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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3 ~ 고전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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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3 ~ 고전 11:1)


제가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되는 국민학교에 다닐 적에는 '바른 생활'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그 교과 내용 중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 하나가 바로 '양식을 먹는 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스테이크 따위의 진짜 양식을 양식 식당에서나 혹은 미국 사람 집에 초대 받아 가서 먹게 될 때 어떤 식으로 먹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배운 바로는, 영국식은 오른손에 나이프, 왼손에 포크를 동시에 쥐고서 그 오른손의 나이프로 음식을 자르면서 왼손의 포크로 찍어 먹는다고 했습니다.
  
미국식은 아무 쪽 손이든지 자기가 쓰는 쪽의 손에 나이프를 쥐고 음식을 자른 후에, 나이프를 놓고 다시 그 손으로 포크를 쥐고 음식을 찍어 먹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자라서 생전 처음으로 양식 레스토랑에 가서 무슨 햄버그스테이크인지 뭔지 하는 것을 먹게 되었을 때, 저는 그때 바른생활 시간에 배운 것들이 생각나면서 어떻게 먹어야 할지 정말 신경이 쓰였습니다.
 
 하지만 훨씬 후에 미국에 가서 살아 보니까 정작 미국 사람들에게는 그런 복잡한 구별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 편한 대로 먹으면 되는 일이었던 것을, 양식을 구경해 보기는커녕 꽁보리밥 도시락도 제대로 못 싸오던 애들이 영국식이니 미국식이니 하고 배우고 외우고 시험까지 치르는 우스꽝스러운 촌극을 벌였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사이에서도 그처럼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하여 쓸데없는 율례를 따지면서 왈가왈부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 유치한 탁상공론에 빠진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뿐 아니라 신자의 모든 행위에 적용될 수 있는, 아주 간단명료한 원칙 한 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이 곧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판단의 기로에 서든지 간에 그저 남에게 유익하게 되는 쪽을 선택하고 행동하라는, 실로 기발하면서도 놀라운 윤리 규범을 제시해 준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왜 우리 기독신자들이 이처럼 '남의 유익을 구하는' 판단과 행동을 나타내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법과 양심을 따라서 사는 것보다도 한층 더 '차원 높은 윤리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3절과 24절에 기록하기를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이 '가한가 아니면 불가한가?'를 따지는 것은 결국 법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당시 고린도 시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듯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법적으로 가한 것 즉 법이 허용하는 행위는 아무 것이나 다 해도 무방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법에 걸리는 일만 아니면 해도 괜찮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여기서 기독신자들을 향하여 보다 차원 높은 윤리 규범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법적으로 가하더라도 유익되지 않는 것이나 덕을 세우지 않는 것은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새로운 행동 규칙입니다.
즉 옳고 그른 것만 따져서 행위를 결정하는 대신에, 비록 불법이 아닌 정당한 행위라 할지라도 남의 유익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스스로 금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그처럼 '남의 유익을 구하는 행위'가 이처럼 '준법적인 행위'뿐 아니라 '자기 양심을 따른 행위'보다도 훨씬 훌륭한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25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에 "25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기록했습니다. 

