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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행 1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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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행 16:19~34) 


제2차 세계대전 중, 어느 부두에 배 한 척이 도착했다. 거기에는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온, 프랑스 군인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전쟁에 패한 탓인지, 그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배에서 내린 그들은 여기저기 질서 없이 주저앉았다. 때 마침, 또 한 척의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역시 유럽에서 철수하는, 영국군 파견대가 타고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 군대와는 전혀 달랐다. 물론 프랑스 군대와 같이,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군대와 마찬가지로, 많은 곤란과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복의 단추를 채우고 단정했다. 

질서 있게 열을 맞춰, 부두로 행진해 올라왔다. 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프랑스 군인들이, 옷매무새를 고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옷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단추를 채웠다. 그리고 대열을 지어, 거리로 행진해 들어갔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패전을 해도 군인은 군인이다. 아무리 패전했다고 해도, 군인이 군인다움을 잃을 때에는, 그 군대에게는 희망이 없다. 우리의 상황은 좋았다가, 나빠질 수도 있다. 또 나빴다가 좋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군인은, 아무리 전세가 나빠진다 하더라고, 군인다움의 기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보면, 어려운 순간을 많이 경험한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여겨지는 경우도, 많이 경험한다. 본문의 상황이 바로 그렇다. 

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아줬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오히려 고발당했다. 감옥에 갇히고 실컷 얻어맞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지 보여준다. 이들은 절망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한다. 

성도는 어떤 자들인가? 여러 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를 말씀 드리면, 세상과 구별된 자들이다. 성도는 세상 사람과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성도는 세상이 우리를 실망시킨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기에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 

1세기 초대교회 문서를 연구하던 신학자들이, 어느 날 매우 재미있는 인물을 발견한다. 초대교회 지도자 중에는 '티테디오스 아메리노스'라는 자가 있었다. 그 이름의 뜻이 재미있다. '아메리노스'는 이름이 분명한데, 그 앞에 붙은 티테디오스는 무엇일까요? 

티테디오스의 뜻은, 전혀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굉장히 염려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 사람 속에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전혀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를 넣었다. 

이제 우리의 이름 앞에도 티테디오스를 넣어 보라. '전혀 염려하지 않는 사람    ' 우리 신앙이 염려에서 우리를 해방할 수 없다면, 우리 믿음은 아무 의미 없다. 염려를 중단하시기 바란다. 세상을 원망하지 않음이 성도다운 의식이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 같이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1.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돈에 있다. 

세상 사람의 많은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돈 이야기이다.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고, 이익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시시하게 여긴다. 

왜 많은 사람들이 점쟁이가 되고, 점을 치는가? 진리대로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서 우상숭배를 한다. 점치던 여종에게 붙어있던 귀신이 나가자, 주인들은 당황했다.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되어서, 이제는 돈벌이를 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점치는 여종을 왜 데리고 있었나? 인류의 복지나 문화와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귀신들린 여종의 불행을 이용하여, 오직 돈을 벌려고 데리고 있었다.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그들은 돈벌이를 잃게 되자, 바울과 실라를 핍박하고, 감옥에 집어넣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존재이유를 생각해 보자. 교회가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헌금을 많이 걷어, 목회자가 잘 살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래서 교인이 많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많은 종교들, 많은 단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적인 성공과 미래의 보장과 경제적 이익이다. 이익 때문에 많은 사람이 클럽을 만들고 종교를 만든다. 점치는 여종의 주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울과 실라는 체포당했다. 로마는 늘 반란을 두려워했다. 유대인은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경계했다. 또한 대부분의 관료들과 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화합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과 실라를 관리들에게 끌고 간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인 분위기를 이용했다. (20-21)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이들은 바울과 실라를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이 사람들은 유대인인데"하며, 반유대주의 정치적 분위기를 이용했다. 자신들의 이익이 끊어져서, 데리고 왔다는 말은 하지 않고,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한다."며,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듯,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댄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마음 이면에는, 자기가 손해 보기에 그렇게 했다. 아주 멋있는 철학, 정치, 교육, 사회 문제를 제시하지만, 그 내면에는 탐욕이 있다. 이익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종교를 편향하지 말라, 누구를 구속하고 파면하라는,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지 않은가? 

