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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살의 태도로서 죽음 (요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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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회는 사람의 삶과 죽음의 태도로서 그의 한 생애를 말한다. 현대사회의 방임주의 경향은 일탈 행위들에 보다 관대해짐으로써 자살행위, 특히 음독자살의 증가를 조장하고 있다. 자살행위에 대한 사회적 여론과 그 이해는 도덕적 관념에 덜 의존하게 되었고 관대해졌다. 오늘날에는 자살을 비난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사람이 훨씬 많으며 그러면서도 자살을 비밀에 부치려는 경향은 여전하다. 

실제로 목숨을 잃은 치명적 자살의 경우에 그 주변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좀 더 큰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면 자살을 막을 수도 있었다는 자책과 슬픔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수로 끝난 자살의 경우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이끌어내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는 경우도 많다. 자살의 태도로 죽음을 택한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삶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이라 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무감각과 무관심은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마비시킨다. 삶과 죽음은 한 탯줄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인 것이다. 이것은 한 생명으로 단 한 번의 한 생애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나날을 보낸 사람이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알게 한다. 

요즘 ‘웰 빙’(well-being) 바람이 불어 의, 식, 주로 이 평안한 생활의 삶을 영유하려 모두가 ‘웰 빙’, ‘웰 빙’ 하지만 진정한 ‘웰 빙’의 그 완성은 ‘웰 다잉’(well-dying) 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품위 있는 죽음’을 가지라는 말이다.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다. 

삶의 태도란 좋은 삶을 살면 좋은 죽음을 가지기도 하지만, 좋은 삶을 살지 못하면 좋은 죽음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살의 태도로서 죽음’은 그의 삶이 잘 못살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탄생과 죽음이라 할 수 있다. 탄생은 삶의 시작이요 죽음은 삶의 끝이기 때문이다. 탄생과 죽음 가운데서 무엇이 더 의미가 깊은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요 결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의미를 가진 죽음을 자신의 의식에서 배제하고 죽음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될 때 인간은 살아 있지만 모든 일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자살의 태도로 죽음’을 보여 주고 있다. 지난해 자살로 인한 사망이 사상 최대에 달했다. 10년 새 두 배에 가까운 증가세다. 술로 인한 사망한 경우가 하루 평균13명이 된다는 것이고 2007년 통계 층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한 해 동안 1만2.174명이 자살을 한다. 연령별로 보면 20대와 30대에서 자살 사망원인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연예인의 자살에서 그 동안 무관심하게 삶을 살던 사람들이 죽음의 사건을 보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놀람을 갖는다. 

몇 년 전 영화배우의 이은주 양의 자살사건이나 이번의 탤런트 안재환 씨의 자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자살태도를 보고 세상은 놀라워한다. 니콜라스 베르쟈예프는 그의 ‘현대에서의 인간의 운명’이란 책에서 현대의 중심적인 테마는 역사 전체에 대한 문제를 인간의 운명에 대한 문제로 전제하고 오늘의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은 ‘휴머니즘의 위기가 아니라 문제는 바로 인간자신의 문제이다’라고 말한 점에 유의한다. 오늘날 가장 긴박한 문제는 인간자신의 문제에서 이 인간이 매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절박한 인간의 위기는 몇 사람의 정치의 행위를 통하여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길과 진리와 생명의 존중을 터득하지 못한 데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근대화와 산업화와의 관련 없이는 이해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근대 사상은 자연주의나 이성주의에 소홀히 하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악, 파괴성의 깊이를 과소(過小)평가한 대신에 인간의 능력을 과대(過大)평가하는 착각에서 나오는 소치(召致)임을 알게 한다. 

여기에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도 같은 견해를 갖는다. ‘종교개혁자들이 위대한 것은 인간의 죄와 깊이를 이해하는데 있으며 반면에 단점은 인간의 창조성과 책임감을 착실히 보지 못한데 있다’고 지적하며 ‘기독교의 인간관은 인간의 창조의 가능성과 파괴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는 역설적 긴장 관계에서 창조자의 의지를 빠뜨린데 있다’고 지적함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는 생명문화의 창달에 기여해야 함을 알게 한다. 지금까지 물적 성장과 발전만을 내세우고 생명과 환경을 경시해 온 문화의 방향을 바꾸는데 반성하게 한다. 이점은 ‘자살의 태도로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생명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인간은 누구인가? 묻기에 앞서 인간과 인간의 생명이 무엇인가? 에 대한 물음에서 인간은 과연 누구의 소유인가? 하는 문제로 살아있는 인간 자체에는 자신과 타인 등 어느 누구의 소유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성매매가 금지되는 것이나 자살이나 타살이 금지되는 이유도 이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 일부는 법으로 어느 정도 개인의 소유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세상이 되었다. 장기를 기증함에 있어 개인은 자기 신체의 주인이 되고 그리고 가족이 사망했을 경우 제한적이지만 유가족은 사망한 가족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음으로 신체의 일부를 타인에게 기증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죽음 이해는 전통적인 기독교교리에서는 어떤 특별한 상황에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특별한 상황은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경우들이다. 예컨대 군복무 중에 자기의 소임을 수행하는 일이나 부당한 공격을 당하는 친구를 보호하는 일이나 전염병환자들을 돌보는 일이나 박해 시에 자기의 신앙을 증거 하는 일 등 이다. 

이것은 사랑, 정의, 자비 또는 동정의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결과인 죽음을 수용할 준비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렀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할 것은 자살의 태도에서 그 어떤 이기적인 동기로 자신의 생명을 직접 계회하여 탈취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음을 밝힌다. 인간은 그 자신이 생명의 주(主)가 아니라 다만 생명의 관리자일 뿐이요 그 생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봉사에 사용하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위임된 것임을 알고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 신앙은 직접적이든 고의적이든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은 창조주요 구속자인 하나님께 대한 죄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거부요 그의 주권에 대한 부정임을 믿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자신에 대한 특유한 사랑에 대한 범죄, 제6계명의 위반, 회개를 방해하는 절망의 행위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한 구성원의 도리에 어긋나고 그들의 필요에 도움을 줄 기회를 거부하는 범죄임도 아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을 믿는 것이다. 

‘자살의 태도로서 죽음’을 맞기 보다는 ‘삶의 태도로서 생명’을 얻는 생명의 존중을 일깨워야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산업사회의 문제점은 인간성 상실, 생명의 경시, 자연의 파괴, 물신주의 등으로 문제를 안고 사는 사실의 현실이 되었음을 자각한다. 오늘의 세상은 탐욕과 거짓이 가득한 사회이다. 혼돈과 위선 속에 진리의 삶을 볼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인간의 궁극적인 의미와 진리의 빛을 찾아볼 수없는 어두운 사회이다. 사람들은 부와 권력과 쾌락을 향해 정신없이 치닫고 있으며 그동안 잘못 되어 온 나쁜 원인의 결과로서 그 태도는 사회전반이 붕괴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말세의 현상은 교회가 사회를 위한 능력이 상실한지 오래이며 경제자본주의라는 브레이크 없는 탐욕의 열차를 타고 어둠과 절망의 나락으로 질주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여기에 진리의 길은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의 답으로서 세상과 인간을 위한 죄와 죽음의 구원은 여기에 있다. 세계의 위기는 핵에너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더 위험한 위기는 인간 자신이 내부적으로 붕괴되어가는 ‘자살의 태도로서 죽음’인 것이다. 자살은 또 하나의 죄를 얻음이다. 구원은 여기에! (배성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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