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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길 (고전 1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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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길 (고전 15:9~11)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모이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군대 이야기입니다. 또 우리 여성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무엇이겠습니까? 군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남자들이 만나면 다시 군대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그보다 더 강렬한 자극적인 인생 체험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체로 군대를 갖다온 사람들이 대부분이 오래 동안 기억되는 군 생활의 이미지들은 "인원 파악, 선착순, 불침번, 줄 빳다, 도하훈련, 유격훈련"등의 경험들일 것입니다. 

이 성찬씨가 지은 "너희가 군대를 아느냐?"는 유머집에 보면 이런 훈련의 유래가 이렇게 설명됩니다. "뺀질거리는 서울 군바리들 때문에 인원파악이 생겼고, 동작 느린 충청도 군바리들 때문에 선착순이 생겼고, 탈영하는 호남 군바리들 때문에 불침번이 생겼고, 말 안 듣는 경상도 군바리들 때문에 줄 빳다가 생겼고, 물에 사는 제주도 군바리들 때문에 도하훈련이 생겼고, 비탈진 곳에 사는 강원도 군바리들 때문에 유격훈련이 생겼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교회에 모이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은혜'입니다. 이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합니다. 주일날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아마 은혜일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참 많이 은혜 받았습니다." "아, 저 집사님은 보기만 해도 은혜스러워!" "우리 교회는 은혜가 넘쳐!" "나는 정말 큰 은혜 받았어!" 대단한 일을 했을 때 누군가 칭찬을 하면 "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제가 했나요!" 이렇듯 '은혜'라는 단어를 수없이 쓰는데, 은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헨'이라는 단어는 '구부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원래 은혜라고 합니다. 신학적인 의미로 부연한다면,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발적인 호의, 영어로는 'Grace'입니다. 이 말을 우리의 삶과 연관시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신 신학자가 있습니다. 작고하신 도날드 반 하우스입니다. "위를 향한 사랑, 그것은 예배이다. 바깥을 향한 사랑, 그것은 자비이다. 아래로 향한 사랑,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렇다면 은혜란, 아랫사람은 받을 자격이 전혀 없지만, 윗사람이 그에게 베푸는 호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는 선물입니다. 주는 자가 아무 조건도 없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은혜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1.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무엇보다도 겸손합니다. 은혜를 지켜가려면 겸손해야 됩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은혜의 극치는 겸손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겸손합니까? 그만큼 은혜에 살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모릅니다. 은혜 받았다가도 쏟아버립니다. 얼마만큼, 얼마만큼 겸손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겸손은 은혜의 극치입니다. 클라이맥스입니다. 은혜는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겸손해집니다. 점점 더 자신은 낮아집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나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얼마나 겸손한 고백입니까? 은혜를 받고 자기를 돌아보니까 도대체 자기가 누군데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신 것만도 감사한데 자기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불러 주신 것에 대해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을 했습니다. 이 핍박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위협과 살기의 마음이 등등했다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미움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되겠다 라는 미움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런 그를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하며 사울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 주십니다. 상상이 안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이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죄 지은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 살인한 가인을 부르셨던 하나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살기 등등해서 찾아가는 사울을 부르셨던 주님은 지금도 나를 찾아 헤매고 다니십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을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탕자처럼 멀리 떠나 그분을 잊고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에 짝하여 방탕할 때도 그분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쾌락에 묻혀 살 때도 그분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두려워 숨어있을 때에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 나서셨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가 숨어있는 장소를 몰라서 부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또한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이고 전혀 회개할 마음이 없을 그 때에도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를 역시 부르셨습니다. "가인아,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오늘 우리는 태신자를 세우지만, 태신자라는 말속에 들어있는 의미는 일정 기간의 잉태기간입니다. 태신자의 임신 기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품으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죄인 중에 죄인으로 행동할 때도 주님은 그를 참고 계셨습니다. 바울의 부족함을 참아주셨습니다. 이런 기간에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태신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를 품고 계시는 그 기간을 인내하셨습니다. 딤전 1:16절에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신의 못난 모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믿어주시고 자기를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바울이 가진 자세가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세요.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자신을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마치 하루종일 놀다가 오후 5시에 일당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노무자의 심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감지덕지 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합니다. 그가 고후 12장에서 실토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뭐, 이 정도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쳐들고 자기 공로를 이야기할 만도 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수고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작년에 칸느 영화제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은 밀양이란 영화를 보신 분이 게실 것입니다.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자식과 함께 와서 살다가 아들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싸늘한 시신으로 엄마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 때 신애라는 이 여인은 그 상처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을 받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중에 전도를 받고 비로서 그는 신앙 생활에 전념하게 됩니다.

