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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하늘 고향을 향한 여로 (히 1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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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으로 살기 (히 11:8~16)


• 실존적 도전 앞에서

지금은 돌아가는 때입니다. 歸省하지 못한 이들이 이 자리에 계시군요. 귀성이란 말은 ‘돌아가 살핀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대상은 부모님이지만 조상들의 무덤을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방탕한 세월 끝에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탕자에게도 돌아갈 집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냈을 때 그는 살아갈 새 힘을 얻었습니다. ‘remember’는 떠났던 자리에서 돌이켜 다시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기억이란 그런 신통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감을 말해야 하는 시간에 나는 ‘떠남’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 속에 초대하는 손님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달 신(Nannar, Ningal)을 숭배하던 갈대아 우르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떠돌며 삶을 영위하던 공간은 지금의 이라크, 시리아, 터키의 일부 지역과 이집트 북부 지역에까지 이르는데, 사람들은 그 일대를 가리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라고 부릅니다. 그 땅 모양이 초승달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가장 오래된 농경문화 발상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은 그곳이 안타깝게도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급속히 사막화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아무튼 야훼 하나님은 달 신 숭배자였던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 생을 걸고 응답해야 할 실존적 도전이었습니다.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삶을 안전하게 지탱해주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모험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떠나라’ 하시는 주님은 땅과 자손에 대해서만 약속하실 뿐,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실현될지에 대해서는 언질조차 주지 않으십니다. 젊을 때라면 무엇이든 못하겠습니까만, 부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75세의 노인이었습니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고뇌가 많았겠지요.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허공을 향해 한 걸음 성큼 발을 내디뎠습니다. 百尺竿頭進一步란 이런 것이겠지요.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삶을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했다’고 말합니다. 신학자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가리켜 ‘떠도는 족장들’(itinerant patriarchs)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불안한 실존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들이 ‘장막’에서 살았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그를 길 위의 삶으로 부르셨을까요?


• 길 위에서

며칠 전 지방에서 목회하는 한 후배 목사님이 찾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 중에 그는 믿음이란 ‘기다림’인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앞에 ‘신뢰에 찬’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며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신뢰에 찬 기다림, 물론 그 신뢰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는 몇 해 전 오랫동안 섬기던 목회지를 떠났습니다. 무얼 해야겠다는 작정조차 없었습니다. 배낭 하나 짊어지고 40일 작정으로 그저 우리 산하를 걸었습니다. 체력이 기진할 정도로 걷고 또 걷다보니 온갖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목회지에서 받았던 상처, 또 서운한 마음, 분노의 감정 등. 부유하고 있는 기억의 편린들을 살피면서 그는 자기의 작음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여정에서 돌아와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던 이들, 또 자기가 상처를 주었던 이들을 찾아가 일일이 용서를 구했습니다. 용서는 화해와 치유임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이 비워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감동하여 주신 땅에 이르러 지역 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교회 개척을 준비했습니다. 몇 년을 주민들과 같이 살았지만 그가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을 때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교회가 들어서면 마을이 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민들의 의사를 거슬러 교회를 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번민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동광원에서 살고 계신 103살 되신 언님(‘좋은 님’의 뜻으로 개신교 여자 수도사들을 이르는 말)의 전화였습니다. 어려운 일 없냐고, 궁금해서 전화했다고…그 할머니 언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는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게 하시리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몇 해 전 전국을 떠돌 때 그는 끌리듯 남원에 있는 동광원에 올라가 기도를 했는데, 그때 그 할머니 언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의 사정을 그 눈빛 맑고, 표정 따뜻한 할머니 언님께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그곳에 들렀을 때 언님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이름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기억력이 남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언님은 그 젊은 목사의 딱한 이야기를 들은 그 날로부터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그의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언님의 전화를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들었던 것입니다. 앞날을 알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매사가 순조롭게 풀렸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 교회의 막바지 공사비 일부를 지원했고, 마침내 지난 봄에 아주 아름다운 예배당을 짓고 봉헌했습니다.

