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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귀히 쓰임 받는 그릇 (딤후 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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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히 쓰임 받는 그릇 (딤후 2:20~21)


지난 주 뵙지 못한 교우님들도 계시는 데, 한가위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찬송가 305장처럼, 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는, 예수만 섬기는 가정이 되는 복 다 받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며칠 전, 오랫만에 최근 음악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여성 지휘자 성시연 씨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주회를 다녀왔습니다(서울시향은 정명훈씨가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감동적인 연주회였습니다.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등 3곡을 연주했는데, 지휘자가 작곡자의 곡을 얼마나 많이 공부했을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서울시향이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서, 각 분야의 전문연주자들이 각자 자기 소리를 내면서 전체단원들이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혼신의 연주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지휘자 성시연 씨는 보스턴 심포니 부지휘자로 있는데,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한 소감을 말하면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마치 (좋은 승용차)고급 세단을 모는 느낌과 같았다”고 합니다.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부드럽게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승용차처럼 보스턴 심포니가 지휘자와 호흡을 맞춰주었다”는 것입니다. 지휘자가 맛보는 기쁨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도 마치, 지휘자의 지휘에 훌륭하게 응답하는 오케스트라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히 쓰임 받는 일꾼들을 찾으시지 않겠습니까? 


[교회 공동체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교회를 “큰 집”으로 비유합니다(딤전 3, 15; 하나님의 집).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다.” — 교회 공동체 안에는 마치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진 다양한 그릇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21세기 교회를 비유하면,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역을 하는 직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역자는 금으로 만든 그릇과 같은 분도 계시고, 은으로 만든 그릇과 같은 분도 계시고, 나무로, 혹은 질그릇으로 만든 그릇과 같은 분도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이 비유말씀을 유의해서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그릇이 무슨 재질로 만들어진 그릇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에서 사도 바울이 정말 말씀하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관심은, 그릇의 재질(材質)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릇의 재질에 관하여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비유입니다만,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몸에는, 서로 다른 수많은 지체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롬 12, 3-6).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내가 몸의 무슨 지체인가가 아닙니다. 내가 무슨 지체이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데 내 지체가 어떻게 쓰임 받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몸의 무슨 지체이냐? 그것이 내 존재의 귀하고 천함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무슨 재질로 만들어진 그릇이냐가 내 존재의 귀하고 천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 그대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릇의 재질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보다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다양한 모든 그릇의 존재가치는 다음 두 가지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1) 깨끗함입니다. 그래서 귀히 쓰임 받습니다. (2) 더러움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쓰시고자 해도 어디에도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천한 그릇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다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이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이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 20-21). 아멘.

그러면, 어떤 사람이 깨끗한 그릇입니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쓰신 인물들이 어떤 인물인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언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세속화世俗化 되지 않은 사람을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귀히 쓰임 받는 깨끗한 그릇이 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은 세속적인 꿈을 꾸지 않는 사람입니다]

