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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그 다음(5) : 삶의 본질적인 변화를 받아야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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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적인 변화를 받아야 (롬 12:1~2)


우연히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방송 설교를 통해서 듣다가 순간 웃었지만 웃을 수만은 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용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 외에 애인이 없으면 6급 장애인입니다. 그런 분들은 주차장에 있는 장애인 표시에 차를 대셔도 됩니다.”

오늘날의 망가진 성풍속도를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풍자 섞인 고발의 내용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다보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마치 전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 제가 쓰는 말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세상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신앙으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지난 4주 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② 자기주장을 하나님 앞에서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함을 또한 알았습니다.
③ 동시에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 삶의 예배자가 되어야 함을 살폈습니다.
④ 이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아야 함도 배웠습니다.  

오늘도 역시 다섯 번째의 도전을 받고자 합니다.
형식의 변화가 아닌 삶의 변화를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목하고 싶은 구절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입니다.
본문 2절에서 말하고 있는 ‘변화를 받아’라는 단어 ‘metamorfow’(메타몰포호오)라는 단어의 의미는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meta (∼ 와 동조하는, 함께하는 ) + morfή (본질적인 형태, 생각)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를 받아’라는 단어는 이런 이유 때문에 단순한 겉모양의 변화를 말하는 ‘change’의 의미가 아닌 본질적인 형체가 바꾸어지는 ‘transform'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렇게 원어적인 의미를 적용하여 2절의 내용을 다시 해석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라면 이 세대의 풍조를 뒤따라가지 말고 우리들의 본질적인 내면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꿔지는 사람들이라는 권면입니다.

저는 지금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구원 그 다음을 본문을 통해 5주 째 씨름하며 나누고 있습니다.
말은 했지만 목회를 하면서 우리들의 본질적인 내면의 내용들이 바꾸어진 사람들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리 자신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하면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받기는 받았지만 내면에 있는 죄악의 쓴 뿌리로 인해 로마서 12:2절에서 말하고 있는 본질적인 변화의 삶을 실제적으로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아야 한다는 차원의 의미입니다.
저도 이러한 접근에 동의합니다. 

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완전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지만 그 완전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자를 하나님은 또 다른 의인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지적대로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런 삶의 모습이 있다면 우리 기독교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절망스러운 것은 앞서 말씀드린 이런 몸부림조차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냥 외적인 변화에 만족해하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굳어져 있는 한국교회의 현대적 크리스천들을 보면서 어느 때는 절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정말로 무서운 것은 외적인 변화를 내면의 본질적인 변화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로마서의 47번째의 강해를 통해서 우리들이 각인해야 하는 요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변화를 받는다는 것은 본질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우리들의 내면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면적이고도 본질적인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본문에 있는 내용으로 굳이 표현한다면 당연히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울이 ‘변화를 받아’ 라는 문구 앞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는 문구를 전치(前置)로 기록한 것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4:22-24절이 그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렇습니다.
적어도 우리들이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음을 받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음을 받을 때 우리는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는 오늘 본문이 주는 은혜를 가장 축약된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음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본질적인 변화를 받기 위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창세기 13장을 볼 때마다 깊은 영적 도전을 받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재산이 많아지자 그의 식솔들끼리 번번이 재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물리적인 충돌을 막기 위해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제안을 합니다.
너에게 선택권을 줄 테니 벧엘과 아이 사이의 땅을 나누어서 서로의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거주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이 때 아브람이 전제를 갖고 조카 롯에게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창 13:8-9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말을 들은 롯은 눈을 들어 보니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가나안 쪽의 땅을 보니 물이 넉넉하여 농사를 짓기가 수월 할 것 같아 재빨리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할 수 없이 아브람은 롯이 선택한 반대쪽을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브론이 있는 척박한 땅이었고 물도 없는 열악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롯이 선택한 요단 동편의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브람이 선택한 땅은 복된 땅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받는 영적인 감동이 있습니다.
분명히 지정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면 롯의 땅이 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척박한 아브람의 땅이 복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롯은 비옥한 땅인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서 하나님이외의 것들을 의지하며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의지할 것이 너무 많았다는 말입니다.

창 13:10절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없는 것이 없이 풍부했던 땅이었기에 롯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반대로 아브람이 취한 땅은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풀 한포기가 나지 않는 소위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외 진리이신 하나님만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했다는 말입니다.

창 13:18절을 기억하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제단을 쌓는 삶을 아브라함은 선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람을 승리로 만든 요소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받아야 할 도전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마음이 새롭게 되어 영적인 변화를 받는 유일한 방법은 의와 진리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방법대로 본질적인 변화를 받아 승리하는 비결임을 명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제 개인 블로그에는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지 못한 주일 낮 예배 설교 이외의 설교 원고를 함께 나누기 위해 올립니다.

2007년 11월 4일 ‘집중하십시다.’라는 주일 오후예배 설교 원고를 링크했는데 블로그를 방문한 id가 we3243인 한 네티즌이 이런 덧 글을 달았습니다.

“이 세상엔 내가 집중해야 될 것이 참 많다. 주님만을 집중하기엔. 집중력 높여주는 엠씨 스퀘어를 구입하든지 해야지, 원.”

이 덧 글을 읽고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주님에게 집중하는 것은 엠씨 스퀘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주님에게 집중하는 것은 그 분에게 나의 삶의 안테나를 고정시킬 테만 가능합니다.”

우리들은 구원을 받은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나는 의와 진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봄으로서 내 마음이 새롭게 되어 본질적으로 변화를 받아 살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서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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