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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다 (왕하 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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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  열왕기하 7장 3-10절 
말씀 제목 :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어떤 목사님이 「아담과 하와」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100%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하기를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 너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중에 뼈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이요 믿음입니까? 
설교를 한참 하는데 그날 처음 온 새 신자가 큰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고를 게 있었어야지!"
  
오늘 이 세상은 참 고를게 많습니다. 복잡하고 할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초점에 맞는 삶, 목적에 맞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때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에 다니시는 조운파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어떻게요? 이 분이 작곡한 노래들을 모두 잘 압니다. 옛날 분들은 ‘옥경이’ ‘칠갑산’ 이런 노래를 잘 압니다. 
  
그 분이 작곡가라는 것은 잘 알지만 그 분이 크리스챤이라는 것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물론 그 분도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분은 아닙니다. 조운파씨는 80년대 초 개인사정으로 가족과 떨어져서 하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숙집 주인이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숙집 주인되시는 그 분은 하숙생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했습니다.  얼마나 친절하냐 하면 어느 날 아침 자고 나니까 자기 구두를 다 닦아놓은 것입니다.  세상에 하숙집 주인이 하숙생 구두를 닦아주는 것 봤습니까? 그래서 너무 황송해서 아유,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왜 이러시냐고 그랬더니 주인이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조 선생, 더러운 구두도 깨끗하게 닦으니까 반짝반짝 빛나고 좋죠? 우리 몸이나 옷도 더러워지면 씻으면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이 병들고 더러워지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조운파 씨는 잠을 자면서도 그 질문이 뇌리에서 뱅뱅 돌았습니다. 

“우리 영혼이 병들고 더러워지면 어떻게 씻어낼 수 있을까요?” 

그 질문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새벽녘에 일어나서 당시는 옛날이니까 화장실에 가느라고 마당을 지나가는데 주인 집 안방에 불이 켜져 있고 기도 소리가 중얼중얼 나더라는 거예요. ‘아니, 저 양반은 잠도 안자고 뭔 기도를 저리 하나?’ 하고 자세히 들어 봤더니 누구를 위한 기도예요? 자기를 위한 기도예요. 

“우리 집 하숙생인 조운파씨가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 주세요, 하나님 저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고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기도 소리에 이 조운파씨가 충격을 받은 거예요. 그리고는 교회에 나가게 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믿고 은혜 받고 나서 정말 전도를 많이 하는 크리스챤이 되고자 그가 결심을 했답니다. 그는 어느 제작사와 관계를 맺고 그 회사에서 제공하는 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게 바로 캐딜락 차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로서는 외제차이고 아주 좋은 차 아닙니까? 그 캐딜락을 타고 운전하고 다니면 부러울 것이 없지요. 150키로를 달리고 180키로를 달려도 신기한 게 그 앞에 놓은 컵의 물이 안 쏟아진다는 거예요. 그렇게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데 어느 날 그 마음속에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야, 네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겠다고 그러면서, 그렇게 고급 차를 타고 다니면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고 어떻게 전도할 수 있냐?” 하는 얘기를 듣는 순간에 마음에 깨달음이 와서 그 차를 그 즉시 반납해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버스표와 전철 카드를 준비해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버스를 타면 제일 먼저 빈자리를 찾는다고 합니다. 버스가 오면 뛰어 올라가서 잽싸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좀 있다 보면 다음 정거장에서 한 사람이 올라오잖아요. 

