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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극복해야 할 위험들 (수 18:1~3, 수 20:1~3, 수 22: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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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해야 할 위험들 (수 18:1~3, 수 20:1~3, 수 22:24~27)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기 위해 7년 동안 싸웠습니다.
이 지루한 전쟁을 통해 그들은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고,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차지한 땅들은 지파별로 분배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축복의 삶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영적 전쟁을 치르며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주님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축복의 삶을 누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축복의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피해야 할 위험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나태의 위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이미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축복을 차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18:2-3에 보면, 

2.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 

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르우벤, 갓, 므낫세, 유다, 에브라임 지파는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나머지 7지파의 사람들도 마땅히 그 땅을 분배받아 점령하러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이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지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여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제비를 뽑아 분배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베냐민 지파에게 하신 약속은 이것입니다. 

신33:12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스불론 지파에게는 신33:18-19에 보면,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고 하면서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셀 지파에게는 신33:24-25에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약속받은 것입니까?
그들이 만약 전진하여 차지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Vision을 가지고 전진하기보다는 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놀라운 축복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것들입니다.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과감히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살이의 즐거움에 빠져서 영적인 축복 얻기를 지체한다면 
우리는 전혀 그 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전도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통해 그 영혼을 구원하고자 작정하고 계시는데도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로 지체하고 있다면, 누가 그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3,500석의 예배당을 채우기를 원하면서도 마음만 있지, 
한 영혼을 위해 복음과 사랑을 들고 나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영적인 게으름과 나태에 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축복을 누리가 원하신다면 봉사도, 전도도, 순종도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해서 안 되었다고 할지라도 
다시 한 번 더 시도해 보는 용기를 내기 바랍니다. 
차선책이 최선책의 가장 큰 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차선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차선에 만족하다 보면, 최선을 놓칠 수가 있는 겁니다. 
영적 나태함의 위험을 물리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무지의 위험입니다. 

여호수아20장에는 도피성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요단의 양쪽 편에 각각 3개씩 도합 6개의 도피성을 세웠습니다. 
3절을 읽습니다.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의도가 없이 불의의 사고로 죄를 지은 자는 이 성으로 도주할 수 있었는데, 
이는 보복을 피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습니다. 
가해자는 재판을 받고 악의가 없었음이 판명되면, 
사건 당시 재임하고 있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성에 거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안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무지에 의한 죄를 범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악의를 가지고 죄를 범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의도적이 아니더라도 죄를 범할 수 있으며, 이것도 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죄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쁜 의도로 죄를 짓지는 않았을지라도 부지중에 짓는 죄가 있지 않은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뱉은 나의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마음에 얼마나 큰 대못으로 깊이 박혀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생긴 상처만 크게 보이지 남의 마음에 준 상처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볼 줄 알면서,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지가 결국 인간관계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 한마디도, 행동 하나도 더욱 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도피성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지중에 지은 죄일지라도 
그분에게 피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주님 앞으로 피하여 해결 받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3. 불화의 위험입니다. 

여호수아22장에는 요단 동편의 지파들과 서편의 지파들 사이에 일어난 
불화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원인은 요단 동편의 사람들이 요단 강가에 큰 제단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요단 서편의 사람들이 ‘이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로 여기고 
싸우려 하는 일이 발생이 되었습니다. 
그들 민족에게 제단은 하나면 되었는데 왜 또 다른 제단을 쌓았는가 하는 겁니다.
충분히 분쟁의 소지가 되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이러한 제단을 쌓은 것일까요?
수22:24-25을 읽습니다.

24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25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그러니까 이 제단은 번제나 무슨 다른 제사를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고
후대에 요단 서편과 동편의 자손들 사이에 일어날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연합을 위한 증거로 세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단코 여호와를 거역하고 돌아서려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이러한 불화의 원인은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서야 그들의 말을 좋게 여겼다고 30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방해하는 불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화가 오해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중에 상세한 설명을 듣고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일단 오해의 위험에 걸려들면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악화됩니다. 
오해를 풀지 않으면 불화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결국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부간에도 그렇고, 가족과 친척 간에도 그렇습니다. 
성도들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떠도는 소문만 듣고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까? 
왜 그 사람의 선한 동기를 무시하고, 남의 동기를 최악의 것으로 간주하는 겁니까?
왜 남을 비난하는 소리는 빨리 듣고, 몇 배나 과장해서 남에게 전달하는 겁니까? 

사실을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제 멋대로 해석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해한다는 말은 영어로 understand입니다. 
말을 풀이해 보면, 아래에 선다는 말이죠.

오늘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해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단은 이러한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인간관계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계략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남을 중상하고 악하게 말하는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축복의 삶을 누릴 수 없어요.
이러한 위험을 극복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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