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도]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눅 10:25~37)

  • 잡초 잡초
  • 885
  • 0

첨부 1


♣  성경 본문 : 누가복음 10장 25 - 37절
♣  말씀 제목 :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미국의 유머입니다.  
돈에도 수명이 있어서 오래된 돈은 불에 태우게 되지요.
1불짜리 즉 천원짜리와 20불짜리 만원권 지폐가 오래되어 불 태워지기 직전에 만나 서로의 살아온 길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20불 짜리] "난 세상에서 좋은 레스토랑은 다 다녀봤다" 
                  파리도 가고, 브라질도 가고 하며 세상의 나라들과 유명한 레스토랑을 들먹였습니다 
[1불 짜리] "그런 곳도 있었니?  "난 교회란 교회는 다가봤다. 캐톨릭, 루터란, 프레스비텔리안. 감리교
                 등등" 하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의 아픔 가운데 하나는 참 친구가 드물며, 참 이웃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은 많지만 친밀함이 없고 깊은 인간관계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하기를 21세기의 강점은 트렌드는 정(情)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을 ‘고독한 군중’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사는 세상입니다.  점점 이웃이 없어지고, ‘우리’라고 말 할 수 있는 울타리는 좁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4무병에 걸려 있다고 말합니다.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
친구, 이웃이 없습니다.  사람은 많지만 속마음을 털어 놓고 이야기 할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이웃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는 농촌이라 전부 다 알면서 지내지만 안다고 해서 참 친구요 참 이웃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아파트 밀집 지대에서 두 집 이상 이웃을 가진 가정을 조사하였습니다.  500세대에 98세대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집만 가진 이웃은 187세대가 나왔습니다.  이웃과 단절된 오늘 사회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연세대 심리학과에서 초등학교 5, 6학년 500명을 대상으로 친구에 관한 조사를 했는데, 친구가 별 의미 
없다 23%, 친구가 좋으나 사귀지 않는다 35%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38%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어린 아이들도 친구의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친구를 가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한 기독교잡지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비 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의 모습’은 이기적이다 31.4%, 비인격적이다 22.9%, 위선적, 자기중심적 18.6%, 모범적, 인격적이다 17.1%, 기타 10.0% 였다고 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비율이 73%에 달합니다.  
참 부끄러운 결과입니다.   

우스개 소리 할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학교 1학년 때 해변에서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면 옷 입은 채 물에 뛰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학년이 되면 튜브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졸업반이 되면 뛰어 들어가지도 않고 튜브도 던져주지 않고 밖에서 “어 나와” 하며 손짓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풍자적인 비유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그린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게 유대 나라 종교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시비를 겁니다.  
시비를 걸었던 부분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정통 랍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님을 늘 무시했고, 주님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흔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보세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율법사에게 주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랍비여!  당신은 율법에 도통한 사람이니까 묻는데, 율법에는 뭐라고 기록되었습니까?  ” 
  
