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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그 다음(6) :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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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 (롬 12:1~2)
  

오늘은 본문 2절의 마지막 부분에 집중을 하려고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분별하라’는 헬라어 ‘dokimazw’(도키마조) 라는 단어의 의미는 제일 두드러진 뜻이 ‘입증하다.’,‘진짜라고 증명하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어적인 의미로 적용해 보십시다.

적어도 우리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는지를 진짜로 증명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들이 ‘나는 예수쟁이야!’라고 외치며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입증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감사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삶을 바울은 추상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본문을 통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은 그 다음에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구체적인 뜻은 무엇입니까?  

① 목적이 선하여야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그렇습니다.
이 선언을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도전을 줍니다.
어떤 도전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내가 정말로 볼 것이라고 하나도 없는 별 볼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혜의 주인공으로 부름 받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사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삶의 전 행위가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행위가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행하는 행위가 악하다면 그것은 단적인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라는 말입니다.
‘선하시고’의 번역인 헬라어 ‘agaqo"’(아가도스) 는 의미 자체가 선한 것, 좋은 것, 유용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특별한 의미로 사용될 때는 이 단어는 ‘정직한 것’이라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라는 선포를 바로 이 정직성에 두고 싶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산다는 증명은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사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산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고 정직하지 않게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됩니다. 

다윗을 아시지요?
사무엘하 11장을 보시면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의 밧세바를 취하는 범죄의 기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하룻밤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다른 남자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그녀가 임신을 하자 이제는 완전범죄를 위하여 전쟁에서 자기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녀의 남편을 불러 들여 아내와 동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충성스러운 우리야는 아내와의 동침을 거부하여 다윗의 뜻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다급해진 다윗이 이제는 우리야는 적진 깊이 보내어 전사하게 하였습니다.
이윽고 남편이 죽자 밧세바를 자기의 아내로 삼아 궁에 거하게 하였고 아들을 낳게 합니다.
이 모습을 보시던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11:27절은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다윗의 소위를 악하게 보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적용한다면 다윗이 정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저는 서울신학대학교를 입학 때부터 들어간 사람이 아닙니다.
일반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중간에 은혜를 받고 편입학을 하여 신학을 한 사람입니다.
서울신학대학교의 편입학 원서를 사기 위해 서울신학대학교의 캠퍼스를 처음으로 들어갈 때 그리고 원서를 작성하여 다시 서울신학대학교 캠퍼스를 들어갈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주 고요한 눈이 내린 캠퍼스를 오르내릴 때 마치 변화산상에 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의 고백이 절로 나오는 감탄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선지동산에서 첫 학기 느꼈던 실망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주의 종이 되겠다고 들어 온 신학생들이 중간고사와 학기말 고사에 이전에 다니던 일반대학교의 학생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커닝 페이퍼가 오고가고 책상의 바닥에 새까만 글씨로 커닝의 내용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좌절감은 정말로 허무할 정도였습니다.

시험을 감독하는 당시에 교수님이 시험을 보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여기에 있는 신학생들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물론 신학교라는 공동체는 과정 공동체이기에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종들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으로 위로를 받지만 당시에 내일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들어간 저를 한 동안 참 많이 헤매게 한 요소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여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선하십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나의 목적이 정직하여야 한다는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달려가는 목적이 선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타인에게, 교회공동체에서, 나의 삶의 공동체에 대하여 정직한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정직한 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②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어야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일 수 있는 두 번째의 요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어야 함을 못 박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저는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이렇게 정의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요즈음에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아주 좋은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란 하나님과 코드가 맞는 것이다.’
‘기뻐하시고’라고 번역된 헬라어 ‘euaresto"’(유아레스토스)는 문자적인 의미가 ‘완전히 일치한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뜻이 일치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코드가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코드가 맞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결정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코드가 맞든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한 성경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솔로몬이 주인공입니다.
일천번제를 다 드린 솔로몬에게 기브온의 산당에서 꿈으로 하나님이 현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소원을 말하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이 기회에 솔로몬이 구한 것은 우리게 잘 아는 지혜였습니다.

아버지가 일군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이렇게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왕상 3:10절입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솔로몬의 간구가 주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영어성경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RSV 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It pleased the Lord that Solomon had asked this.”
직역하면 ‘솔로몬이 말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이 되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들이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여 그 분을 기쁘게 할 때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③ 과정 자체가 온전해야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하신’이라고 말입니다.
‘teleio"’(텔레이오스)라는 단어는 본문에서는 ‘온전하신’ 이란 뜻으로 번역되었지만 더 근접한 원어적인 의미는 ‘실수가 없는 상태, 혹은 ’완벽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 정말로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실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뜻은 수없는 실수가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말할 때 온전하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근래 읽은 책 중에서 가슴에 남아 있는 감동의 책이 있다면 김영봉목사의 ‘숨어계신 하나님’이라는 책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던져 준 기독교의 답답한 화두를 정말로 짜임새 있게 해석한 양질의 책입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한 대목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 땅에 고난을 주느냐? 의 문제에 대하여 중요한 대답을 하나 주고 있습니다.
참 도전이 된 부분입니다.

윌리암 슬로운 코핀(William sloan Coffin) 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우리들이 고난을 당할 때의 일반적인 질문과 항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위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What are you doing up there, God?)

그런데 하나님은 반대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도대체 그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What are you doing down there, man?)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 악한 행동, 고난, 위기 등이 발생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온전하신 뜻을 갖고 있는데 도리어 자유의지를 통하여 악한 뜻을 남용하고 있는 너희 인간들아 제발 그렇게 살지 말라는 말로 해석을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온전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기주의, 무신론적인 교만함, 철저한 인본주의 등이 판을 치며 온전하지 못한 인간의 뜻이 만연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정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실수가 없는 온전함이 있어야 합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죄악을 갖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나의 삶의 과정이 온전하지 않다면 나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일 수 있음을 경책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로마서 12:1-2절을 6주에 걸쳐 묵상했습니다.
말씀을 맺으며 6주 동안의 구원 그 다음의 삶을 종합해보니 한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구원 그 다음의 삶을 무대는 교회 안의 울타리가 아니라 교회 밖의 울타리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을 목적하는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교회 안의 자리에 안주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사람 아닙니다.
교회 밖의 울타리에서 6주 동안의 내용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는 교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 밖의 울타리에서 주님의 형상을 닮아 그 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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