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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욘 3:10 ~ 욘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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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욘 3:10 ~ 욘 4:11)

 
화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염려하면서 어느 날 못과 망치를 주었습니다. “네가 화날 때마다 이 마당에 있는 나무 울타리에 대못을 박아놓아라.”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첫날부터 울타리에 못을 박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0개나 되는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못을 박는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못을 박으면서 함부로 화를 내는 것도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께 이제는 못을 그만 박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 분노가 가라앉은 모습을 스스로 확인하면서 네가 박은 못을 하나씩, 하나씩 빼보아라.” 
  
어느 날 울타리의 못이 모두 뽑혀지던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참 장하구나. 내 아들아. 그런데 울타리에 선명하게 난 못자국을 너는 볼 수 있겠니?” 
“네. 보이네요.” 
“네가 화나서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이 못자국처럼 누구에겐가 가슴에 상처를 내고 흔적을 남겼단다.” 
  
어느 누가 한번도 화를 내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화를 냅니다. 어떤 사람은 외적인 말이나 신경질로 혹은 행동을 거칠게 하면서 화를 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화를 표현하지 않고 내면으로 삭입니다. 또 스스로 화를 통제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화를 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화를 내고 성을 낼 때마다 성내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화를 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향해서 화를 내면 이해할 수 없다고 기분 나빠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화를 낼 때는 혹독하게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비판을 받을 때는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입니다. 

우리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시면서 우리의 화내는 모습을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복음 7:3) 

다른 사람에게 있는 작은 티는 금방 보면서 자신에게 있는 거대한 기둥과 같은 들보는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을 꾸짖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야에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7:5) 

우리는 모두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은 계속 만나기 원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아예 보기를 싫어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싫어하는 사람은 망하기를 원하는 못된 심보가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 뿌리에 넘어져서 고생 좀 해봐라.” 알게 모르게 우리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들이 문득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가슴이 아픕니다. 몸이 아프고 걱정이 됩니다. 마치 내 모습처럼 여겨지고 사랑이 있기 때문에 중보기도까지 합니다. 
  
상황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보는 눈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다르게 전개됩니다. 의심의 눈이 생기면 계속 의심합니다. 미움의 눈이 생기면 계속 미워합니다. 모든 것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 같고 마음속에 화가 솟아납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으로 보면 염려스럽습니다. 안타깝기도 하고 도와주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옛말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생각하고 말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우리에게 생기는 갈등과 다툼의 가장 큰 원인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수많은 말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 때문에 분노하고 싸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작은 일에서 시작된 화를 제어하지 못하면 심해집니다. 

우리는 왜 화를 낼까요? 사실 모든 것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듯이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납니다. 그러다가 심해지면 짜증이 점차 분한 감정으로 변화됩니다. 그래도 그때는 화를 멈추고 제어할 수가 있습니다. 통제할 수 있고 분노를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을 넘어가면 분한 감정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격한 분노로 바뀝니다. 때로는 거친 폭력도 나타나는 격노의 모습으로 감정의 분노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면 중독증세가 나타나 광분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화가 나는 시작 단계에서 자기의 감정을 처리합니다. 화가 날 때 우리는 스스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성내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 제가 왜 지금 화를 내고 있습니까?” 이렇게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때 화를 멈출 수 있습니다. 그때 분노가 아닌 기쁨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계가 넘어가면 내면에 분노가 쌓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습관성 분노가 마음속에 자리 잡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문제가 자신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노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잠언 14:17) 

하나님은 분노할 때 너무 빨리 감정을 나타내거나 조급하게 화를 내지 말라고 부탁하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잠언 16:32) 

화가 날 때 잠시 멈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보다 더 용감한 것이라고 칭찬하십니다. 분을 더디내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6:32)

스스로 마음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큰 성을 빼앗아 부자가 되는 것보다 낫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은 자주 화를 내십니까? 화를 내는 것이 이미 삶의 습관처럼 되어버렸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파괴해야 합니다. “하나님, 성을 내되 성에 붙잡히지 않게 하옵소서. 화를 내되 분노가 나를 붙잡지 않게 하시고 분노를 통제하게 하옵소서.” 