그러면 얼른 일어나서 여기에 앉으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일어나면 ‘아, 저 사람이 다음에 내릴 사람인가보다’ 하고 생각해서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이구, 얼마나 피곤하세요? 여기 앉아 푹 쉬세요. 저는 서 있어도 괜찮습니다.” 이러고 앉힌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기회를 봐서 그 분에게 사영리 책자를 주면서 
“제가 이 책을 보니까 너무너무 좋던데 이거 한 번 읽어보세요”   
“잘 모르겠으면 제가 설명해드릴까요?” 그렇게 앉아서 옆에서 설명을 해 주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능력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유행가 작곡가가 전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가 자신을 희생하고 버리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우리 자신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이 복음의 능력을 우리도 받았지 않았습니까?  
복음의 능력을 믿으신다면 이제 9,10월 전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가 해야 될 사명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하는 일은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알 수 있는 그 어떤 일보다도 더 귀한 일이 전도하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전도는 후회가 없습니다.  전도는 우리의 삶에 하늘의 놀라운 상급과 축복을 쌓는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은 ‘Good News’, 기쁜 소식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그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의 소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에서는 문둥이들이 복음을 전하는 소식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도성이 아람군대에 의해서 철저하게 포위당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보니까 이제는 성을 출입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외부에서 양식을 지원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성 안 사람들은 이제 양식이 다 바닥나고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얼마나 비참했으면 서로 자기 집 아이를 잡아먹을 정도로 성 안의 상황이 비참하고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성 밖에는 네 명의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성 안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따로 떨어져서 살아야 했습니다. 문둥병은 천역이라고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저주받았다고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성 안의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는데 성 밖에 있는 문둥이들이 먹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굶어 죽을 상태이죠. 그래서 문둥이들이 
“이거 우리 이러다가는 여기서 굶어 죽는다. 어차피 죽을 것 성 안에 들어가 봤자 양식 한 톨 없고 이제는 저 아람 진영에 가보자. 혹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 하고 일어나서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달려가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 하셨는데 큰 말발굽 소리와 대군이 이동하는 소리를 하나님이 내게 하셔요. 아람 군대들이 들어보니까 뭐 대군의 말발굽 소리에 함성이 막 나는데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애요. 아마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헷사람들의 왕들과 또 이집트의 많은 군사들이 연합군이 되어서 우리를 공격해 오는가 보다 하고 놀래서 그들은 그만 모든 것을 다 그대로 두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문둥이들이 가보니까 아람진영은 텅 비어있어요.   먹을 것, 나귀와 금 보화가 가득 차 있고 다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실컷 먹고 취할 것 다 취하고 그때서야 누가 생각납니까? 성 안의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느냐? 

성경에 보면,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도다.” 라고 되어있는데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래서야 되겠느냐?” 고 되었습니다. “성 안사람들은 다 죽어 가는데 우리만 배불리 먹고 이래서야 되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밤에 다시 달려가서 성 안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람 대군이 다 물러갔습니다. 여기 먹을 양식이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이것을 증거함으로 성 안 사람들에게 큰 희망과 기쁨을 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위대한 역사는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습니까? 왕에 의해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신하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 배후에 하나님이 역사 하셨지만 바로 네 명의 초라한 문둥병자들에 의해서 한 도성이 구원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희망이 없고 대통령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못 합니다. 장관들도 국무총리도 욕이나 얻어먹지 별로 희망을 못 주는 것 같습니다. 야당이고 여당이고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크리스챤들입니다. 크리스챤들은 가장 연약해 보이지만 우리가 복음을 증거함을 통해서 이 민족이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둥병자들은 가장 초라한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볼품 없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 연약한 자들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뭐라고 그럽니까?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고 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이 귀한 복음전파 사역이 맡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복음 전파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될까요? 
오늘 문둥이들에게서 우리는 복음전도자가 가져야 될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 전파자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목사님 설교 가운데 포기라는 것은 배추김치 담글 때나 필요한 것이지 다른 데는 필요 없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배추 담글 때나 포기 쓰시구요 다른 데는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포기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문둥병자들을 보세요. “우리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그냥 있으면 죽는 거죠. 
아마 그들이 인생을 포기했다면 그냥 앉아 죽었을 거예요. 맥이 빠져 죽어 버릴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거기 주저앉지 않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일어납니다. “한 번 해보자! 이판사판인데 죽든지 살든지 하늘에 맡기고 한 번 아람진영에 가보자!”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는 그냥 주저앉아 있습니다. 또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낙심에 빠져서 의욕을 잃어버리고 “될 대로 되라, 케세라 세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낙심한 사람들이 취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한강대교에서 뛰어내리던가 약을 먹고 자살하던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 자살예방협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얼마 전에 그곳에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 한국사람들의 자살이 급증했다는 것입니다.  자살율이 지금 OECD 가입국 중에 1위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는 2위인데 급증한 추세로 보면 1위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하느냐? 48분에 한 사람씩 자살해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한 사람씩 죽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분 30초마다 한 명씩 자살을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이 자살에 실패해서 안 죽고 있는 것이지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1분에 30초마다 1명씩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1년 통계로 보니까 1년에 자살자가 1만 39명이라고 합니다. 자살 시도자가 35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왜 자살을 할까요? 
낙심해서입니다. 나에게는 기댈 곳도 없고 희망도 없고 용기도 없고 의지도 없어요. 그러니 갈 길이 죽을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그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피곤한 자에게도 힘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낙심한 자에게도 용기를 주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너희는 시시때때로 저를 의지하라. 그리하면 힘을 주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문둥이들도 그냥 주저앉아 죽을 뻔했습니다. 
굶어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서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도와주시더라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이 절망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은 끝났다!” 고 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아니야, 이제 시작이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그 때 새로운 시작으로 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둥병자들이 아람진영을 향해 달려갈 때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엄청난 대군의 말발굽 소리를 나게 해서 결국 아람군대들이 다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힘을 내고 일어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편이 되어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하다가 포기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전도해도 안 돼요, 난 안되겠어, 그만 둬야겠어” 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시 의지를 가지고 전도를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기적을 보여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일어나면 여러분은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전파자는 포기해서는 인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도하는 능력 있는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절망 가운데 빠졌을지라도 길이 없다고 할 때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면 길이 생기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복음 전파자는 포기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로, 복음 전파자는 잠잠해서는 안됩니다. 
  