당시 고린도시의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 중에는 우상 신전에서 제사를 드린 후에 정육점으로 유통되어 나온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기독신자가 장에 가서 고기를 살 때, 지금 자기 눈앞에서 잘라내어 달아 주는 고깃덩어리가 우상제물이었는지 아닌지 판단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상황을 문제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왜냐하면 물건은 인격체가 아닌 까닭에 그 자체가 어떤 윤리성을 띠지는 않는 것이며, "시장에서 파는 것"은 이미 상품화된 것으로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경우에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여기 '묻지 말고'라는 말은 '쓸데없이 까다롭게 따져들지 말고'라는 뜻으로서, 즉 그것은 무슨 양심에 관계될 문제가 전혀 아니니 어렵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26절은 시편 24편 1절에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다윗이 노래한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물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즐기라고 창조해 주신 것이며 음식도 그렇게만 생각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양심적으로 산다고 해서 매사에 쓸데없이 까다로운 질문을 하지 말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그저 간단하게 넘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7절과 28절 말씀에 기록된 것은 신자가 불신자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간 경우입니다.
이때에도 그 식탁에 나온 음식을 그저 "청하매...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즉 '손님 대접하기 위하여 차려 놓은 음식'이라고 간단하게만 생각하면 충분한 것입니다.
'이 음식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왔을까? 혹 우상 신전에서 팔려 나온 것은 아닐까?'하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저 단순히 청한 자의 친절과 감사한 음식물이라고만 알면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또 한 번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란 표현이 반복됩니다.
시장에서 고기를 살 때와 마찬가지로 남의 집에 초대받아 가서 먹을 때에도, 무슨 양심 문제를 들어서 사건을 필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양심 문제가 발생하면 물론 바로 판단하고 정확하게 대응해야 하지만, 문제를 삼지 않아도 될 일을 일부러 찾아다니고 만들어 내려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식탁에서 누군가가 "이것이 제물이라"고 말한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여기서 '이 음식이 우상 신전에 바쳤던 제물이라.'고 그 신자에게 말해 준 사람은 초청한 주인일 수도 있고 혹은 동석한 손님이나 교우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말해 주었든지 간에, 일단 그 식탁에서 그것이 우상제물이었다는 것이 분명히 알려지면, 이제는 그것이 단순한 '음식 먹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상 제사에 대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했는데, 이 말은 곧 '알게 한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 양심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음식 자체가 부정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먹어도 아무 상관없을지라도, 다른 약한 신자의 양심에 상처를 주게 될 경우에는 자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그 말한 사람이 불신자인 경우라면, 신자가 제사 음식인 줄을 알고도 먹는 것을 볼 때 덕이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기독신자도 우상숭배나 제사를 별 문제 삼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양심적 판단을 따르기보다도 다른 사람을 실족지 않게 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원리는 이미 고린도전서 앞장들에서 사도 바울이 두어 차례 언급했던 사실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8장 9절에서도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고 우상제물을 그냥 먹어 버리면 약한 형제를 실족시키고 불신자 전도의 기회를 잃는 등 많은 불이익과 손해가 따라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양심적인 판단과 행동'보다 훨씬 더 중요함을 재삼 강조하고 확인하면서, 29절과 30절에 "29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내 자유"란 곧 신앙 양심의 자유, 즉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자유조차도 '무제한 방임의 자유'가 아니라 '자발적 제한이 포함된 자유'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여기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란 말은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경우에는 주위의 비판에 상관없이 강행할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은 '그렇게 남에게 비판을 받을 정도로 자신의 자유를 강행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 나오는 28절의 "알게 한 자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는 말씀의 문맥과도 잘 부합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30절 역시 똑같은 문맥입니다.
여기 "감사함으로 참예하면"이란 말은 바로 자기 양심을 따라서 모든 음식을 그저 감사함으로 자유로이 먹을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킵니다.
  
