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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허다한 무리와 제자의 차이 (눅 14: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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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4:25~33 
 

추석명절을 맞아 성도 여러분과 가정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요즘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을 못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대기업의 사장이라면 어떤 사람을 신입사원으로 뽑으실 것인가요? 

만약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늘날 대기업 입사 시험에 응시했다면 누가 합격했을까요? 성경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인간 됨됨이와 성격, 가치 판단 능력, 이런 것을 오늘날의 기준에서 판단하고 채점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이 열 두 명의 성격을 분석해 보면 

1) 베드로는 분명 성격이 급하고 덤벙거려서 떨어졌을 것입니다. 

2) 안드레는 너무 내성적이고 일에 대한 추진력이 떨어져서 탈락했을 것입니다. 

3) 또 야고보와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 했던 것을 보면 성격이 불같아서 떨어졌을 것입니다. 더욱이 어머니의 치마 바람에서 자라서 자립심이나 의사결정에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4) 도마는 매사에 상대방을 의심하는 것이 많아 떨어졌을 것입니다.  

5) 세리 마태도 과거에 로마의 앞잡이로 세금 거두는 일을 했으니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나 화합에 문제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탈락했을 것입니다. 

6)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노조의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탈락시켰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 합격했을까요? 

제자들 중 최적격자는 아마도 가롯 유다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고 매사에 모든 일을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더욱이 애국자로서 유대나라 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친 사람입니다. 그러니 최고 점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뿐 만 아니라 오히려 허물이 많고 단점이 많은 갈릴리 촌놈들인 평범한 서민출신 11명의 제자들을 다 택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정하는 사람은 계산에 빠르고 외모도 어필하고 능력도 있고 말도 잘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입니다. 실력도 아니고 나이도 아닙니다. 경력은 더더군다나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일까요?   

제가 질문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에게 있어서 어떤 사람입니까? 

성도입니까? 신자입니까? 아니면 일꾼입니까? 제자입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은 여러분을 누구라고 인정해 주실까요? 

오늘 성경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무리와 제자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구별의 기준이 뭘까요? 일반 신자냐, 제자냐의 차이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중심에 의해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나이나 외모나 학벌이나 출신이나 능력이나 그런 것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던 “허다한 무리들” 그들 중에도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동시에 병을 치료하거나 먹을 것을 찾거나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는 사람은 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가운데 제자를 찾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철저히 예수 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허다한 무리에 속하여 사십니까? 아니면 제자로 살아가십니까? 예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면, 

어떤 자가 되어야 합니까?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이 답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방법을 찾아봅니다. 


1. 사랑의 우선순위가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26절을 보세요,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부모, 처자,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만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하셨잖습니까? 왜 주님의 제자는 가족이나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이 본문의 정확한 의미는 미워함이 아닌 사랑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누구를 가장 사랑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최우선순위가 세상이 아닌 주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고 그 다음에 다른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2장 찬송가 가사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다는 이 찬송이 여러분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축구의 황제 ‘펠레’에게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십니까?” 라고 물었답니다. 그가 말하기를 “공을 차고 있는 시간은 공을 차는 시간이고요, 공을 안 차면 축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요, 축구에 대해 이야기 안 할 때는 축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꿈도 축구에 대한 꿈만 꿉니다.”라고 했답니다. 오로지 축구에 대해서만 24시간을 생각하며 지내니까 그 유명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 얼마나 예수를 생각하며 살아갑니까?  

예수님의 제자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제자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제자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최고의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주님보다 그 무엇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생명의 주인이고, 구주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허다한 무리,” 즉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많이 밀려납니다. 주님보다 자식을 다 사랑하고, 아내를 더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의 몸인 교회보다 자기 집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위해서는 온갖 물질과 마음과 노력을 아낌없이 쏟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거기에 붙들려 있으면 평생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어떻게 아냐고요? 내가 어디에 돈을 쓰느냐를 보면 압니다. 그곳에 돈을 쓰면서도 아깝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메일로 어떤 분에게 유머예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 설교 카페에 올려놓았습니다. 

