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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시 1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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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본 문: 시편 126:1-6

성경의 주무대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외적으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은 수난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 수난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범죄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나라가 망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 동안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긍휼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킨 후 칙령을 내려 각국의 포로들을 자기 나라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주전 538년이었습니다. 이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 시편 126편입니다. 

본문 1절~3절에 기록하기를“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꿈에도 그리던 조국과 자유를 찾았습니다. 이제 기뻐하며 고국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미래의 꿈을 노래한 것이 본문 5절-6절의“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기쁨의 곡식 단을 거둬들이는 행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 과정은 어떤 것입니까?


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본문 5절에“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자유인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 땅은 70년 동안이나 버려져 있었던 땅입니다. 기름졌던 땅은 잡초와 수목으로 우거졌고, 성벽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에는 들짐승들이 우글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국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은 한없 무거웠습니다. 이제 황무한 이 땅을 개간하려면 눈물겨운 고통을 감내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쁨의 미래를 바라보며 다짐하기를“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포로로 붙잡혀간 70년의 세월은 민족의 혼마저 희미해질 긴 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었기에 그들의 힘으로는 포로에서 해방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크신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황폐한 땅을 개간하는 것은 그들이 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사람이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행운과 행복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행복은 말하지만 행운을 말하지 않습니다. 행운이란, 아무 수고도 없이 우연히 거저 얻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복권이 당첨되어 갑자기 몇 십억을 얻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요행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세기 3:19)하셨습니다. 땀 흘려 얻은 대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삶의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땀과 눈물을 흘린 뒤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과 행복이란, 내 노력으로 찾아가는 것이며,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저절로 축복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4:15말씀에“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하셨습니다. 진보된 모습, 발전된 모습, 좋아진 모습으로 영광을 누리기를 바란다면 전심전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에도 전심을 요구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함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나 대가는 전무(全無)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반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우리들이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절대적입니다.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야만 기능합니다. 요행을 바라는 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닙니다. 

윌리암 피터라는 사람이 전하는, 요행을 바라는 사람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길을 가다가 돈 5달러를 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 후부터 죽을 때까지 길에 다닐 때에 항상 목을 구푸리고 땅을 내려다보면서 다녔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단추 29,516개, 바늘 54,172개, 돈 12센트를 더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체격은 꾸부러지게 되었고, 그의 성격은 인색하여 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성경에 말씀하시기를“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히브리서 5:7~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심한 통곡과 눈물의 과정을 통하여 소망하는 것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까?


1. 통회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5:2의 말씀에“애통하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크게 힘입은 사람들은 깊은 통한의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날 자신의 부끄러웠던 죄악 된 삶을 뉘우치며 깊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바르게 살지 못한 지난날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고 죄송하여 참회하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고귀한 시간들을 헛되게 보낸 것이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나 같은 죄인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입니다. 

통회의 눈물을 흘린 대표적인 사람은 구약성경의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참회하며 뉘우치는 모습을 기록하기를“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편 6:6)라고 했습니다. 그가 뉘우치며 흘린 눈물이 침상을 띄웠고 요를 적시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정결케 하시고 넘치는 복을 주셔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더 없이 귀한 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신약성경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를 들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밤, 재판 받으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정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새벽닭 울음소리에“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태복음 26:34) 하신 말씀과“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35)라고 말한 자신의 약속에 양심이 찔려 심한 통곡을 했습니다(마태복음 26:75). 

