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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살아나리라 (겔 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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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살아나리라 (겔 37:1~6)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에스겔 37:6)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감사와 기쁨이고 즐거움과 평안뿐 아니라 생명력이 충만하고 능력 있고 활기찬 것이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목적을 위하여 부단히 전진하는 인내와 굴하지 않는 용기와 그 목적을 위하여 열심을 다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지 못함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분열된 후, 기원전 710 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고, 그 이후 기원전 586년에 남 왕국 유대도 바벨론에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남 왕국 유대의 패망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패망보다 더욱 비참했습니다. 당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곽과 성전을 무너트리고 많은 백성들을 학살했습니다. 심지어는 유대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성전 안에서까지 저항하는 백성들을 목 베어 죽였습니다(대하36:17). 느브갓네살왕은 성전과 왕국의 보물들을 탈취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왕 여호야긴을 붙잡아 쇠사슬로 결박하고 수많은 귀족들과 기능인들과 함께 포로로 붙잡아 가면서 탈취한 보물들을 함께 가져갔습니다.
  
바벨론 포로들 가운데 한 젊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스겔이었습니다. 젊은 제사장 에스겔은 자신의 조국 유대왕국이 철저히 패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유린되고 성전의 거룩한 기물들이 탈취 당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자신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굴욕과 비애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에스겔은 유대인들이 포로들의 집단수용소와 같은 그발 강가의 움막집에서 살면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한숨 짖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역사는 에스겔에게 있어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빼앗아 갔습니다. 죄악으로 패망한 유대민족의 모습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절망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민족적인 의식,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희망이나 기다림, 꿈을 기대하는 열심 등,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린 죽음의 모습이 에스겔 자신과 조국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에스겔에게 이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른 뼈가 가득 찬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그 흩어져 있는 마른 뼈들은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죽음의 모습이었는데, 바로 이 뼈들은 에스겔 자신과 민족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변화의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놀랍게도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뼈들이 서로 맞추어 지고 그곳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가 살아난 것입니다. 살아나서 큰 군대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에스겔의 현실에서 우리자신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유대의 패망에서 에스겔이 겪었던 것으로 마른 뼈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혹이나, 우리는 믿음이나 희망과 꿈의 가능성이나 약속을 잊어버리고 이것에 대한 열심까지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의 멋진 역할과 헌신의 열심을 잃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의 목적이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긍지와 보람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변화는 있을 수 없는 것이고, 결코 바라는 것도 이룰 수 없다고 단정하며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기대나 희망을 가져보기에 너무나 지쳐있지는 않습니까? 살아가는 의욕이나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마른 뼈들은 살아 나야합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가 살아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살아날 수 있는 이상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럼 어떻게 마른 뼈가 살아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고 물으실 때,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고 했습니다. 에스겔의 대답은 “오직 하나님만이 그러한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안목과 방법으로 볼 때에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하실 때에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바벨론에 끌려온 이스라엘 민족이 고국에 돌아간다거나 그들의 고국을 다시 재건한다는 일은 전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70년 후 하나님은 그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될 때에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뒤를 이은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고레스는 조서를 내려 이스라엘 민족을 고국에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이때에 지도자들이 스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 구약의 에스라서 느헤미야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때에 마른 뼈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나는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죽은 마른 뼈와 같은 인류를 살리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의 능력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26:28)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9:14)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1:19)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실 때에 우리의 현실이 변화될 수 있고 극복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마른 뼈들을 살리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대언 하게 하셨습니다. 뼈들이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살아났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상실하고 절망 속에 살아가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하는 예언자들에게 들렸습니다. 바벨론 왕궁에서 일하던 다니엘에게도 들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민족에게 대언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백성들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위하여 ‘남겨진 자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새롭게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4절에서 “그 안에(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4: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동력이 있어.....” 라고 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장 37절에서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져야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납니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읽던 중 루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루터는 그의 외적이고 행위적인 마른 뼈의 신앙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신앙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루터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중세기의 죽어있는 교인들이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역사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지적 만용가운데 마니교에 빠져 방탕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면적 번민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밀란의 한 정원에 꿇어앉아 자신의 괴로움을 탄식하며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주여, 과연 어느 때까지입니까? 내일, 내일 언제까지나 내일이어야 하겠습니까? 과연 왜, 나의 더러움이 바로 이 순간 끝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 때 가까운 곳에서 놀고 있던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에 ”책을 들고 읽어라. 책을 들고 읽어라 책을 들고 읽어라“ 는 소리가 마치 하나님의 명령처럼 들려졌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즉시 성경을 펴서 읽었는데 그 부분이 로마서 13장 13절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 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자” 
  
이 말씀이 어거스틴의 영혼에 가득 차게 들어왔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이 그 순간 어거스틴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이 뒤 어거스틴은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기독교역사 가운데 삼위일체 논쟁을 종식시킨 위대한 역할을 감당하고 성자의 칭호를 받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생기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에게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자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써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생기는 하나님의 숨(breath of God)곧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숨, 곧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심으로 생명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 있는 인간이 되려면 하나님의 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숨은 곧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것은 곧 성령의 내적 체험입니다.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에 임하셔서 생명을 만드셔야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적 체험을 가져야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며 생명 있는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의 내적 체험이 없이는 구원도, 주의 사역의 감당도 감당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고 까지 단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내 안에 내주 하시는 역사 안에서 우리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내적체험이 있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백사경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앞을 못 보는 소경이었으나 점쟁이가 되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어느 날 한 전도자가 그에게 전도지를 주면서 당신의 영혼이나 후손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점치는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백사경씨는 전도자에게 호통을 치며 야단을 했습니다. 전도자는 나중에라도 한번 읽어보라고 전도지 한 장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주고 갔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웬일인지 자꾸만 마음에 괴로움이 왔습니다. 점을 쳐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죽으면 지옥에 가고 자식들의 앞날도 불행하게 된다는 전도자의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병상에 쓰러졌습니다. 문득 전도자가 준 그 전도지가 생각나서 부인에게 전도지를 꺼내어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듣는 순간 성령께서 그를 감동 시키셔서 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는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목사님과 온 교우들은 점쟁이 백사경씨가 왜 교회를 찾아왔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후 백사경씨는 그 많은 재산을 털어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연세대학 총장을 지낸 백낙준 박사입니다. 불행한 삶으로 마감할 뻔 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듣고 성령의 내적체험으로 새 생명을 얻고 그의 자손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이루신 역사였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이나 꿈의 가능성과 약속의 확신을 줍니까? 누가 우리에게 생명감을 주고 의욕적이게 합니까? 누가 하나님 앞에서 멋진 역할과 헌신을 찾게 해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생의 목적이나 삶의 긍지를 찾게 해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주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행복하게 살아가게 해 주겠습니까? 누가 마른 뼈와 같은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하십니다. 
‘너희가 살아나리라.’ 고 말씀하신 대로 새롭게 살아나 생명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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