떠남을 통해 그는 자기 속에 있는 부정적인 모습들을 보았고, 그 마음을 가라앉히고 치유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했고, 자기의 작음을 알게 되면서 귀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떠남이 이런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떠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려는 우리 심정이 절실해질 때 하나님은 스스로 길이 되셔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성서는 광야를 걷던 그 백성이 우여곡절 속에서라도 경험한 하나님의 은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난 사십 년 동안, 당신들의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진 일이 없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습니다.”(신8:4) 이걸 달리 표현한다면 ‘내 잔이 넘치나이다’가 되겠지요. 


• 하늘 고향을 향한 여로

길 위에서 산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나그네가 되어 세상을 떠돌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삶이 지지부진하다고 느낄 때입니다. 장 그르니에의 <섬>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가슴 설레던 때가 있었습니다.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 보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나의 ‘비밀’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이 간직할 비밀 같은 것은 내게 없지만, 그래도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어딘가에 간다면 세상이 내게 입혀준 허울들을 훌훌 벗고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남루한 삶에 대한 로망, 사람 속에는 그런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실존 자체가 나그네입니다. 잠시 여기 머물다가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나그네임을 자각하고 사는 사람은 돌아갈 고향을 가슴에 품은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길손처럼, 나그네처럼’ 사는 까닭은 ‘하늘 본향’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나그네처럼 살고 계십니까?

나그네는 소속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나그네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해관계에도 얽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해가 얽혀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공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나그네의 시선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한 공동체 살면서도 여전히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은 소속이 없기에 현실의 부조리와 위선과 부족함을 누구보다 자유롭게 바라봅니다. 그 공동체 혹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들은 나그네들입니다. 그 시대의 실상을 누구보다도 꿰뚫어본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저는 팔레스타인 작가인 갓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 1936-1972)로부터 떠도는 사람들에게 ‘조국’이란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디아스포라에게 ‘조국’은 국경에 둘러싸인 영역이 아니라, ‘혈통’과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으로 굳어버린 공동체가 아니라,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이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을 의미합니다. 나그네는 차별도, 미움도, 억압도, 착취도 없는 하늘 본향을 찾는 사람입니다.

성도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말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장차 망할 곳이니 정을 두지 말고 그저 하나님 나라나 바라보고 살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한 공동체 속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인습과 전통에 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분은 우리 시대를 가리켜 가치관이 뒤집힌 시대라고 말합니다. 정말 소중한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합니다. 사랑, 나눔, 희생, 겸손, 순종, 청빈, 온유, 평화, 돌봄…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이런 가치들이야말로 본향 찾는 나그네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할 선물입니다. 무엇이 정말 좋은 삶이고, 인간다운 삶인지를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본향 찾는 나그네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를 드러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의 증인입니까?


• 아, 이덕무야!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라는 대목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의 충격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더 긴밀하게는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주님이 그것을 낯 뜨겁게 생각하시지는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 이름을 들먹이면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기분이 좋으시겠어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 이름이 오용되는 것도 참기 어려운 일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요? 하나님, 은혜, 구원, 사랑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제 욕심만 차리고, 다른 이를 용납할 마음의 공간은 채 반 평도 안 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시대의 선비 이덕무가 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가난해 반 꿰미의 돈조차 저축하지 못하면서 천하에 가난하고 춥고 질병과 곤액에 시달리는 이에게 베풀고 싶어 한다. 노둔해서 한 권의 책조차 꿰뚫어보지 못하면서 만고의 경사(經史)와 이야기책을 다 보려 한다. 오활함이 아니면 바보로구나. 아, 이덕무야! 아, 이덕무야!(정민,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열림원, 57쪽)

제 분수를 모르는 사람 같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참 좋습니다. 자기도 가난하지만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 받는 이를 위해 뭐라도 주고 싶어 하는 사람, 바르게 살도록 이끌어주는 책을 죄다 읽고 싶은 이 사람을 두고 이덕무는 이렇게 외칩니다. “아, 이덕무야! 아, 이덕무야!” 이것은 탄식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가 사람의 본바탕, 곧 본향을 찾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떠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결국에는 본향으로의 돌이킴에 대해 말하게 되었습니다. 귀성의 절기에 우리는 어디를 향해 떠나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삶을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자꾸만 우리 발걸음을 더디게 만드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나친 소유, 염려, 불안, 욕망을 덜어내면, 그 자리에 하늘 빛이 찾아듭니다. 그 빛을 따라 걷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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