독일의 T&$1;bingen 대학의 Obermann 교수님이, 한국교회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 직전의 로마천주교회와 같다”고 조심스럽게 충고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오늘의 교회가 버리지 못한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물량주의, 세속적인 엘리트주의를 지적하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교회가 겉으로는 순수한 영성을 요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내면적인 관심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관심이 여전히 세속적인 성공을 꿈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다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큰 관심이 부족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내면에 뿌리내린 관심은, 세속적인 성공과 형통입니다(예수 믿으면 세상에서도 잘 된다는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 시대 가운데서, 교회가 정말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궁극적인 관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세속적인 성공을 꿈꾸고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회자도, 교회 일꾼 된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주간(클라이막스가 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 때, 무리들 예수님을 크게 환호했습니다. 무리들 중에는, 겉옷을 벗어 길에 펴기도 했습니다. 종려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 1-11).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왜,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하면서 따랐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환호하던 무리들의 꿈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의 꿈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었던가?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유대인들은 메시아대망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기름부음 받은 자를 기다림). 유대인들에게 이 메시아대망사상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망하면서부터 생겨난 사상입니다. 유다의 역사 중, 통일왕국을 이루면서 가장 부국강병한 시대가 다윗 왕 때였습니다. 그 이 아들 솔로몬 왕 이후,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되고, 북 이스라엘이 먼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망합니다. 뒤를 이어 남 유다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패망합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패망한 이후 유대인들은, 무려 600년 동안 제대로 자기 나라를 세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유다는 주전 63년부터는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면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까지도 여전히 로마의 속국이 되어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어떤 분이어야 했겠습니까?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로마제국보다도 더 강력한 이스라엘을 만들어줄 분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바라던 메시아대망사상입니다. 그 마음들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예수님을 환호하였던 무리들의 마음입니다. 600년 동안, 나라 없는 서러움을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강력한 통치자, 예수님이 그 역할을 해 주실 것이라 기대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꿈에 부응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꿈은 이루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세속적인 성공을 위함은 아닌지요? 혹은 좋게 말해서, 5000명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목적 때문은 아닌지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5,000명 먹일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큰 관심 없으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주님의 손에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5,000명을 먹이는 일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5,000명을 먹이는 위대한 사람이 못 된다고 해서 좌절할 것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헛된 꿈을 꾸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세상적인 성공기준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아닙니다.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입니다. 우리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일에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은, 주연의식이 없는 섬기는 자입니다]

세상 나라는, 모두 주연의 꿈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다 주연이 되고 싶어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Nietzsche)는 초인(슈퍼맨)을 숭배해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높고, 능력 있고, 힘 있는 자가 힘없는 보통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교회에서조차도 “여러분, 주연이 되십시오. 대표선수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위대한 사람 되십시오”하면 좋아합니다. 실제로 ‘주연이 되라’고 축복해주는 모임이나 교회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조연이 되십시오 팔로워가 되십시오 하면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합니다. 

새들백교회 릭워렌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부적절한 두 부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주인공이 되려는 부류이고 또 하나는 방관자부류이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려고 해도 안 되고, 모두가 방관자가 되려고 해도 안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서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서로 자기를 돌아볼 뿐만 아니라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아, 서로의 기쁨을 충만케 해야 합니다.

사람은 높아지기는 쉬워도 낮아지기는 참 어렵습니다. 낮아지는 데는 오랜 시간과 자기 버림과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높아지는 데에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걸음걸이도 달라지고,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말투도 달라지고, 눈빛도 달라집니다. 귀히 쓰임 받지 못할 그릇이지요. 높아진 사람은, 혹 자기의 뜻은 이룰 수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습니다. (1) 서기관들은, 긴 옷(제사장, 레위인이 입었던 길고 흰 술 달린 가운)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남과 구별되기를 좋아했던 것이지요. (2) 사람들로부터, 공식적인 칭호로 랍비(선생), 주인, 아버지(마 23,7;눅 20,46)라는 이름 듣기를 좋아했고, 사람이 많은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3) 회당에서는 가장 중요한 자리—성경 사본이 놓여 있고, 전 회중을 바라볼 수 있는 상(헤드테이블)에 앉기를 좋아했고, (4) 잔치 집에서는 주인 다음 좌석에 앉아서 대접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모든 일에 서열의 규칙을 만들어서, 서열화 된 자기자리를 찾았습니다. 이런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합당하지 않는 깨끗지 못한 그릇이라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앉아서 음식 먹는 자가 크냐? 음식 시중드는 자가 크냐” 물으시고는, “당연히 세상에서는 앉아서 먹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음식 시중드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이 말씀에 겸허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이 우리 교우들을 낮은 자리에서, 잘 섬기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우리 목회자들이 더 겸손하게 교우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역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공동체가, 세속적인 지배가치나 주연의식이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그 누구라도 남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군림하고, 높임 받고자 하는 맘이 혹이라도 있다면, 그 마음을 다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함께 일하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교회에 귀히 쓰임 받을 일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자를 세워주옵소서. 섬김으로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일꾼으로 세워주옵소서. 그래서 우리교회가 이 시대와 역사 속에서, 복의 근원되는 교회,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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