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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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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마 20:1~16)


우리가 한 본문을 대할 때에는 전후 문맥을 읽어보고, 역사적인 상황과 배경을 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비유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에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이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의 계명을 따라 살았습니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는 주의 말씀에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때에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젊은 사람이라면 이상을 추구하고 돈은 없어도 상관없다고 결심할 수 있는 나이인데, 재물이 축복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이 사건은 성경에서 안타까운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청년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으며 영적인 갈급함도 있었고, 주님을 찾아와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의논할 만큼 흠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또한 재물이 많은 부자였으니, 얼마나 자랑스런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가 재물이 많으므로,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따르라는 말씀에 걸려서 주를 따르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랐습니다. “주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우리 주님은 12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12보좌에 앉아 12지파를 심판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마19:30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에는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큰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도원에는 때로 시간을 다투어 일할 것이 많았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에 장터-인력시장에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시장과 광장 한 구석에 사람들이 모여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인력시장에는 사람들이 일찍부터 나와서 불을 피워놓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주인은 한 사람당 1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꾼들을 들여보내고 그것으로 끝났다고 하면 사건이 될 수 없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더 많은 일꾼을 부르려고 계속 쉬지 않고, 장터에 나오고 있다는 것으로 사건화 되고, 의미 있는 교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오전 아홉시 쯤 나가서 보니, 사람들이 장터에 서서 빈둥거리며 있었습니다. “여러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라고 하고는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주인은 다시 열두시 정오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보니 그래도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대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불러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했습니다. 오후 5시쯤이 되었습니다.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해가질 것이요, 일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도 장터에는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라고 했더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주인은 “당신들도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곧 해가 넘어가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일꾼들은 저녁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됩니다. 일이란 어떤 일이라도 힘든 것이요, 남의 일이란 어느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남의 일을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얼른 임금이나 받아가지고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저녁 먹고 편히 쉬고 싶습니다.  주인은 임금을 주기 위하여 자기 관리인에게 말했습니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까지 품삯을 치르시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관리인은 저녁 때, 나중에 들어온 사람부터 역순으로 임금을 주는데 1데나리온 씩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눈여겨보던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선에 주는 돈은 받아 넣고, 주인에게 따졌습니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보이고 있으며,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설교하는 목회자로서 우리 교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본문을 접근해보았습니다.  

우선 포도원에 일꾼이 필요하였다면, 한꺼번에 다 불러들였으면 불평할 것도 없고, 일손이 모자라지도 않았을 터인데, 주인이 지혜롭지 못하여 여러 번 수고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생각하기를 이른 아침에 들어온 사람부터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주어 보내놓고, 그들이 나간 다음에 다시 오전 9시 때에 들어온 사람들을 불러 한 데나리온을 주어 보내고, 이런 식으로 큰소리 칠 사람들을 먼저 보낸 후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노임을 주는 순서를 거꾸로 해서 문제가 일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한 데나리온 약속한 일찍 들어온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는 한 데나리온을 주고, 다음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4/5 데나리온을 주고, 그 다음 정오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3/5 정도 주고, 오후 3시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2/5정도 주고, 마지막 들어온 사람에게는 1/5정도 주었으면 할 말이 없고, 공평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하신 말씀을 보면 포도원 주인은 나중에 들어와서 한 시간 정도 일한 사람에게도 1데나리온, 오후 3시 경에 들어온 사람도 1데나리온, 정오에 들어온 사람도 1데나리온, 오전9시 경에 들어온 사람도 1데나리온,  그리고 하루 종일 이른 아침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일한 사람도 1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땀 흘리면서 일한 사람이 볼 때에, 주인이 하는 처사가 마땅치 못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얼마나 일하였느냐 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모든 일꾼들에게 동일한 액수, 1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발견해야 합니다.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로마의 돈으로 예수님 당시에 노동자가 하루 동안 일하고 받을 수 있는 임금이었습니다. 노동자나 직업군인의 일반 보병이 하루 일하고 받는 값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주막 주인에게 건네준 치료비용이 2데나리온이었습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사건에서 엄청난 군중을 먹일 수 있는 돈을 말할 때에 200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본다면 1데나리온이란 돈이 아주 가치 있는 돈이었고, 1데나리온을 가지고 부족하지만, 25명 정도는 한 끼 먹일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데나리온은 한 가족이 하루 동안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주님은 하늘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절은 1절에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포도원의 주인으로 표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 그 하나님을 만나고 감사하며, 응답하면서 돌아가야만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 수확기를 맞아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에 인력시장에 나가서 일꾼들을 모아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유대나라에서 포도 수확은 9월말 경에 시작하여, 우기가 오기 전에 서둘러 마쳐야 합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하루 동안 일하는 것은 대략 10-12시간 정도로 해가 뜨는 시간부터 해질 때까지였습니다.  

당시에 장정들이 나가서 놀지 않고, 일거리를 얻고, 하루 벌어서 식구들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은 잘 사는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혜택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이 있어 하루도 허송세월하지 않고, 보람 있게 일하고 자기 가정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나서 다 잘되는 것으로 알지 않고,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유진 로우리’박사는 세계 설교학의 권위자요, 스토리텔링 설교 방법을 제창하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이 본문을 ‘가족의 언약’이라는 입장에서 해석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봅니다. “여러분이 현재 세 아이의 부모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들은 각각 세 살, 여섯 살, 아홉 살입니다.   