사실 우리나라는 불교에 많이 편향되어 있다. 국립공원에 들어갈 때, 입장료에 문화재관람요금을 억지로 받는다. 사찰에 들어가지도 않는데, 돈을 다 받는다. 또 많은 사찰이 오래되었기에,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고, 이곳을 고치는 엄청난 돈을, 모두 나라에서 부담한다. 

청와대 내에 예수님상은 없지만, 불상은 만들어 놓았다. 동전에 다보탑과 불상을 넣었다. 또 자신이 섬기는 종교 모임에서도, 신념에 따라 발언한 내용도, 문제를 삼으면서, 종교편향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진짜 종교편향이 아닌가? 또 총무원장의 차를 검문했다고, 종교편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데모를 주도한 목사 5명은 구속되었다. 지난 번 변양균 정책실장이 불교 신도회 회장으로, 불법적으로 사찰에 많은 교부금이 지원됐을 때, 기독교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최근처럼 길거리에 나와서, 대형집회로 응수하지도 않았다. 기독교는 돈이 아니라, 영혼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자신들이 낸 헌금으로, 선교하고 봉사하는데, 바깥에서 오히려 문제 삼지 않는가? 그래서 기독교를 싫어하는 자들과 결탁한다. 그래서 탐욕과 돈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부정부패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로마 관리들은 재판도 안 하고, 바울과 실라를 체포하여 구타했다. 

(22-23)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버리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이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건이다. 미국선교사 한 분이 한국에 와서, 창녀촌에서 전도를 했다. 

너무 열심히 전도하니까, 창녀촌의 깡패들과 포주들이 아주 미워했다. 그에게 떠나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다. 그러나 선교사님은 떠나지 않고, 계속 전도하다가 결국 그들에게 칼을 맞았다. 선교지에서 돈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그들이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은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이때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억울하고, 고통스러웠을까? 성도는 돈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살기에, 악한 영이 핍박한다. 지금도 이렇게 핍박을 받는 일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2.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그런데 한밤중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옷이 찢기고, 수없이 많은 매를 맞은,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는 그 깊은 감옥에서,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그 소리가 밖으로 흘러 나가, 다른 죄수들도 들을 수 있었다. 모두 깊이 잠든 밤에, 감옥에서도 기도와 찬양을 드리자, 감옥 안의 죄수들에게 울려 퍼졌다. 

바울은 감옥에서 소리를 지르며 "야 이놈들아!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하느냐? 하나님이 무섭지도 않느냐?" 우리나라 사극에, 많이 등장하는 대사지요?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생각해 보라. 수없이 매를 맞고,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왔는데, 어찌 기도와 찬송이 나올 수 있나? 밥도 먹지 못했다. 매를 실컷 맞고, 쇠고랑 차고 감옥에 들어갔기에, 정신이 없었다. 냉기가 가득 찬 감옥에 한참 기절해 있다가, 정신이 든 때가 한밤중이었다. 

그러나 누구를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기도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손해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배신당하여 너무 충격이 클 때가 있다. 

그래서 제정신이 아니다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고난을 겪을 때, 내게 고난을 준 사람을 상대하지 말라. 피해를 주고 억울하게 만든 그 사람을 상대하지 말라. 오히려 그런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과 대면하라. 

사람을 상대하면 미움이 생긴다.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하면 자기 얼굴이 먼저 추해진다. 미움이 내 안에 있으면, 미움이 나오기 전에, 먼저 나부터 파괴한다. 그래서 자기가 먼저 죽는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상대방에게 가기 전에 나를 먼저 복되게 한다. 

축복기도하고, 중보기도하면, 그 축복과 기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르기 전에, 나를 축복하고 중보 한다. 그래서 내적 치유가 된다. 내적치유는, 사랑하고 용서하게 되면, 내가 먼저 치유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면,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1)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돈이나 군사적인 힘이 아니라, 기도와 감사와 찬양이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기도하며 찬양하고 나아가면, 지진이 일어나고 옥터가 흔들리고 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어진다. 바울과 실라는 고난 중에서도, 계속 기도했다. 한 번 기도하고 찬양함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찬양함으로(분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한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을 때, 슬퍼하거나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내가 염려한다고, 머리털 하나 희게 할 수 없고, 키가 한자나 크지도 않는다. 문제는 그대로 있다. 걱정은 오히려 우리 자신을 죽인다. 