디모데전서 4장 3절과 4절에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기록한 것이 바로 이 '감사함으로 음식을 받는' 원칙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문맥에서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라는 말씀은 '내가 감사하다고 여겨지면 남의 비방도 상관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물을 감사함으로 받을 뿐이라는 주장 자체는 옳은 것이지만, 바로 앞의 29절 말씀대로, 비록 본인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다 해도 그것을 남에게 비방을 받게 될 정도로까지 억지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의 율법을 엄청나게 확장시켜 수백 가지의 법을 만들어 내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도 유교를 가지고 소위 관혼상제법을 위시한 온갖 법들을 만들어 내었고 그것은 이렇게 현대화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우리나라 사회의 근간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람이 법을 만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아까 서론에서 예를 들었듯이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도 매너를 따지기 시작하면 쓸데없이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괴롭히는 법들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사람이 처하게 되는 모든 경우에 대하여 사사건건 법을 만들면 정말 아무리 많은 법전으로도 다 기록할 수 없고 아무도 그 모든 법들을 제대로 다 지킬 수 없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로 그런 악습을 교회생활 속에까지 가져오는 자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서 당회만 모였다 하면 온갖 자질구레한 '법'들을 만들어 내는 교회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있고 교회헌법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자기도 지키지 못할 법'들을 가결하고 교인들에게 강요하는 재미에만 빠져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현대판 바리새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수백 개의 법보다도, 단 한 가지 행동 규칙 곧 '남의 유익을 위하는' 쪽으로 판단하는 이것만 기억하면, 항상 유익과 덕이 되는 행동을 간단하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법을 지키고 사는 것도 그렇지만 또한 자기 양심을 따라 사는 것도 정말 훌륭한 일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잎새에 이는 바람에까지 괴로워하면서' 살 줄 안다는 것은 참 얼마나 고귀한 삶의 자세이겠습니까?
독재정권의 압력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양심선언'을 하면서 불의를 고발하는 것은 그 얼마나 의롭고도 용기 있는 행동이겠습니까?

우리 기독신자의 양심은 그런 일반적인 양심보다도 한 차원 더 높은 '신앙 양심'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진실한 신앙을 가진 신자의 영적 양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앙 양심의 자유'는 장로교 헌법의 '교회정치' 항목의 제1장 1조에 명시되어 있을 정도로 신자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고유한 권리가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교인들이 다 자신의 신앙 양심을 내세우고 나온다면 그 교회가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자기 신앙 양심에 따른 자기 판단이나 행동을 주장하고 나온다면 문자 그대로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가게' 되듯이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단합과 질서를 잃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처럼 소중한 개인 신앙 양심을 따르는 것보다도 또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이 바로 '남의 유익을 위하여' 즉 '다른 성도들과 교회 전체를 위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런 판단과 행동이 자기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된다 해도, 그것이 남에게 덕이 되고 유익을 끼치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희생까지도 감수하는 것 - 바로 이것이 참된 기독신자만이 발휘할 수 있는, 양심적 행위보다도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윤리입니다.

불신자들의 사회에서는 사실 법만 잘 지키고 살아도 훌륭한 시민입니다.
그런 준법정신에다가 자기 양심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살 정도가 되면 아주 존경받을 만한 인격자가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의 윤리는 그런 정도의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합법적인 것'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하거나 '양심적인 것'이라고 해서 자기주장을 펴는 것은 불신자들도 지키는 윤리인 줄을 알고, 그보다 한 단계 더 올라가서 '남의 유익을 구하는 판단과 행위'라는 최고의 윤리규범을 지키고 발휘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고귀한 구령운동'이기 때문입니다. 