여러분!  율법사들에게도 계층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율법사, 그리고 율법사에서도 고위층에 
속하는 서기관, 그리고 율법교사가 있었는데, 오늘 예수님께 질문으로 시비를 건 사람들은 율법사였습니다.  이 율법사는 자기가 전공한 부분이 나오자, 줄줄 성경을 외어대는 거였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  
  “대답 잘 하셨소. 이제 가서 그대가 알고 있는 그대로 그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잘 알고 있네. 됐구먼. 그러니까 네가 아는 대로 그대로 살면 된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이 율법사가 순순히 물러갈 리가 없습니다. 다시 주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잘 알겠고 당연한 일인데,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이웃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겪은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악한,  매우 흉포한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악한 강도들은 이 사람을 에워싸고 넘어뜨린 후에, 옷을 다 벗겨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잔인하게 때려서 사람을 반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못된 강도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그냥 버려두고 그 사람이 소유한 짐승이며, 돈이며 모든 것을 빼앗아 달아나 버렸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자기 직무를 마치고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여리고에 살고 있었으며, 자기 당번이 되면 그 기간 동안만 예루살렘에 올라가 일하고 일이 끝나면 집이 있는 여리고로 내려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가던  제사장이 그 길에서 강도만난 사람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러 다른 길로 피하여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피해 달아난 것이 제사장의 집무가 급해서 그랬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조금 후에 한 레위인이 그곳으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도 다른 길로 피해서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그 이름조차 떠올리는 것도  
유대인들은 수치로 알았던 때입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율법을 쫓고 믿어도 개종자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마치 부정한 음식이었던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들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은 아마도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천대받고 살던 사마리아인이 그리로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이 말 “불쌍히 여겼다.”는 말이 대단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헬라인들은 사람의 감정이 내장, 즉 심장, 폐 간 안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헬라말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이 내장들이 다 움직였다는 말입니다. 심장, 간, 폐들이 다 아파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겼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단어를 복음서에서는 아주 의미 있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는 이처럼 속 내장까지 움직이는 마음이 없고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형을 좋아하는 제인이라는 소녀이 있었습니다. 그 소녀의 집에 아저씨 한 분이 놀러오셨습니다. 소녀는 여러 가지 인형들을 내보이며 아저씨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저씨는 갑자기 묻기를 "제인아! 너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 그러자 소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더니 소녀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아저씨, 제가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 드리겠어요. 그러나 그 인형을 보여드릴 때 절대로 웃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셔야 해요." 라고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약속하자, 소녀는 방안에 들어가더니 코는 주저앉고 팔다리는 떨어져 나가고 옷은 다 헤어진 낡은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아저씨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알겠다. 그러나 한 가지 물어도 괜찮을까?  무엇 때문에 제인은 그 인형을 제일 좋아하지?" 

제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사랑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 소녀 제인의 대답이야말로 여리고 길에서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향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사마리아 사람의 불쌍히 여김이 그로 하여금 어떤 일을 행하게 하는가를 이제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사마리아 사람은 나귀에서 내려서 강도 만난 그 사람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당시에 기름은 안정제로 쓰였고,  포도주는 알코올 성분 때문에 방부제로 썼다고 합니다.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는 종기 치료법을 설명하면서 “ 부드러운 양털로 싸매고, 포도주와 기름을 뿌려라 ”고 했다고 합니다.  

다시 또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보십시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얼마나 진심으로 이 사람을 위하고 사랑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응급치료를 한 후에 사마리아 사람은 나귀에 강도 만난 이를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주막이 있는 데까지 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풀 한포기 없이 뜨거운 햇볕이 작열하는 사막인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자기는 걷고 환자를 나귀에 태우고 갑니다. 그 다음날 사마리아 사람은 주막을 떠나면서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환자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 뿐 아니라,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꼭 갚겠다고 약속까지 하고 떠났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요즈음 돈으로 계산하면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안이란 사람은 주후 약140년경 이탈리아에서 여관비와 식비를 다해서 하루 1/2 아사리온 이었다고 합니다.  한 아사리온은 한 데나리온의 1/32이 되는 액수입니다.  
이렇게 계산해 볼 때 두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말은 두 달 분의 여관비를 주었다는 말이 되잖아요. 

지금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적인 계산법으로 열심히 계산하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너무 무리한 짓거리인줄 모르지만 사마리아 사람의 연민이 얼마나 큰 가를 넉넉히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주석가인 푸룸머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이야기는 사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율법은 제사장을 이처럼 공개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이면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더 더욱이 사마리아 사람은 천사같은 자로 묘사하고,  제사장과 레위인을 몰인정한 사람으로 몰아 붙였다면,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돌로 쳐 죽였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하시고도 예수님께서 무사하셨다면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 이 이야기가 사실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은 38절과의 연결점입니다.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베다니로 들어가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가까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도상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를 주님이 하셨다고 푸룸머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 하신 후에 “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주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당신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  
“예, 그거야 자비를 베푼 자가 아니겠습니까?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가서 이와 같이 하시오.” 하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주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나쁘고 못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보통 사람들이면 다 그렇게 하는 행동을 한 사람입니다.  

우리 역시 쉽게 그 사람들을 못된 사람들이라고 매도할 수 없습니다.  왜요? 어찌 보면 내가 그런 처지에 있었다면,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아마 그들처럼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라고 말씀하실 분 과연 계십니까?    

그러나 문제는 주님은 보통 사람들 정도의 삶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뛰어 넘어야 됨을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반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구별됩니까?  
  