요나는 자신은 구원받지만 죄인들은 심판받기를 원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자기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선지자로 부름 받은 소명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적대국이었던 니느웨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라고 위탁받은 사명자였습니다. 그는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 성이 무너진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나에게는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내가 가서 말씀을 증거할 때 적대국의 사람들이 정말 회개를 하면 어떻게 될까? 악이 있다고 증거했는데 정말 바르게 깨달으면 어떻게 될까? 40일 이후에 성이 망가지고 무너질 것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회개하면 어떻게 될까?’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 결과가 싫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처벌해주셔야 하는데 왜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나에게는 옹졸한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선택의식도 있었습니다. 요나는 자기만 구원받아 높임을 받고 적대국 사람들은 심판받기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요나는 하나님께 매를 맞았습니다. 그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다시스로 가기 위해서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께서 배를 요동치게 하고 태풍을 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 밤낮을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토해진 다음 이제는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가 없었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니느웨 성으로 가게 된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퉁명스럽게 전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니느웨성은 삼일 길이나 되는 아주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한 일은 기껏해야 하루만 가서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40일이 되면 이 성이 망할 것이다.” 이렇게 전하기만 하면 자기 역할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이나 정성도 없었고 니느웨성에 대한 애틋함도 없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죄를 고백하자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 선지자의 말씀에 니느웨 백성들이 경청했습니다. 그리고 왕부터 하나님 앞에 회개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신들과 모든 백성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서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 3:10)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감격합니다. 

하나님은 돌멩이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막대기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도 변하실 수가 있습니다. 꾸짖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께 죄 용서를 빌면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돌이켰다’는 말에서 사람을 주어로 쓰면 회개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스스로 하신 말씀을 뒤집으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번 한  말도 뒤집기가 어려운데 하나님께서 뒤집으셨습니다. 
  
요나는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나를 화나게 했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너무 커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높아요. 그런 사람은 안 변해요. 악한 일을 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아요.” 요나는 하나님 앞에 대들며 다투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행동,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했고 불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징계하지 않고 용서하시는 것에 대한 분노가 생겼습니다. 

요나는 죄인을 묵인하시는 하나님께 화를 내며 죽겠다고 했습니다. 

요나서 4장을 읽다보면 ‘성내다’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처벌해야하는 나쁜 사람을 그냥 묵인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묵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요나의 마음이었습니다. 요나는 선지자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의 영적인 수준은 아주 낮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영적으로 결핍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는 신학적인 교리에 능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탁월했고 은혜와 용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 (요나 4:2)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역설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 싫은 것입니다. 못된 놈을 야단치고 징계를 내리는 것이 당연한데 하나님께서 용서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을 향해서 화를 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천박한 박애주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값싼 은혜주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잘못했다고 고백하면 용서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에게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요나가 화를 낸 이유는 자신이 예언한 것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40일이 지나면 자신이 예언한대로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었습니다. 선지자의 역량이 도마 위에 올려지는 것이 싫었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하나님을 가차 없이 비난했습니다. 자기 체면이 무너지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역정을 내면서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어쩔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내가 죽겠습니다. 나 같은 건 필요 없으시잖아요? 내 생명을 거두어 가세요.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떠날래요. 나는 하나님이 싫어요. 하나님을 버릴 수 없으니 이제 내가 죽겠습니다.” 

하나님은 화내는 요나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요나처럼 화를 내면 잘못된 지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화를 내는 요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4:4)

요나는 성내면서도 하니님이 자기의 뜻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성 동편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40일째 되는 날 니느웨 성이 무너지는가 안 무너지는가를 지켜보러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아주 뜨거운 햇빛이 비췄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생각하셔서 이미 박넝쿨을 자라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큰 잎으로 햇빛을 가렸습니다. 그랬더니 요나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고 있구나. 내가 뜨거워 견디기 어려운 것을 아시고 박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시는구나.’ 
  
화냈던 요나의 마음에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보려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벽에 벌레를 동원하셔서 박넝쿨을 다 갉아 먹게 하자 박넝쿨이 시들어 버렸습니다. 어제까지 그렇게 풍성했던 박넝쿨이 없어졌습니다.  뜨거운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동쪽에서 뜨거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더 화가 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요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 4:9) 

그랬더니 요나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요나 4:9) 

그러자 하나님께서 고집쟁이 요나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 4:10-11) 

이것은 하나님의 유머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뒤바꾸려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권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화를 자주 내십니까? 우리는 화를 낼 때 꼭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화내는 것이 올바른 화인가?” 그리고 화가 우리를 붙들기 전에 성냄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함부로 화를 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노란 사랑 없는 열정입니다. 분노로는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분노로는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편향된 사고로 자기만 잘났다고 하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성냄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우리 삶이 성숙해질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사회 속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화를 내면서 그것을 정당화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분노를 통제할 줄 알게 하시고 사랑 있는 열정으로 삶을 꾸며나가는 축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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