31절 이하 33절의 말씀에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기록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라는 말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행하게 되는 모든 행위를 총망라하는 표현입니다.
그런 갖가지 행위에 대하여 성경이 일일이 다 가르쳐 줄 수는 없습니다.
그처럼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지거나 가르쳐지지 않는 윤리적 문제를 통틀어서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총칭합니다.
이 말은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성경에 명백히 밝혀진 행동 원리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경우에라도 무조건 순종해야 할 뿐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문제, 이 '아디아포라'의 문제들에 가서는 우리가 정확한 원칙을 찾기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처럼 '법'으로 규정할 수도 없고 '양심'에 따른 판단도 각기 다르게 나오는 문제라 할지라도 모든 기독신자들이 공감할 수 있고 또한 따라야만 할 최고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직결되는 구체적인 행위가 바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32절의 "거치는 자"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란 뜻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라는 말씀이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의 세속적 사상과 행위에 대하여 마찰을 일으키지 말고 무조건 수용해 주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은 진리 문제가 아닌 '아디아포라' 문제에 대해서는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지 말고 지혜롭게 화합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다른 교우에게 무슨 도움이나 유익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매사에 시험만 일으키는 정말 딱한 사람들이 있는데, 교인들 사이에서도 그런 '만년 걸림돌'이 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곧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행위로써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는 말은 맹목적으로 헤헤거리고 아부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점에 대하여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갈라디아 1장 10절에서 분명히 밝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말은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라는 의미와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유익"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곧 이어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대로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끼칠 수 있는 '유익' 중에서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모든 일에 대하여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하는 행위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원리와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은 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끼칠 수 있는 최대의 유익은 곧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전도하고 구원하는 것이 곧 교회에 덕을 세우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기독신자의 자기희생이란 사람으로부터 착하다는 소리를 듣고 도덕군자라는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구령 운동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보다 더 멋지게, 이보다 더 완벽하게, 이보다 더 지고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자기 욕심만 따르는 '동물적인 수준'에서 벗어나고 사회의 법과 인간의 양심을 좇는 '윤리적인 수준'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처럼 '많은 사람의 영혼을 살려내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고의 인생을 살 줄 알아야 합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 말씀에 "많은 사람을 옮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선포된 그대로, 다른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 얻게 하는 것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한 인간으로서 남에게 끼칠 수 있는 최고의 유익인 동시에 한 신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최고의 선행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교우의 영혼을 위한 일이라면'이라는 생각을 따라서 기꺼이 손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하는 생각으로 자기희생을 기꺼이 감수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만약 우리 교회에 이렇게 판단하고 이렇게 행동할 줄 아는 성도들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 교회가 이렇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우리 구역의 저 새신자가 시험을 받게 되지 않을까?'라고 염려하는 구역장, '내가 어떻게 하면 우리 교구의 저 장결자의 신앙생활을 다시 회복시켜 줄 수 있을까?'라고 고민할 줄 아는 심방장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교회는 매년 '흥왕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주일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본을 보여야 저 어린 영혼이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게 될까?'라는 마음으로 새벽 제단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주일학교 교사, '내가 새소식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지 않으면 우리 이웃의 어린이들을 누가 전도할 수 있을까?'라는 심정으로 기꺼이 방을 제공하고 시간을 바치는 자원봉사자들이 매학기 줄을 잇는 까닭에 우리 교회는 주일마다 태신자들이 해산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내가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내 생애 최고의 것과 전부의 것을 다 바쳐드리니까 우리 경향의 성도들은 이처럼 풍성한 초장에서 마음껏 은혜 생활을 누리고 내 자녀들에게는 의인의 자손에게 약속된 축복이 어김없이 넘치고 있구나.'라는 믿음을 붙들고서 기꺼이 희생하며 죽도록 충성하는 장로, 집사, 권사, 성도들이 이 교회를 계속 떠받칠 때에, 이 경향제단은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들은 발붙일 곳이 없고 오직 '이기고 성전의 기둥이 되는 자'들만의 거룩한 공동체로 더욱 든든히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 신앙 양심만을 주장하지 말고 '교회 전체의 덕이 되는 판단'을 내리며, 인간적인 구제나 세속적인 도덕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추구하는 구령운동에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집중시킴으로써,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통하여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의 문맥에 직접 연결되는 11장 1절에 "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냥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을 본받으라.'고, 즉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고 하는 것처럼 너희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라.'는 뜻인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나, 사람의 영혼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이 최고로 고상한 삶의 본은 그 누구보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잘 보여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이 셀 수 없는 많은 경우의 많은 선택에 대하여 일일이 규칙과 법을 제정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지만, 그 '모든 일'을 다 포괄하여 싸 안을 수 있는 신자의 영적 매너와 신앙적 윤리를 오늘 본문은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단 하나의 규범으로 요약해 주었습니다.
  
신자는 '준법 시민'이라는, 이 세상 사회의 평균 수준에 머물러 사는 인생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또한 신자는 주위 사람들이나 교회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주든지 전혀 상관 않고 그저 자기 양심에만 옳다고 해서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결코 아니 됩니다.
  
법과 양심까지도 초월하여 오직 남의 유익을 위하여 말하고 남의 영혼 구원을 목적으로 행동하며, 그래서 실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교회 앞에서 덕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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