이러한 베드로의 통회의 눈물을 보신 예수님은 그의 죄를 정결케 하시고 대사도로서의 사명을 다하도록 하셨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일생동안 새벽닭 울음소리만 들으면 잠에서 깨어나 그때 일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흐르는 빗물이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듯, 뉘우치는 마음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악을 씻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라고 하셨으며“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편 34:18)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시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색으로 집안을 망친 한 남자가 극적으로 회개하고 빛나는 생애를 보낸 경우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문호 빅토르 위고가 그 사람입니다. 어느 날 외동딸 레오포르딘의 시체가 세느강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옆에는 아버지의 심한 외도와 과음, 거기에 짓눌려 사는 비참한 엄마 때문에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잃었다는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위고는“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외치며 반성하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공무원이 된 그는 헌신적으로 일해 프랑스 교육부 장관까지 지냈고, 프랑스 국기인 “3색기”의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의 문학도 더욱 깊어 갔습니다. 한사람의 회개와 경건한 신앙이 자신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역사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시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는 복된 시간입니다.


2. 간구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답답하고 괴로운 나머지 깊은 한숨과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눈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 하소연하는 눈물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날 우리들이 눈물을 흘려야할 때와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입니다. 본문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의 씨를 뿌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의 열매로 기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사무엘상 1장에는 한나라는 여인이 자식을 낳지 못해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효험은 없었습니다.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향해 마음씨 착한 남편은 말하기를“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사무엘상 1:8) 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위로가 한나의 눈물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괴로워하던 한나는 마침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애타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 하겠나이다”(사무엘상 1:10~11) 라고 간구했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지켜본 제사장은 그가 술에 취해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말하기를“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사무엘상 1:14)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한을 풀어 태를 열어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가 바로 이스라엘 나라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입니다. 

또한 구약성경 열왕기하 20장에는 히스기야 왕의 투병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건강했던 왕의 몸에 무서운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소생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향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열왕기하 20:5-6에 말씀하시기를“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15년을 더하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히스기야 왕의 건강은 회복되어 15년의 생명을 연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계시는 동안 통곡의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하여 히브리서 5:7에 말씀하시기를“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힘이 있습니다. 빗물이 모이면 큰 힘을 지닌 강물이 되어 농사를 짓게 합니다. 공장의 기계를 가동시킵니다. 수도로 통해 각 가정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늘로서 내리는 빗물이 삶의 원천이 되는 것같이, 성도가 하나님을 향해 간구하면서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홀어머니 품에서 자라난 한 공군 조종사가 출전을 했습니다. 전쟁터로 나가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당부하기를“전쟁 중에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라.”고 했습니다. 전장에 나간 이 조종사의 전투기가 격전 중에 적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투기는 기능을 잃고 비틀거립니다. 캄캄한 밤 레이더까지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긴박한 순간이었습니다.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생명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때 조종사의 뇌리에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스쳐갔습니다. “전쟁 중에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라.” 조종사는 짧은 순간이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멋대로 곤두박질을 치던 전투기는 굉음을 내며 땅에 떨어졌습니다. 잠시 후 이 조종사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끝인 줄만 알았던 이 조종사는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 무사했습니다. 캄캄한 밤 조종이 불가능한 이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살아난 것도 기적이지만 날이 밝자 이 조종사는 더 큰 기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위는 망망대해인데 비행기는 작은 섬 잔디위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구조된 조종사는 이 사실을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편지로 알려 드렸습니다. 편지를 받은 어머니는 아들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날 밤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염려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 밤을 새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던 그날 밤 아들이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는 두 모자(母子)를 그 큰 환난에서 지켜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기도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방울을 세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56:8에 말씀하시기를“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했습니다. 


3. 방탕한 세상을 향해 탄식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타락해 가는 이 세대를 향해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방탕한 세대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136에는“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며 범죄를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한없는 탄식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경은 그의 눈물에 대하여 예레미야애가 1:2에 말씀하시기를“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라고 했으며, 예레미야애가 2:11에는“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심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에 대하여 누가복음 19:41~44에 기록하기를“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견하신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루살렘은 주 후 70년 로마에 의해 처절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가실 때 많은 여인들이 슬피 울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알지 못하는 이 불쌍한 무리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28)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사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죄악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검불을 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악한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썩어져 가는 세상을 향해 눈물을 흘린 다윗의 심정으로,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二. 씨를 뿌려야 합니다.

