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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 말고 주저하지 말라 (신 1:19~25, 마 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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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고 주저하지 말라 (신 1:19~25, 마 24:5~6) 


어느 행사장에 차들이 줄지어 들어옵니다. 행사장 입구에서는 안내원이 “여기서 차에서 내려 걸어가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검은 세단 하나가 통과했습니다. 장관이 탄 차였습니다. 다시 차가 입장합니다. 시장이 탄 차였습니다. 다음으로 국회의원이 탄 차가 다시 무사통과했습니다. 이 때 자그만 마티즈가 ‘쌩’ 하고 들어갑니다. 

안내원이 물었습니다. 
“무슨 차요?” 
“예, 국민차입니다”. 

세상에서는 권력이나 지위는 두려움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국민입니다. 국민이 무서운 줄 알아야 참 통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상으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세상이 두렵지 않은 법입니다.
  
두려움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이 두려움이 많습니다. 교통법을 어기면 경찰이 두렵습니다. 사채 쓰고 못 갚으면 조폭 해결사가 두렵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살고 있으면 죽음이 두렵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가장 두려움이 없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나서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일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운가 아니면 사람이 두려운가를 잘 판단해 보세요. 하나님이 두려워야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흔히 “가장 두려운 게 뭐야?”라고 물어보면 “귀신”이라고 합니다. 그 때 “야, 나는 네가 더 무서워”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실은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두러움은 사람의 힘으로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두려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에머슨은 “두려움은 언제나 무지에서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두려움은 그 자체가 병입니다. 전쟁에서 칼로 죽은 자보다 두려움으로 죽은 자가 더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사는 법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기는 법입니다.
  
두려움의 대상은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는 사울이 길갈에서 취하지 말라는 양과 소를 가지고 제사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이 때 사울은 회개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그리고 그는 이어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이 두려우면 이것이 죄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의 대상입니까? 자시도 모르게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본문 19절을 보세요.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합니다. 40년간 광야에서 방랑하던 백성들은 시내 반도 북쪽, 아라비아 광야 서쪽의 거친 사막 지대에 살게 됩니다. 물이 귀하며(민 21:5),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암석이 있는 거친 모래사막입니다. 불 뱀이나 전갈과 같은 것들이 득실거립니다(8:15). 황폐한 고원 지대이며 죽음의 모래 폭풍이 쉴 새 없이 붑니다. 실로 크고 두려운 광야입니다. 이 지역은 오늘날 ‘방랑’(wandering)이란 뜻을 지닌 ‘엣-티’(et-Tih) 광야로 추정됩니다. 이런 여행하기 정말 힘든 두려운 광야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두려운 광야를 우리가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우리의 광야 같은 여정에서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1절에는 말씀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가나안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 땅은 아직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약속한 그 땅은 이미 얻은 줄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두신 땅을 보셨나요? 우리 앞에 두신 기업이나 재물, 자리나 환상을 보셨나요? 우선 봐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보면 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리인지 알아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올라가다’는 ‘알라’라는 말입니다. 한 자리에 안주하지 아니 하고 일어나 분투하라는 뜻입니다. ‘얻으라’는 ‘레쉬’라는 말로 ‘소유하라’는 말입니다. 올라가는 것과 얻는 것 이 모두가 아무 장애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지만 백성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새로운 일이나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껴야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107회, 신약에서는 42회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12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초급 신앙인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자를 두려워하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가난을 두려워한다면 돈이 우상이 될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성공이 금송아지 될 것입니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인간관계가 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비로소 이 일이 가능합니다.
  
이사야 8:13에는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여 놀랄 자를 삼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탄생할 때 산파들이 그랬습니다. 바로는 히브리인들을 말살하려고 남자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고 합니다. 바로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신령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남자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습니다. 이 산파들 덕에 모세가 태어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광야의 소리로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이전에는 여종의 한 마디에 두려움을 느껴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강림을 체험한 다음에는 공회 앞에서도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던 관원들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두려워하지 않고 외칩니다.
  
어느 랍비가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우연히 왕후의 장신구를 줏었습니다. 그런데 왕은 왕후의 장신구를 30일 내에 가지고 오면 상금을 줄 것이고, 30일 이후에 가진 것이 발견되면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31일째가 되어 랍비는 왕후의 장신구를 가지고 왔습니다. 
“30일전에 포고문을 보지 못했나요?” 
“보았지요.” 
“30일이 지나면 큰 봉변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예,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제 가지고 오지 않았나요? 어제 가지고 왔으면 상을 탔을 것인데, 오늘 가지고 와서 목숨이 아깝지 않소?” 

그 때 랍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일 30일 전에 돌려줬으면 당신을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상을 타려고 한다고 오해 받았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 가지고 온 것은 상을 타기 위함도 아니고, 당신도 두렵지 않고 나의 두려움의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때 임금은 “그런 하나님을 가진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29:5에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두려움이 대상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것도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25절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지중해 연안의 가나안과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고대에 소위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지역으로 불릴 만큼 좋은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확실한 은총입니다. 의심하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않아야 주저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면 주저하게 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연예인들이 번지점프를 시도하는데 어떤 사람은 용감히 올라가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포기하고 내려옵니다.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은 아무리 안전해도 주저하게 됩니다. 번지점프 세계기록은 지난 8월18일에 세워졌습니다. 뉴질랜드인 마이크 허드가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하버브리지에서 10시간 동안 103회나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이 부지런히 뛰어내려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하네요.
  