신애는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위로를 받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만나 용서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리까지 서게 됩니다. 드디어 신애가 큰마음을 먹고 유괴범을 용서해주러 교도소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유괴범을 만납니다. 유괴범은 얼굴 색깔이 참 좋았습니다. 수염도 단정하게 깎았습니다. 내가 봐도 윤기가 잘잘 흘렀습니다. 그래서 신애가 좀 의아하게 여기면서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 당신을 용서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유괴범은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러십니까? 사실은 나도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신애 앞에서 화통하게 웃습니다. 이에 덧붙여 유괴범은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할 줄 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평안을 진작 누렸어야 하는데, 이런 기쁨이 있다는 것을 과거에 몰랐다는게 억울하다’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신애의 마음이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세상에 이런 놈이 다 있나! 내 마음에는 아직도 고통이 남아있고, 처절한 피눈물이 남아 있는데! 누가 용서해주었는가? 내가 용서를 안 해주었는데 네가 먼저 용서 받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 남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이렇게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나와서야 되겠느냐?’ 거기서부터 신애는 미치기 시작하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꼭 이 유괴범 같다는 것을 시사하지 않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살아오면서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는 예수님이 자기를 다 용서해줬다고 합니다. 생글생글 웃고 다니며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나니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해질 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유괴범을 보십시오. 아이를 죽일 때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평안히 잠을 이룹니다. 살찐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이 유괴범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잘났느냐? 예수 믿는다는 게 참 편리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면 다 용서받았다고 하고 싱글싱글 웃고 다니고 행복해 보이는데, 그게 과연 기독교냐?” 우리가 왜 이런 소리를 듣습니까? 죄악 때문에 아파하는 깊은 통곡을 생략해버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적어도 유괴범이라면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 자기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범한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느껴야 하고 그 때문에 고통 당한 한 어머니의 갈가리 찢긴 가슴을 상상하면서 자기도 괴로워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 감히 수염을 깎고 나옵니까? 수염을 다 뽑고 나오면 몰라도 말입니다. 최소한 괴로움에 잠도 못 잔 듯이 덥수룩한 모습으로 면회 장소에 나왔어야 합니다. 어떻게 세 끼 밥을 다 먹습니까? 제대로 먹지 못해서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고개를 못 들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이 어머니가 당한 아픔의 천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도 안 되겠지만 나도 지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이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하면서 통곡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어머니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해야 정상이 아닙니까? 그러면 유괴범이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 “내가 정말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괴로워해야 정상적인 결론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뻔뻔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어쩌면 그렇게 그 유괴범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최선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 1:14-15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기가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진 빚은 하나님께 진 은혜의 빚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은혜의 빚을 갚기 위해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한 생명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태신자를 세우는 시간을 갖습니다. 여러분에게 자주 말씀드리지만, 삼고초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사로 유비가 융중에 있는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는 정성을 보였다는데 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유비는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에도 두 번씩이나 허탕을 치며 성의를 다해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자 사흘이나 목욕재계를 한 후 다시 제갈량을 찾아갔습니다.

어떤 면에서 삼고초려는 태신자를 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유비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제갈량을 찾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유비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 제갈량의 탁월한 재능이었다면 우리의 발걸음을 끄는 것은 하나 님을 모른 채 지옥으로 걸어가는 불쌍한 영혼입니다. 사람을 얻기 위한 진정한 삼고초려의 진수는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당당한 시민이요, 학식으로는 가말리엘 문하의 최고의 엘리트 출신이었지만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자기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수치를 당하고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면서도 오로지 한 생명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고 기어코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태신자를 세우기전에 내 영혼의 삼고초려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생명을 얻기 위해서 어떤 수고를 하고 있는지요? 사람의 재능을 얻기 위해서라도 며칠씩이나 자신을 씻고 몸을 단정히 하였다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기 위해, 또 내가 찾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 어떻게 마음으로 준비해야 할지는 너무도 분명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만큼 소중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소중함을 알면서도 여러분이 여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죄송하지만,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요즘 최근 66세 최고령의 현역 비서가 '성공하는 CEO 뒤엔 명품 비서가 있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단순히 비서가 아니라 최고 경영자의 최고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자취가 담겨있는 책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곳까지, 아니 66세가 된 지금까지 탁월한 비서로서의 직책을 멋지게 감당하고 있는지 소소한 삶의 태도에서 거대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달려온 삶의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명문 여대 약대 출신입니다. 남편 또한 한국 최고의 명문대 철학과 교수였습니다.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러울 것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대우받아야 할 정도의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가장 말단처럼 여겨지는 비서 직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커피 타는 일부터 상관의 구두 닦는 등의 하찮은 일들을 천직처럼 여기며 달려올 수 있었을까? 그가 다니는 대성 그룹의 회장은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한 마디가 핵심을 찔렀습니다. "그녀가 경영인의 파트너로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일화…, 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미덕은 '하찮은 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한다." '하찮은 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

'하찮은 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그녀는 갖고 있었습니다. 학력과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방문객에게 한 잔의 차를 대접하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겼다고 합니다. 여느 비서조차 불편해하는 일까지 그녀는 완벽하게 처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지혜로운 여자였고 성공의 비밀을 알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면 자신 스스로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그래서 하찮은 일에도 최선을 다함으로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는 탁월한 프로가 되어버린 성공의 지름길을 깨달은 지혜로운 여자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고 하찮은 일에는 스스로 자신의 열정을 식혀버립니다. 작고 하찮은 일에 열정을 부린다면 자신의 가치까지 보잘것없게 되고 말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심지어 자기에게 작고 하찮은 일이 주어지면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면서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 달라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하찮아 보이는 일에 발품을 팔면서 수고할 생각조차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품 비서인 그녀는 말합니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사소한 일에도 정성을 다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그 은혜를 갚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한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전도입니다. 여러분!! 전도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때로 힘들고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구원의 감격 앞에 태신자를 세우고 기도와 사랑으로 동참하신 여러분들 위에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충만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는 이 영혼 구원 사역에 불타는 심정을 가진 분들의 헌신입니다. 주위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전도에 관심을 기울인 분들이 우리 교회를 앞장서 왔기에 이제 맺혀질 영혼 추수의 감격을 더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태신자를 세우고, 결코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기 모인 성도 가운데 어느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생명을 구하는 이 귀한 은혜의 물줄기가 성령을 통해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이웃과 이 사회와 민족 앞에 그리고 세계 열방 앞에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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