본문 5절에“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고 하셨습니다. 힘이 들고 고생이 되어도 묵은 땅을 개간한 후 씨앗을 심어야 기쁨의 단을 거두는 날이 옵니다. 그래야만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농부가 가을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것은 봄과 여름에 땀을 흘리며 씨앗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도 씨앗을 심고 거두는 원리에 비유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갈라디아 6:7~9의 말씀에“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묵은 땅을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되 좋은 씨앗을 심어야 기쁨의 단을 거둘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옥토 밭이 된 우리들의 마음 밭에 어떤 씨앗을 심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권면하시기를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씨앗입니다. 행복의 씨앗입니다. 승리의 씨앗입니다. 영광의 씨앗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을 위해 심는다는 것은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 즉 전도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문명이 점점 더 발달해가고 있습니다. 경제는 날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넉넉한 세상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입니다. 모두들 어렵다고는 하지만 2~30년 전에 비하면 꿈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영영토록 이 세상에 머물러 살고 싶은 세상입니다. 이 좋은 세상에 하루라도 더 머물러 살며 즐기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관리에 안간 힘을 다 쓰고 있습니다. 

과연 이 세상이 그토록 살기 좋은 곳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한 자락을 제치고 살펴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사악해져 가는 세상입니다. 요즘2~30대의 젊은이들이 하루 평균 30명 이상씩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OECD국가 가운데 자살 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성을 매매하는 퇴폐문화가 세계 1위라고 합니다. 가정주부가 더 좋은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몸을 파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죄악은 하나님의 진노의 검불을 쌓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17:26~30에 말씀하시기를“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후서 3:10~13에는 세상종말에 대하여 예언하시기를“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타락해 가는 이 세대를 향해 애타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애타는 마음으로 간절히 눈물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엎드려 기도만 하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4:23에 말씀하시기를“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타락한 노아 시대에 구원의 처소는 노아가 만든 방주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구원의 방주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인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시대에 빛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캄캄한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게 안전한 항구의 위치를 알려주는 등대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또한 진리의 파수꾼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탕한 세대를 가슴에 안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며 준미 앞으로 나아오도록 권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디모데후서 4:1~2에서 명령하시기를“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고 하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충성된 신하와 백성은 왕의 명령에 절대 순종합니다. 복음 증거는 십자가 군병의 총 사령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엄중한 명령입니다. 군인이 만일 사령관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모든 몸의 지체는 뇌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데 뇌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병들었을 때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현재 건강상태는 어떻습니까? 스스로 내 심령상태를 점검해봐야 하겠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은 건강한 심령을 소유한 증거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증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아십니까?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을 들고 이곳저곳 다니는 전도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충성은 복음을 전하므로 죽어가는 영혼을 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52:7에 말씀하시기를“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하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아름다운 발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발을 아름답게 보십니까? 복음 들고 이곳저곳, 이집 저집, 이사람 저 사람에게로 다니는 성도의 발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31~33에 말씀하시기를“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겨 구원 얻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영혼 구원은 하나님의 애타는 소원입니다. 이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는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는 성령님의 소원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님이 오셔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의 존재하는 목적은 복음을 전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삼위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자 힘쓰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31~33에 말씀하시기를“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나라를 잃고 70년 동안 포로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격의 기쁨 속에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름진 땅은 황폐해졌고 성은 무너져 짐승의 굴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척의 의지에 불탔습니다.“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5~6)는 소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도 영혼구원을 위한 거룩한 소망이 불타오르기를 바랍니다. 황폐해진 불신 영혼들을 위해 거룩한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썩어져 가는 세상을 향해 눈물을 흘린 다윗의 심정으로,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우리 주님의 심정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밭에 생명의 씨앗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이 일이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복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5~6) 하셨습니다. 이 기쁨의 단이란, 불신 이웃에게는 구원받은 생명의 단입니다. 씨앗을 뿌린 내게는 땀 흘려 일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풍성한 축복의 단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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