두 가지가 다릅니다. 하나는 가슴이 다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웃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속 내장까지 흔들리도록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이웃의 불행이나 아픔에 대해 나 역시 단장의 아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스플랑크니조마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복음서에 이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에 하나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추수할 일꾼이 없다고 주님께서 탄식하실 때 “민망히 여겼다”고 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4장14절에서는 주께서 벳새다 광야로 나오는 무리들을 보시고 느꼈던 마음을  “불쌍히 여겼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34절에서는 여리고로 지나가시다가 소경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을 때 그들을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 때 그들을 ”민망히 /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78절에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13절의 나인성 과부의 슬픔을 보셨을 때, 주님께서 불쌍히 여겼다는 말...  

이 모든 단어가 바로 이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마음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기적을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품어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전도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연민을 우리는 닮아야 합니다.  겉만을 닮지 않고 속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심장이 주님의 심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있을 때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 마음을 품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회도 이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목사가 이 마음을 품고 이 마음을 잊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곁에도 강도 만난 이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고 계십니까?   
원수 마귀에게 끌려 다니며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가운데, 사람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과 평강을 맛보지 못합니다.  어두움과 죄악에 허덕이는 이웃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모르고, 주님 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이웃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또한 뜻하지 않은 어려움 속에서 눈물 흘리며 탄식하는 이웃도 있습니다. 홀로 외로이 무거운 세상 짐을 지고 신음하는 자가 바로 내 곁에 있지는 않습니까? 
누가 그 사람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과 율법사 사이에는 매우 귀중한 사고의 차이가 있습니다. 
29절에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묻고 있습니다. 
하지만 36절에서 주님은 “내 이웃이 누구냐? ”라고 묻지 않으시고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물으셨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아셨습니까?  발견하셨습니까?  
이 말은 그러니까 이웃을 이야기할 때 내 입장에 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보아서 과연 그에게 누가 이웃인가 하는 말씀입니다.  
강도 만나 자가 볼 때 누가 이웃이었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제사장도, 서기관도 다 자기들은 사랑이 있고, 선한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들도 착한 일, 좋은 일 했겠지요.  
그러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 다른 사람이 볼 때 누가 이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연민을 시용합니다. 그러나 자기와 관계가 없거나 좋은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좋은 이웃이 아닙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느낄 때,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느낄 때 나를 이웃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뜨거운 연민을 가지고 사는 분,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이웃입니다.     

사마리아인과 제사장과의 차이는 연민의 차이요, 가슴의 차이이자, 그리고 이웃이 누구냐 하는 관념의 차이였습니다. 성경을 줄줄이 외우는 사람들이었지만 도리어 가슴이 차가웠고, 이웃을 잘못 선정해서 살았던 반면, 버림받으며 살아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살았으며, 바르게 이웃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종교적인 외형으로 나의 신앙을 따지는 게 아니라,  나의 가슴을 보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주님의 친구이고, 주님과 하나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은 주변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당하는 사람들 친구가 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중심인물이 된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대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높은 곳으로, 우리의 마음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굿간에 오신 것처럼 내려갈 때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너무 고급화되어 가고, 너무나 높아졌습니다.   
계속해서 위로만 올라가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타락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우리의 가슴은 주님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따뜻한, 뜨거운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가슴이 문제입니다.  


기도 올리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에게도 주님의 마음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물으시는 주님께 제가 되겠습니다라고 밝히 대답할 수 있는 택전에 속한 믿음의 식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제가 당신 앞에 나아갈 때 나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복 주시되, 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어떤 불행한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친구와 직장의 동료들을 축복하사 나와 그들과의 사이에 어떤 불편한 관계가 일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이 시간 병상에 있는 자에게 은총을 베푸사, 저들에게 편한 잠자리와 병이 치료되는 밤이 되게 하옵소서. 
마음이 어리석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사, 저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게 지켜주옵소서.  가난한 자와 집이 없는 자, 외로운 자, 옥에 갇힌 자, 재난을 당한 자와 억눌려 있는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와 집을 떠나 있는 자들을 복 주시옵소서. 
원수 마귀에게 잡혀 고통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홀로 눈물 흘리며 인생의 무게에 신음하는 이웃도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괴로운 일을 겪은 채 주의 위로만을 기다리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에게 주님의 심장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택전의 성도들로 인도해 주시옵기를 따뜻한 가슴을 가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