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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로운 인생과 어리석은 인생 (눅 12: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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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인생과 어리석은 인생 (눅 12:13~34)
 

오늘은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인 추석입니다. 올해는 추석이 주일과 겹쳐서 많은 성도님이 고향으로 떠나서 빈자리가 많습니다. 그 대신 시골의 교회들은 외지에서 찾아온 성도들로 모처럼 활기차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맛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비록 적은 수가 모였지만 그리 마음이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어리석은 인생과 지혜로운 인생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어리석은 인생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청하기를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장자는 다른 아들의 두 몫을 받게 되어 있는데(신 21:17), 이 사람의 형은 그 이상을 차지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당시 유대인의 관습대로 랍비를 찾아와서 중재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른 랍비들처럼 사사로운 다툼을 해결해 주는 데는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를 둘러보시며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1) 어리석은 사람은 탐심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재물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재물을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가치에 대하여 “3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가 된다한들,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면 그 많은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아무리 거액의 치료비를 지불할지라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호출을 받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의사는 없습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쌓아만 두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물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재물을 잘 쓰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재물을 쌓는 데만 관심이 있지, 좋은 일에 쓸 줄을 모릅니다. 최근에 세계 기아인구는 8억 6,2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는 지구상에 양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금도 잘 사는 나라들의 곡물 창고에는 곡식이 넘쳐납니다. 재물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줄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탐심이 무서운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영혼을 파멸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을 신으로 섬깁니다. 돈이 그들에게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다가 죽으면 그 영혼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그 사람은 자기 형과 상속재산을 나누는 일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는 그 사람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죄인들의 구세주로 오신 분을 재산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으로 알고 있다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도 이 사람과 같은 교인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무언가 대단한 오해를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무슨 세상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나옵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 신앙을 기복 신앙으로 알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현상입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단지 복 받기 위함이라고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영혼이 구원받는 것도 복이고, 건강하게 되는 것도 복이고, 부자가 되는 것도 복이지 않느냐, 그러니 복 받는 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경이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목적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를 찾아와서 전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고 했습니다. 막연하게 영육 간에 복을 주기 위함이라 하지 않고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구세주는 대속주라는 말과 같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처한 비참한 운명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시급한 일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곧 죄의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사함을 의미하고, 또한 그로 인한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하고, 궁극적으로는 영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인임을 일깨워주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설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는 순간부터 비로소 구원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되 세상적인 일을 해결해 주실 분으로 알고 믿을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속하신 구세주로 알고 믿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삽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은 큰 부자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땅 부자였습니다. 그는 그해 농사를 지었더니 대풍이었습니다. 소출이 너무 많아 곡식 쌓아둘 창고가 부족하자, 이 사람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 아침 끼니를 걱정하지만, 이 부자는 곡식 쌓아둘 곳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이 부자는 불의한 짓을 해서 재산을 모은 것이 아니라 자기 땅에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서 재산을 불렸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더라도 그것만 가지고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돈을 버는 것 못지않게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돈을 버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이 부자는 자기만 알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라고 하는 일인칭 표현으로 일관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내가 내 영혼에게” 그저 내가, 내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에게는 이웃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만을 위하여 살 뿐입니다. 부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3) 어리석은 사람은 육신만 생각하고 영혼을 경시합니다.

이 부자는 심중에 말하기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부자는 물질적인 풍요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을 가장 잘 사는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요 삶의 방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 얼마든지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한 결과입니다. 