천 원짜리 지폐가 만 원짜리 지폐를 만나 물었답니다.  
“어이~ 만원짜리!, 너 그동안 어디를 돌아 다녔냐?” 

그러자 만 원짜리 지폐가 대답했답니다. 
“응, 카지노도 갔었고 유람선 여행을 갔다가 야구게임에도 두어 번 정도 갔었지.” 

“야 천원짜리! 넌 요즘 어떻게 지냈니?” 

그러자 천 원짜리가 말했답니다. 
“음, 나야 늘 그렇지 뭐. 교회, 문방구, 또 교회, 교회. 나는 주로 교회에서 놀아 그러다 한번은 거지에게 갔는데 거지가 침을 뺏었는데 기분 참 나쁘더라. 그런데 그 다음 주에 또 교회에 갔단다.” 

참 찹찹한 이야기 입니다.  

마태복음 16:24를 보세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 뭡니까? 내가 소중히 여기는 그것을 접는다는 것입니다.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시험하실 때 흔히 치르시는 시험이 “사랑시험”입니다. 아브라함 마지막 시험은 독자 이식을 제단에 바치는 시험입니다. 그 시험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가 3일 길을 가서 그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는 칼날을 번쩍 처들이 내리치려 합니다. 그때 스톱시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알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요? 

창세기 22장11~12절을 보세요.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저는 이단어가 눈에 크게 보입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제자냐 아니냐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입니다. 100세에 나은 아들 그것도 독자도 드릴 수 있는 그 사랑, 그것이라면 믿음의 조상이 되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분에게 여러분의 자식도 아끼지 않고 드릴 수 있습니까? 아니 자식은 그만두고 여러분의 생명을 드릴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드렸습니다. 현재의 그들의 보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는 모두가 다 주를 위해 목을 내어놓은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스데반도 사도 바울도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자들이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대한 제자 삼으신 것입니다. 사랑의 우선순위가 올바로 세워지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2.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27절을 다시 봅니다.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하라는 말은 주를 위한 핍박과 고난, 그리고 말로 표현키 어려운 고통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관심 가져야 할 단어는 남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도 아닙니다. 내게 맡긴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제자는 자기 성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왕국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현대어 성경 번역과 공동번역에는 ‘부인하고’ 하는 부분을 ‘버리고’ 라고 번역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를 버린다”는 뜻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 2:20절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도 그렇게 고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렵습니까? 지금 내게 주어진 생명도, 명예도, 권력도, 재능도, 학식도, 건강도, 자녀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있어야 비로소 주님을 위해 대가를 지불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제자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무리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하자 베드로가 뭐라 합니까?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때 주님이 베드로의 대답하시는 말씀이 무섭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셨습니다. 

왜 베드로가 이렇게 심한 꾸중을 들었을까요?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인간적인 계산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취한데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생각 속에 들어와 고난을 피하게 하고 죄의 값을 치르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그리고는 적당히 그리고 평안하게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 속에 계신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고 그 거룩한 사역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그 길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사탄이 집어넣어준 생각입니다. 

평안하게, 그럭저럭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보세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사신 삶은 전적인 자기 부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호화로운 궁궐에서 살지 않으셨고 갈릴리 나사렛 촌에서 목수로 사셨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나 여리고 같은 대도시에서 살지 않고 변방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3.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했습니다. 
행20:24절을 보세요. 부족한 종이 제일 좋아하는 성구중 하나입니다.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본문 마지막절도 보세요.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나요? 변해야 합니다. 생각이 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 가치관이 성경적 가치관으로 완전히 뒤바꿔야 합니다. 세상적 가치관 가지고는 도저히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가롯유다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말은 하지만 이 가치관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배신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퀴즈 하나 낼까요? 
여러분! 사람의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갈 때는 언제일까요? 배부를 때일까요? 아닙니다. 철이 들 때입니다. 아직도 뭔 소린지 감이 안 오는 사람은 모르고 멍하게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대게 충청도 사람입니다. 