본문말씀 9절입니다.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우리는 말할 때가 있고 잠잠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합니다. 말을 해야 될 때는 말을 하지 않고 또 잠잠해야 될 때는 꼭 입을 열어요. 그래서 성경에도 “너희는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라고 했습니다. 침묵을 지킬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또 정말 말을 해야 될 때 말을 안 해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파수꾼은 위험이 다가오면 경고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에스겔에 보면 성루를 지키는 파수꾼이 성 밖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가 적군이 갑자기 쳐들어오면 성 안 사람들을 깨워서 그 위기의 순간을 알려 줍니다.  이때는 말을 해야 됩니다. 고함쳐야 됩니다. 
  
바로 우리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가야할 지옥의 엄청난 
무서운 상황에 대해서 알려주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침묵은 금이다.” 라는 말은 복음 전도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 말씀에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안다고 시인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디에 가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잠잠하면 안 됩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웃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됩니다. 이웃의 형제들이 육신적으로 굶주리고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도 책임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됩니다. 하물며 우리의 이웃들이 영적으로 굶주려 가고 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서 간다면 우리는 책임의식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전도 한 번 못하고 이 위험을 알려주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합니다. 오늘 문둥이들은 그들의 잠잠함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하고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내 민족이 예수 믿고 구원 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서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책임의식, 연민의식,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믿지 않는 가족에 대한 이런 책임의식이 있습니까? 긍휼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잠잠해서는 안 됩니다. 잠잠하면 화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당연히 할 일이다 만약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할 것이라” 고 했습니다. 복음 전파자는 잠잠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늘 입을 열어서 복음의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복음 전파자는 지체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문둥이들이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왕궁에 가서 고하자” 라고 합니다. 
“밝은 아침이 될 때까지 그냥 배도 부르고 뭐 아직도 여기 물건을 많이 취해야 되는데 우리 좀 더 편히 자고 내일 아침에 해가 뜨면 가지 뭐”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다” 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시간을 다투는 일입니다.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해야 될 일입니다. 
순종이란 지금 하는 것이지 내일로 미루는 일이 아닙니다. 대개 우리들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이, 목사님 우리가요 전도를 안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제가 지금 좀 바쁘거든요. 제가 사업이 좀 바쁘거든요. 제가 나중에 하겠다는 것이지 지금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지금 안 하는 것은 내일도 안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지금의 순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전도할 대상자들이 영원히 살아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또 내가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내 친척이나 가족이나 이웃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가 내일도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정근모 장로님의 친구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근모 장로님은 경기 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 대학교를 
나왔습니다. 그  동기 동창 중에 전두환 대통령 때 경제 수석을 지낸 김재익 수석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뭐 같은 학교 출신이니까 친한 친구 사이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마음 속에 늘 찔림을 받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 장로가 되었지만 저 사람은 예수님을 모르는데 내가 그냥 있으면 안 되지’ 그래서 몇 번 만나서 전도를 하려다가 기회를 놓치고 또 놓쳤는데 ‘오늘은 꼭 전도를 해야 되겠다’ 고 생각을 해서 만나서 정식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네, 나하고 교회 좀 나가세!” 그랬더니 이 김재익씨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실은 나도 그런 생각이 있었어, 그런데 나 지금 대통령을 모시고 다음 주간에 미얀마에 가야 되는데 좀 바빠. 갔다 와서 내가 자네와 함께 교회에 나가지 뭐” 하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어서 그냥 헤어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김재익 경제수석은 전두환 대통령을 모시고 미얀마로 갔고 정근모 장로는 중국에 원자로 회의가 있어서 거기에 참여하러 갔습니다. 
  