자,  당신은 아홉 살 박이 아이가  세 살 박이 아이의 세 배만큼 집에 오래 있었다고 해서 세 배 더 사랑하겠습니까?  아홉 살 박이 아이가 세 살 때보다 부모를 세 배 더 사랑하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는 가족입니다.  맞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이 스토리 또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의 언약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사업적 거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그 포도원 주인은 이제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가 다시 장터로 돌아온 이유는 아직까지 초대받지 못한, 응답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보십시오. 아침 7시에 초대를 받았는지, 9시에 초대를 받았는지, 정오에, 오후 3시에, 5시에, 혹은 2시에 받았는지,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포도원에 초대받은 것은 집에 초대를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포도원에 초대를 받은 것은 집에 초대를 받은 것이라는 가족의 언약이라는 관점에 본문을 보라고 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은 당신의 나라에 한 사람이라도 더 불러들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지금 포도원 주인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잘 관찰해보아야 합니다. 주인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게 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라고 혜택을 주시고 있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보았습니다.  

어떤 주경학자는 5차례의 시기를 두고 이른 아침은 아담시대, 오전9시 경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시대로, 정오의 시기는 모세 시대로, 오후 3시 경은 바벨론 포로 시대로, 오후 5시 경은 그리스도의 시대로 보려는 이도 있습니다. 확대해석은 필요치 않다고 봅니다. 어떤 학자는 개인의 관점에서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시기가 다 다르고,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본문의 말씀을 경제논리로 보지 마십시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정도에서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진 성경이 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이라고 하면 무슨 진리가 있겠습니까?  많은 부분이 역설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믿을만한 가치가 있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과는 아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니, 믿을 가치가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세상 끝 날까지, 개인적으로는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품꾼을 부르시고 찾으시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헤매고 있던 죄인들,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 저녁때가 되어도 누구 한 사람도 불러주는 이 없고, 알아주는 이도 없는데,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찾아오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 한 사람, 한 영혼에 관심이 있지, 한 데나리온은 사실 중요치 않습니다. 사람을 불러 일하게 하시고, 가족을 돌아보게 하고, 한 사람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복되게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사람이 많이 일하고 적게 일하는 것보다, 포도원에 들어왔다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빠르고 늦은 것이 없습니다. 오래 믿었느냐, 짧게 믿었느냐 하는 것보다 포도원에 들어온 것을 같이 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래 믿었느냐는 것보다, 믿음의 태도를 귀하게 보십니다.  오후 5시에 들어온 이는 주인의 손길만 바라보고, 주인이 늦게라도 불러주신 것을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시간을 일하였어도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침 일찍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자세에서, 나는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인데, 늦게라도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나는 다만 감사할 뿐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잘 지키시는 정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이 주인은 아침 일찍이 직접 장터에 나가서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 불러주신 것도 은혜요, 일거리가 없어 하루 종일을 걱정하였는데, 늦게라도 불러주시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주인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았고, 주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주인의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오후 5시 경에 나가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경제논리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밖에서 버림받지 않도록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게 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실 때에 공로주의, 율법주의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것이 바로 공로사상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자리를, 더 많은 축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공로사상입니다. 우리는 일찍 부름을 받았으니, 일거리가 없어 서성거리고, 가정을 생각하며 초조하고, 자식들을 어떻게 먹기고 공부시킬 것인지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일찍 부름 받은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방황하지 않고, 어린 주일학교 때부터 믿었으니, 그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채권의식을 가진 사람처럼 먼저 믿은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빚진 사람처럼 채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일찍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종일 일한 것에 감사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먼저 부름 받고, 가족을 능히 책임지고 이끌어가고, 사람 노릇하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의로 가득차서,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었습니다. 늦게 들어온 사람에 대하여 동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혹시라도 나는 오래 일한 사람으로 주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사람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평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주인인데, 인색하고 옹색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우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받아야 할 사람이고, 나보다 더 일한 사람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늦게 들어오고 조금 일한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는 더 받아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보상이나 상급이란 것이 일찍 믿었다거나, 오랫동안 사역자로 헌신하였다는 일의 분량이나 일한 시간의 차이로 인하여 주어지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평가되는 것을 알게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의 양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일하는 태도를 보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한 시간의 길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감격 속에서, 불러주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며, 감사하면서 일하고 헌신하는지를 보시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관점에 이해해야지, 인간의 공로사상을 가지고 평하지 말아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나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입니까?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인정받고 있으며,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겸손하고 절제하고 감사만 해야 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많다, 가진 특권이 많다, 나는 인정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때에는 자아가 살아서 주인 노릇하기에 이것은 내려놓아야 할 교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주십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자신 있게 요구하듯이 말했습니다.  마19:27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12제자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이른 아침에 들어온 일꾼이라고 생각하느냐?  더 많은 것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오후 5시에 온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겸손하며, 감사하며, 불러주신 것만으로 충분하고, 내일도 불러주신다고 하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동안 아무도 나를 써주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도 눈여겨보아주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불러주신 것으로 감격 속에 사는 것입니다. 누가 더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나를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보답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 한 영혼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한번 더 나가보면 더 구원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장터를 향하시는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감사하며,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영혼을 구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의 영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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