사가 너를 붙들어 올리면 너는 내일 유명한 존재가 된다고이생의 자랑이지요.

이 세 가지 자랑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충동에 기초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권력욕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는 이런 것들이 인생의 생존의 욕구가 아니냐고 항변할 수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욕구 그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구가 남용되고 과용될 때 그것이 바로 성경이 경계하는 정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 먹는 것과 먹기 위해 사는 데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살기 위해 먹는다면 그것은 나무랄 것 없는 생존의 욕구이지만, 먹기 위해 사는 순간(먹는 것이 생존의 목적이 되는 순간) 우리는 육신의 정욕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괴테가 그의 유명한 작품 ‘파우스트’에서 묘사하고자 한 유혹이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까. 주인공 파우스트가 노 박사가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이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악마 메피스토 펠레스는 아름다운 처녀의 환상을 보여주며 그를 술자리로 그리고 마녀의 동굴로 인도합니다. 마약을 먹은 그는 그레트헨과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제2부에서 황제의 중신이 된 파우스트는 이제는 돈의 욕망, 재산의 욕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끝없는 욕망의 결론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마지막으로 필요했던 것은 돈도 쾌락도 아닌 오직 속죄의 은총임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이런 세속적 가치의 욕망에 빠지는 순간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그리고 이런 욕망의 출처는 결코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욕망의 공통점을 본문 17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그것은 지나가는 일순간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를 추구한 종말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표현을 빌리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인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세속적 가치 지향의 인생을 살것인지-그것은 우리의 선택의 몫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선택은 어느 날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의 날-그 날은 결국 대부분의 인생들이 붙들고 살아온 세속적 가치의 생명이 순간이었음을 드러내는 날인 것입니다.


둘째로, 영원한 가치 지향의 인생의 모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17절을 읽겠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어떤 단어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까? 이 세상과 정욕은 하나님의 뜻그리고 지나감과 영원히 거함이 대칭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정욕은 지나가는 것이라고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 영원히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욕망을 넘어서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사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결국 헛된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요 사상가인 키엘케골은 인간 실존의 3단계 설을 주창합니다. 인간은 심미적 실존에서 도덕적 실존으로 그리고 마침내 종교적 실존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미적 실존이란 감각적 쾌락과 원초적 욕망을 따르는 실존이고, 누구나 인생을 이 단계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단계가 필연적으로 가져다주는 범죄와 죄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도덕적인 실존의 단계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내면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이것이냐 저것이냐/선이냐 악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우리의 평생은 이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택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도덕은 우리를 죄책의 자리로 인도할 수는 있어도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종교적 실존의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서 우리는 비로소 순간의 가치가 아닌 가장 높은 절대 가치, 영원한 가치를 붙들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그 가치는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태12:50) 

그래서 요한은 한 평생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전도하고 사랑하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부어 바쳤던 것입니다. 지난 추석절에 우리 교회 성지 순례단(총126명)을 모시고 다시 터키를 다녀왔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성지가 아직도 거룩하게 기억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이런 사람들-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한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돈과 쾌락과 권력을 쫓아 산 자들의 흔적은 다만 허망한 종말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겠다고 고백한 바울, 그리고 주님의 가장 큰 계명은 형제 사랑이라고 너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외친 사도 요한, 그들의 흔적은 성경으로 역사로 그리고 전승으로 어디에나 그렇게 거룩하게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터키 성지순례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깨우침을 주고 최고의 감동을 선물하는 한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갑바도기아의 지하 공동체, 지하도시 데린 큐유 방문일 것입니다. 

데린 큐유는 ‘지하 우물’이란 뜻으로 가장 깊은 곳은 무려 지하 60m(현재 30m지점 까지만 공개)이상 파고 들어간 지하에서 무려 2만여명 이상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기독교 박해 시절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곳입니다. 허리를 바짝 꾸부리고 지하 8층(전체는 지하 20층)을 좁은 통로를 따라 내려가면 거기에 십자형으로 된 지하 채플(중간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어둑한 지하의 미로에서 그들은 평균 수명 40세를 넘기지 못하는 인생을 살면서도 예배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지키고자 거기에 산 것입니다. 

배교하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맘대로 살수 있는 세상이 있었음에도 그들이 지하 인생을 선택한 이유-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거기에 성도의 진정한 사랑이 있었고, 거기에 예배의 자유가 있고, 거기에 기도와 찬양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 성지 순례에 참여한 분들의 데린 큐유 방문 소감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영화에서나 소설속에서나 있을 법한 지하세계를 경험한 것은 충격이었다. 상상을 추월한 장소였다” 

“지하도시 데린 큐유를 통해 나의 모습 나의 신앙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간 믿음의 사람들의 역사적 장소를 보며신앙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는 수준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깊이 느끼게 되었다” 

“몸 하나 빠져 나오기 힘든 굴속들을 삶의 터전으로 살았던 그들의 주님 사랑이 어떠했는지 마음으로 전해오면서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슴이 저려왔다. 그 날 일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님께 다만 회개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지하인생을 단적으로 묘사하는 말씀이 히11:25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하고” 

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까? 죄악에는 낙(쾌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증언처럼 ‘잠시’에 불과 합니다. 그 ‘잠시’가 지나가면 영원한 회한과 영원한 고통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데린 큐유의 공동체 사람들은 차라리 그런 지하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붙들고 영원히 자유로운 자로, 영원한 기쁨의 인생, 영생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의 결론 부분에서 이런 성도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기록합니다. 

한 번역학자는 이 부분을 “세상이 이들을 두기에 세상은 적합한 곳이 못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순간의 가치, 본능적인 쾌락의 가치를 따라서 세상을 사랑하며 살고 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아니면 영원한 가치를 따라 살고 있는 자들입니까? 영원을 향한 네비게이션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우리의 진정한 가치로 품는 순간 시작되는 여행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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