회의를 끝내고 저녁에 호텔에 들어와서 텔레비전을 켜는 순간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아웅산 
폭발사고로 자기 친구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을 본 정금모 장로님은 ‘내 친구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그 기회를 놓쳐 버렸구나’ 하면서 가슴을 치며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전도 대상자가 내일도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니, 여러분의 생명이 내일까지 존재한다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 전파자는 희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희생 없이 전도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내 시간을 드리지 않으면, 내 정성과 물질을 드리지 않으면, 내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으면 전도할 수 없습니다. 전도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을 구하는 값진 일인데 어떻게 희생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살이 찢기시고 그 고통을 당하셨는데 어찌 희생 없이 내가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1956년 미국 전역을 큰 충격으로 몰아넣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짐 엘리엇이라는 29세의 젊은 청년 선교사가 그의 친구 네 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남미 에콰도르 동쪽에 있는 쿠라라이 강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새로 둥지를 틀었는데 얼마 안 되어서 그들은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라이프지와 미국의 유명한 타임즈도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기사의 타이틀을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리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먼 남미까지 
가서 아무 일도 못한 채 의미없는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 이렇게 기사에 썼습니다. 

그때 20대 초반 밖에 안 되었던 그 짐 엘리엇 선교사의 아내는 이렇게 그 신문기사에 항의했다고 합니다. 
“낭비라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의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내 남편은 이제야 그 뜻을 이룬 것입니다. 이후로 다시는 내 남편의 죽음을 낭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부인들은 그 젊은 선교사들의 한 두 살 된 어린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남편들이 죽임을 당했던 남미의 에콰도르를 찾아 갔습니다. 그들은 간호사 교육을 1년 동안 받았습니다. 간호사의 모습으로 그 에콰도르 아우카 부족을 찾아가서 그들을 위해 혼신을 다해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헌신적인 사역이었습니다. 

거기서 한 5년쯤 지났을 때 그 아우카 부족의 추장이 어느 날 이 부인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우리를 위해 이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해 주십니까? 무슨 이유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렇게 헌신하십니까?” 

그 때, 짐 엘리엇 선교사의 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바로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였던 짐 엘리엇 선교사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당신들이 죽인 그 사람의 아내입니다”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50년이나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 복음의 천국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교사를 살해했던 5명의 인디언들 중 4명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야만적인 인디언들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결국 1,000여명의 주민들은 모두 신자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짐 엘리엇의 죽음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꽃피워졌습니다. 
그리고 1,000여명의 주민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흘린 순교의 피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짐 엘리엇 선교사의 이야기가 여러분 가슴에 도전을 주고 있습니까?  전도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이제 여러분에 생겨나십니까?  짐 엘리엇 선교사의 이야기가 더더욱 감동을 주는 것은 그의 일기책에 기록된 그의 몇 마디 말이었습니다.  그는 일기책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영생이고 천국이고 구원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 건강, 생명, 세상 명예, 권력, 이 모든 것들이 다 영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얻기 위해서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복음을 위해서, 천국을 위해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무엇을 포기하시고 무엇을 결단하실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전도자로 세우시기 원하십니다.  누가 이 부르심에 순종하시겠습니까?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제 2의 이사야가 우리 가운데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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