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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목한 가정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 (빌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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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한 가정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 (빌 2:1~8)


사람들은 연합이나 화목함으로 얻어질 여러 유익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연합이나 화목에 힘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연합이나 화목 하는 일이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수단으로 사용되어진 연합과 화목은 목적을 이루는 동시에 와해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화목자체가 수단이고 목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화목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카 롯에게 네가 먼저 우하면 좌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고했습니다. 그의 화목은 수단이 아닌 목적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마침내 복의 근원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다투지 않고 화목한 가정에 함께 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사람이 같은 사랑과 뜻을 가지고 한 마음을 품어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일은 매우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형제가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고 하면서 그곳에서 영생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화목을 위해 거룩함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연합이나 화평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화목을 이루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화목할 수 있는 생활에 대해 커다란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화목하고 연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다툼이나 허영으로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일하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일하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 창3:17절에서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곳에는 축복이 임하고, 일이 없거나 일을 하지 않는 곳에서는 무익한 다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러나 때로는 열심히 일하는 곳에서도 다툼이 일어나는데 그 원인은 서로 지나친 경쟁이나 허영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일에 목적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결코 자신만을 드러내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을 통하여 유독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경쟁적이고 허영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아무 유익이 없는 무익한 다툼이 자주 일어납니다.  
다툼은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툼이나 허영으로 일하는 가정은 결코 화목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21:9절의 말씀입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다투면서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리는 가정보다는 차라리 적은 것을 누리더라도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다툼이나 허영을 버리므로 가정에 화목을 이루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다툼은 교만한 사람에 의해서 생기지만 화목은 겸손에 의해서 조성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때도 겸손한 마음으로 들으면 은혜가 많고 교만한 마음을 자지고 들으면 부딪히는 것이 많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권면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잠18:12절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겸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누리는 복된 성품입니다.  

성 부러더 로렌즈 수도사는 어느 날 제일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수도원에 원장으로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그가 문제 많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수도사가 서 있는 것을 보고,"노수도사가 왔구려!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나 닦으시오"처음 부임한 수도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전통이 된 모양입니다.
노수도사는 이 수도원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노수도사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한달, 두달, 석달, 접시를 닦았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구박이 대단했습니다.

석 달이 지나서 감독이 순시차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이 그 앞에서 쩔쩔매었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물었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수도사들이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깜짝 놀랬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즈 수도사를 3개월 전에 임명했는데!" 
감독의 말에  젊은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했습니다.
그 즉시 그들은 식당으로 달려가 노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후부터 그 수도원은 가장 모범적인 수도원이 됐다고 합니다.

겸손은 다툼을 물러가게 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심리는 자신이 남보다 더 대접을 받아야 마음이 즐겁고 기쁘고 안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남보다 더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이 들면 부담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히려 자신을 남보다 더 낮출 줄 아는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며, 더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셋째,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남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충성스러운 사람은 화목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잘 하지도 못하면서 남의 일을 논합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화목을 깨트리는 주된 요인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먼저 네 눈에 들보를 보라고하셨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자신이 해야 할 주어진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화목하지 못한다고  열을 냅니다. 
사람들을 보면 대략 세 가지의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2)자신에게 주어진 일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3)자신에게 주어진 일도 하고 남의 일까지도 도움을 주는 분이 있습니다. 

간혹 자신의 일만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 모르는 체 하는 사람들 때문에 화목이 깨지기도 하지만, 
주로 화목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깨집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가정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가정은 언제든지 화목한 가정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정에 화목이 깨지고 서로 의가 갈라지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일을 소흘이 여기거나 책임을 다하지 못 할 때입니다. 

잠10:26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같으니라.” 

때문에 자신의 일에 충성스러운 사람은 언제나 화목 하는 일에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래전에 테러 분자가 레바논의 미 해병대 본부를 폭파하여 해병 청년들이 이백 여명이 넘게 전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생존자는 단 16명 뿐 이었습니다. 
특별히 많이 다친 한 군인은 온 몸에 호스들을 잔뜩 꽂고 있었으며 그는 보지도 못했고 말도 못했습니다. 
켈리 장군이 그의 침대 옆에 가서 자기가 사령관 켈리 장군이라고 했더니 앞을 못 보는 그 해병은 손을 내밀어 장군의 어깨를 더듬어 계급장의 별을 하나씩 만져서 정말 장군인가 확인하고는 손가락으로 시트위에 무엇을 쓰는데 알아 볼 수가 없어서, 간호원이 손에 펜을 쥐어 주어 종이판을 대어 주었더니 다음과 같이 쓰는 것이었다.
“항상 충성하라! 끝까지 충성하자!” 
그리고는 힘이 없어 연필을 떨어트렸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미 해병대 사령관 4성장군 폴 켈리(Paul Kelley)가 살아남은 이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중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은 세상 모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화목은 남에 의해서 내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성실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고 다른 이들까지 돌아보는 헌신적인 사람이 될 때 비로소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넷째,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일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최선을 다하는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라는 쓴잔을 마시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온 가족들이 그를 위하여 함께 십자가를 지어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일은 십자가는 한번 지면 죽기 전에는 절대 내려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의 완성은 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빌2:8절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신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삶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태도입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로마 사람들이 주문하는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에 아버지 요셉을 도와 열심히 목수의 일을 하셨으므로 예수님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전문가이셔서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한 십자가를 친히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주인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는데 한 마리는 약하고 힘이 없고 또 한 마리는 강하고 힘이 세다면 어느 소에 무거운 짐을 지울까” 
물론 강하고 힘이 센 소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성도여러분, 나의 십자가가 유난히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질 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스승님이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섰습니다. 
거기서 스승은 두 제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건네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 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 만에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드렸습니다. 

그러자 스승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스승의 발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그러자 스승은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러나 너는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가 점점 무겁게 느끼게 되었던 것이고, 너보다 앞서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동안 기쁘고 즐거워했기에 오히려 십자가가 더 가볍게 느껴진 것이지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십자가는 불평하면 더 무거워지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면 가벼워집니다. 

한 미국인 부부가 독일의 ‘오베라머가우’에서 유명한 수난극을 관람을 했읍니다. 그리고 관람 중에 예수의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에 감동을 받은 부부는 공연 후에 그 배우를 만나려고 무대 뒤로 갔읍니다. 
그 부부는 배우와 함께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배우가 극중에서 지었던  십자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편은 부인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여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찍어 줘요." 

그리고 그는 배우가 짊어졌던 커다란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려 했으나 너무 무거워 질고 일어 설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기를 포기한 그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배우에게 말했습니다.
“속이 빈 것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무겁죠?" 

그러자 그 배우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무거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역을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가벼운 십자가는 자신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야고보와 요한처럼 자신은 그리스도의 잔은 마시지 못하면서 그분의 옆에 앉게 해 달라고 바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간혹 진실하고 헌신적인 크리스챤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속이 빈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십자가의 완성은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고, 죽어야 합니다. 
가정의 화목은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허락된 화목한 가정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영원히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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