조심할 것은 믿는 우리도 이와 같은 유혹에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이같이 권고하셨습니다.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이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재물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명이 재물의 넉넉한 데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제 그만 살고 오라고 하시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호출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자가 심중에 하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폐부를 감찰하시므로 우리의 마음속 생각도 아시고, 은밀한 곳에서 하는 말도 다 들으십니다. 만일 이 부자가 하나님을 인정했더라면 풍성한 결실을 주신 하나님께 대하여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 라고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내 영혼아, 모든 쓸 것을 쌓아놓았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 부자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 영혼에게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합니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고 하였고, 또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벧전 1:24)라고 하였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언제 죽을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이 부자는 여러 해 지내면서 즐기자고 하였으니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에 이 부자의 영혼을 불러가셨습니다. 영혼이 떠나면 육신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주검이 되고 맙니다. 땅 속에 묻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생전에 힘써 행하던 모든 도모가 허사로 돌아갑니다. 그가 생전에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하였을지라도 고작 반 평 남짓한 땅에 묻힐 뿐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밤을 새워 만든 웅장한 계획도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를 보시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자만 어리석습니까? 예수님께 나와서 자기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누도록 도와 달라고 했던 사람도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두 사람과 같이 세상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두 번째로, 지혜로운 인생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무리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귀중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1) 지혜로운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께 우리의 생활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인생을 살려면 탐심을 버리고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탐심은 자족할 줄 모르는데서 비롯됩니다. 그뿐 아니라 내일에 대한 염려, 불안감 등이 욕심을 부추깁니다. 이는, 내일에 대한 염려와 불안감이 없어야 자족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활의 염려가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길 때 가능합니다.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 볼 때 내일에 대한 염려 근심을 하지 않거나 적게 합니다. 그것은 부모를 믿고 자기들의 생활을 전부 맡기기 때문입니다. 

갓난아기를 보세요.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기는 배가 고프면 젖을 달라고 웁니다. 배가 고플 때 우는 아기의 울음은 슬픔이나 좌절의 표현이 아니라 젖을 달라는 신호일 뿐입니다. 신호만 보내면 젖을 먹게 될 것을 아기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침밥을 먹으면서 그 중 얼마를 점심을 위해 남겨서 보관해 두는 것을 보셨습니까? 부모가 없이 구걸로 연명하는 고아라면 그렇게 할지 모르지만 정상적인 부모를 둔 아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을 보세요.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아시는 대로 광야는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농사가 불가능한 곳입니다. 오아시스에서 약간의 채소나 종려나무를 재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40년 동안 농사도 짓지 않고 주변 나라에 가서 곡물을 사오지도 않았지만, 한 사람도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양식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은 의복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8장 4절에 보니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늘 동행하시면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것은 구할 것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보살펴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우리의 삶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니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염려 근심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모두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맡길 때 세상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족하면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지혜로운 인생을 살려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인생과 지혜로운 인생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상속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한 사람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매일 같이 금식하고 헐벗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먹고 입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 보다는 집이나 자동차와 같은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언제나 걸어 다니셨습니다.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타신 것도 어린 나귀 새끼였습니다. 걸어 다니면 어떻고, 버스를 타면 어떻습니까? 고급승용차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닌다고 그 사람의 인격이 고상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우리 자신의 생활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인생은 일신의 안일을 위해 또는 자기 과시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 재물을 쌓아두길 좋아합니다. 부동산을 사고, 은행에 저축하고, 증권에도 투자합니다. 수익이 생기면 놀리지 않고 재투자를 합니다. 그래서 재산을 증식시켜 갑니다. 그러나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지, 이웃을 위해서는 조금도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재물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 병든 자를 위문하는 것,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는 것, 고아와 과부를 보살피는 것은 곧 예수님께 그 같은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요,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0, 45)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고,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라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것입니다. 결국은 다 두고 살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구제하는데 사용하면 우리의 영원한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3) 지혜로운 인생을 살려면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날 밤에 불러 가시니 사늘한 시체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음부 불꽃 가운데 떨어져서 고통당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집착하는 것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후를 대비한다는 것이 고작 수의나 묘 터를 준비해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시민이므로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남보다 못 먹고 못 입으면 억울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영광스러운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지상의 고향도 좋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정지용 시인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읊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절대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 땅에 살지만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사람은 어리석은 인생이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데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노년에 이르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행치 않은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기 위하여, 세월을 아껴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건강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에 봉사하시고, 물질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시고, 선한 일을 위해 베풂으로 천국 창고에 보물을 쌓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형과 유업을 나누기 위해 주님께 나왔던 사람이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같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유한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원한 천국의 상급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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