라틴 격언에는 “용기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일을 하는 중에 생기고, 두려움은 주저하고 망설이는 가운데 피어난다”고 합니다. 주저와 두려움은 항상 같이 갑니다. 이 둘은 단짝입니다. 두려움과 주저는 둘 다 하나님 불신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두려움이 생기고 주저하게 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제2부 후반에는 절망거인(Giant Despair)으로부터 구출되는 낙심씨(Mr. Despondency)와 그의 딸 질겁(Much-afraid)이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그들의 순례길을 힘들게 만든 심약씨(Mr. Feeble mind)와 그의 삼촌 두려움씨(Mr. Fearing), 지팡이 없이는 조금도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 주저씨(Mr. Ready-to-halt)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려움과 주저는 같이 갑니다. 이 둘은 꼭 같이 순례의 길을 힘들게 합니다. 예수를 믿기 힘들게 합니다.
  
할까 말까? 갈까 말까? 먹을까 말까? 많은 사람들은 주저하다가 시간을 다 보냅니다. 의지가 약하고 자기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단이 느립니다. 결단이 느린 사람은 항상 주변의 주장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결단대로 살지 못하고 주저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가 솔깃하여 따라갑니다.
  
시저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알렉산더는 “나는 어떤 일을 임할 때는 절대로 망설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 결심하면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성공합니다. 주저하는 사람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왜 백성들에게 주저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광야와 가나안땅은 비교가 안 됩니다. 주저할 만큼 비교급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좋은 땅이니까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야에 살면서 가나안 땅을 준다는데 주저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며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왜 주저합니까? 선택하기가 어려울 만큼 비슷하니까 주저합니다. 안심스테이크와 등심스테이크가 비슷하니까 뭘 먹을까 주저합니다. 자장면과 짬뽕이 거기서 거기니까 주저합니다. 신앙은 왜 주저하지 않게 합니까?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차이가 있으므로 주저하지 않게 합니다. 지옥과 천당을 비교할 수 있습니까? 어디로 갈까 주저하지 않습니다. 땅과 하늘이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어디가 좋을까 주저하지 않습니다. 죽음과 생명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악과 선은 극과 극입니다. 그래서 주저함이 없이 쉽게 선택이 가능합니다.
  
확실하게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분별력이 있으면 결코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어느 아이는 좋은 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합격 통지를 받은 다음에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고 하니 장학금도 팽개치고 서울대학교로 갑디다. 왜 그렇게 합니까? 비교할 수 없이 좋기 때문입니다. 이 때 주저하지 않고 선택합니다.
  
에스더를 보세요. 하만이란 사람이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게 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모두 죽이려고 합니다. 모르드게는 이런 때에 왕에게 가서 일러야 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에스더가 왕후이지만 왕이 부르지 않은 때에 왕에게 나아가면 죽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모르드게는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주저하지 않고 왕에게 나아갑니다. 이 때 왕은 에스더를 기쁘게 맞아 주었습니다. 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왕에게 나아갔습니까? 옳은 일이니까 그렇게 하였습니다. 옳은데 대한 확신이 주저하지 않게 합니다.
  
사도행전 21에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다. 바울을 아끼는 성도들은 울면서 가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절에는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라고 합니다. 어떻게 바울은 죽음의 자리에까지 주저하지 않고 갈 수 있습니까? 주의 뜻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양다리를 걸치기 못합니다. 좋은 쪽을 택하고, 옳은 쪽을 택하고, 주의 뜻을 택하는 이 선택이 신앙입니다. 확고한 신앙은 주저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좋은 것, 옳은 것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선택하셔도 얼마든지 좋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선택하는 그 일에 주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카마다 마사루는 ‘판단을 주저하는 사람은 미래가 없다’는 책을 썼습니다. 삶에서 주저는 실패입니다. 헨리 소로우는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라는 시에서 “시도해 보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시도하십시오”라고 권합니다. 확실하게 주저하지 않고 시도하고 선택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신앙은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서울서 골살이 가는 벼슬아치들에게 세 가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평양 기생과 충청도 양반과 전라도 아전이라고 합니다. 평양 기생에게 잘못 빠지면 패가망신하고, 충청도 양반에게 잘 못 보이면 감투가 날아가고, 전라도 아전에게 잘못 말려 들어가면 관복 입은 허수아비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의 두려움은 영혼을 잃는 두려움에 비하면 두려움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잃고 영혼을 잃는 일입니다.
  
참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4:6에는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두려워해야 할 상황이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말세도 재림도 다 문제없습니다. 두려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직은 내 손에 든 것이 없지만 얻은 줄로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이미 주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싸움은 이미 승리하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다윗은 전쟁할 때 하나님께 물어보고 승리를 보장받고 싸움에 나갑니다. 이미 이긴 싸움을 싸웁니다. 손자병법에도 그렇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겨라, 이겨놓고 싸우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병법입니다.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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