결국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을 자학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현실은 그대로이다. 바울과 실라처럼, 오히려 그 자리에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면, 그런 문제들이 물러간다. 이보다 더 좋은 축복은 없다. 


(2) 영혼을 구원하게 된다(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감옥을 지키는 한 간수가 있었다. 

이 간수는 한밤중에 일어나, 계속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는 두 죄수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나고, 옥터가 흔들려서 일어나 보니, 죄수들의 옥문이 모두 다 열려 있었다. 얼마나 놀랐을까? 죄수가 탈옥하면, 그 책임이 간수 가신에게 있기에,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다. 

그때 바울이 큰 소리로, 자살하려는 것을 막았다. (28-29)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이들이 자기이익을 챙기려고 했다면, 옥문이 열린 그때야말로, 도망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돈을 벌거나 이익을 챙기려 하거나, 어떤 인간적인 욕심이 없었기에, 감옥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이었기에, 자결하려는 간수를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도망가지 않고 여기 있으니, 안심하라." 두려움과 책임감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던 간수는, 사도 바울이 부르는 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바울의 목소리를 듣고, 등불을 들고 뛰어 들어가, 도망가지 않았다고 안심하지 않고, 차원이 다른 저들의 삶을 보고, 그들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하며 엉뚱한 말을 한다. 

이제 옥중에서 일어난 지진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으로 바뀌었다. 구원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바울의 신앙은 자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감옥의 간수에게까지 감동을 주어서, 그와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세상 사람들과 차원이 다른 착한 사람이 된다면, 많은 사람을 착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많은 사람에게 믿음을 심어줄 수 있다.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있다면,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도 찬송을 부르게 할 수 있다. 

또한 소망도 줄 수 있으며, 참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도 있다. 주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도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원이 다른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성도는 말씀으로 산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에서, 구원에는 두 차원이 있다. 구원받는다는 말은, 나 하나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도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내가 구원을 받으면, 우리 가정, 사회, 우리 민족이 구원받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구원받으면, 전 세계가 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이다. 

(창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 
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우리 모두에게, "나 때문에 한국이 복을 받는다. 나 때문에 세계가 복을 받는다." 이런 영적 자부심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못났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성령을 부어 주셔서, 아름답게 능력 있게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의 숫자를 찾기보다, 의인된 사람을 찾으신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사람을 찾으신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의인되기를 원하시고, 또 많은 사람들을 의인의 반열로 이끌어낼 수 있는, 영향을 끼치기를 원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란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 한 사람이 바로 살면, 주변의 모든 사회 제도가 달라지고, 개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룬트비 한 사람이 있음으로, 부패된 덴마크가 살아났다. 해적의 나라 영국이, 웨슬리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신사의 나라로 변했다.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바울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즉시 말씀을 가르쳤다. 말씀은 구원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말씀이 없는 구원은 미신이 되기 쉽다. 며칠 지나면, 뜨거운 열정도, 감정도 식을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간수와, 그 가족에게 말씀을 가르쳤다. 성도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구원받았다면 말씀을 읽으라. 성경을 묵상하고 공부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든든한지 알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그 즉시 말씀을 가르쳐 주었다. 구원받은 이후, 첫 번째 해야 하는 일은, 성경을 공부하는 일이다. 말씀을 통해 계속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공격이 와도,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다. 

(33-34)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침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 말씀을 듣자, 어떻게 했는가? 

(1) 바울을 데려가다, 그의 맞은 자리를 씻어 주었다. 

내가 상처 준 사람을 치유해 주고, 회복시켰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다. 이제는 바울과 간수가 죄수와 간수가 아니라, 한 형제, 한 가족 그리고 친구 관계가 되었다. 

(2) 그는 온 가족과 함께 침례를 받았다. 

온 가정이 구원받았다. 침례를 통하여, 주님의 몸,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3) 바울 일행을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했다. 

음식을 나눔은, 교제와 축복을 나누며, 행복을 나누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기뻐했다. 이 기쁨은 세상의 기쁨이 아니었다. 구원의 감격이었다. 이 모습이 참 교회의 모습이다. 결론이다. 성도는 어려울 때,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며 산다. 그러기 위해서, 

① 기도로 살아야한다. 억울한 일을 당하였으나,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② 찬양하며 살아야 한다. 

③ 구원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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