제발 신앙의 철 좀 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무게 있는 제자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원하는 제자는 자신 생각으로 가득찬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으로 가득찬 성도, 영적으로 철이 든 성도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의 마음을 압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이 원하는 길을 갑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바치고 가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이면서 또한 선교사역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지간한 사람 만나면 꿀리는 게 없는데 선교사님들을 만나면 고개를 숙입니다. 

왜요? 그들은 목숨을 내어 놓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죽을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신앙의 고수입니다. 나보다 고수입니다. 

“무리” 로 표현되는 신자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그럭저럭 적당히 삽니다. 순간순간 타협합니다. 그리고는 도망도 치고 타인을 위하여 자기를 내려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집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주님만 바라보고 갑니다. 물론 넘어질 때 있습니다. 잠시 흔들릴 때도 있고 갈등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갑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좀 더 합니다. 
왜 아브라함이 독자를 데리고 간 길이 3일 길입니까? 주님이 그 마음을 보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도 사람이기에 주저앉기도 했을 것입니다. 오던 길 돌아가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도 하나님께 따질 건수가 많습니다. “왜 인신 제물인가요?” “왜 내 아들입니까?” “왜 주었다가 달라고 합니까?” 할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냥 목적지까지 갑니다. 그리고 종들이 방해 할까봐 산 아래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가슴에 철판을 깝니다. 

아들이 묻습니다. “아버지 번제할 나무는 있는데 양은 어디 있습니까?”그때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신다.”말합니다. 사실은 아들이 제물인데 강심장으로 철판 깔고 올라갑니다. 그때 하나님이 스톱시키고 복을 부으십니다. 그리고 그 고백대로 준비해 놓은 양으로 제물 드리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스톱시켰을까요? 그리고 왜 그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을까요? 그 아브라함의 마음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독생자를 내어 놓는 그 아버지의 마음과 아브라함의 마음이 통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가 값없이 주어진 은혜라고 가볍게 생각지 마세요. 
우리나라에서는 공짜는 다 싸구려인줄 아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이지만 자기 아들을 죽인 하나님의 피가 담긴 은혜입니다. 

그 핏속에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것입니다. 값없이 주신 은혜라 값을 계산할 수 없어 그냥 주신 것이지 그게 싸구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 구원 받은 우리는 적어도 그 아버지의 마음은 헤아리고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안 것입니다. 그 은혜가 행위 때문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한량없는 사랑인 것을 아브라함이 알았기에 하나님이 스톱시킨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기서 해답키가 나옵니다. 여러분이 제자가 되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의 그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내 마음과 통하면 다 할 수 있고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통하니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누구보다, 그리고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제자입니다. 그대부터 주님 가신 길 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만들어 지는 것이 성경적 가치관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빌립보서3:7~8을 보세요. 
7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정도 되면 주를 위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계산도 나오고 방법도 나옵니다. 
그러면 주님의 일이 하나도 안 힘듭니다. 오히려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그게 없으니 교회를 섬기고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죽을 맛인 것입니다. 

요즘 교회 봉사를 하는데도 ‘3D 업종’이 있다고 합니다. 뭔지 아시나요? 

“주방봉사” “교회학교 교사” 그리고 “구역강사”랍니다. 어떤 이는 성가대라 하는데 그래도 그것은 예배 때마다 사람들에게 얼굴이라도 들어냅니다. 

이런 직분이 왜 3D업종입니까?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표가 나지 않고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니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 일에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입니다.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목걸이는 십자가를 걸고 있으면서 교회는 어떻게 하면 편하게 다닐까? 어떤 교회에 나가야 더 많은 서비스를 받을까? 생각한다면 신자일수는 있을지라도 제자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만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면서 날마다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기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 제자를 찾고 있습니다. 

“허다한 무리”에 속하지 마시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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