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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것이 옳은가? (눅 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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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할렐루야! 
9월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이주민들(보어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보어 전쟁(Boar War)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한 병사가 매우 드문 죄명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그 죄명은 ‘낙심죄’, 사람을 낙심하게 만든 죄였습니다. 
그때 ‘레이디스미스’라는 작은 마을이 영국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마을을 방어 중인 병사들에게 
온갖 부정적인 정보와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적들의 힘이 얼마나 큰지, 그들의 공격을 막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영국군이 얼마나 많은 나라를 점령하고 전과를 올렸는지 … 
결국 마을이 함락될 수밖에 없다고 떠들었습니다.
병사들과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붙잡혔고 ‘낙심죄’로 기소 당했습니다. 
<송재영, 「감자를 맛있게 먹는 법」, 올리브 북스 참조>

사람을 낙심시키는 것도 죄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살맛이 납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나면 인생이 끝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고향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일터에서나, 가족들 앞에서 낙심케 하는 자가 아니라
용기를 주는, 희망을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합니다. “좋아질 것입니다. 염려를 맡기세요. 힘을 내세요.”

♬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

용기와 희망을 주는 입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전통 … 

사람들은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전통은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관습이나 양식, 태도 … 등을 말합니다. 
전통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만들어지고 정착되는 것입니다. 
크게는 한 민족이나 국가, 가문, 학교, 회사, 교회 …
작게는 몇몇 사람의 모임에 이르기 까지 …
전통은 그들의 뿌리가 되어 속한 사람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통을 지키고 이어가며
그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정체성 그리고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전통이 있다’는 말은‘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좀 비싸도 명품을 갖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전통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식에도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각 지방에도 그 지방을 대표하는 유명한 음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 중에 
어떤 지방을 여행한다고 하면 그 지방의 전통음식을 꼭 먹어보라고 권합니다.
전주의 비빔밥, 안동 식혜, 제주 옥돔구이, 
평양 냉면, 춘천 막국수 … 등이 유명합니다.
부천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부천시에서도 관심을 갖고 대표적인 음식을 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기후와 환경의 차이로 인해 각 지방마다 생산되는 음식재료가 다양합니다. 
거기에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특색이 더해져 
그곳을 대표하는 전통음식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밥 한 끼를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방의 특색과 역사를 맛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통이 소중하다 보니 어느 곳을 가도 … 어떤 단체를 만나도 …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라는 문장을 즐겨 쓰는 것입니다.
좋은 전통이 있다는 것은 큰 자랑꺼리 입니다. 

그러나 좋은 전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동기에서 시작된 전통이 이상하게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후배 사이를 돈독히 한다는 이유로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고 
심하면 때리기도 하며 못 살게 구는 전통이 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부끄럽지만 교회 안에서도 있습니다.
군기를 잡는다는 이유로 고참이 졸병을 괴롭히는 전통 … 등 
이제는 이런 것들 모두 없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전통으로 귀히 여기며 지켜가고 계십니까?
어느 것이 옳으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옮겨 적어(필사) 보존하며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바리새인’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하게 살겠다는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날이 갈수록 겉으로만 율법을 지키는 위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눅 6:6)
그런데 그 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오른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그 사람이 ‘팔의 혈액 순환에 문제가 생겨 
손에 마비가 오는 중풍병의 한 종류를 앓던 환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오른 손이 마른 사람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하는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눅 6:7)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고발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눅6:8) 
그러나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 …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눅6:8)고 하시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며 책잡을 기회만 노리는 사람들에게 물으셨습니다. 

“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 ”(눅 6:9)

예수님은 ‘사람이 위태로울 때만 
안식일에도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바리새인들의 규칙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의 전통에 의하면
‘손 마른 병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위험은 없더라도 안식일에도 
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을 낫게 하는 것이 선한 일이라고 여기셨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 …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2) 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꺼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양보다 더 귀한 사람을 병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은 구할 수 있지만
고통 받는 병자는 고치면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의 전통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시자
마른 손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눅 6:10) 할렐루야!

노기가 가득하여 … 

이 광경을 목격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화를 냈습니다.

11절에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눅6:11) 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 … ”(마 12:14) 했다고 했고, 
마가복음에는“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막 3:6) 고 했습니다. 


헤롯당은 헤롯 왕조 가문을 지지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헤롯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지 않지만 
헤롯 왕조와 로마 정부에 호의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두란노 비전성경사전 참조>
반면에 바리새인은 외세를 배격하는 보수주의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의 지배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의 연합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헤롯당에게도 예수님은 자신이 누리고 있었던 기득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역시 기존질서를 깨는 예수님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수같이 지내던 사이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공동의 목표로 손을 잡은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 마른 사람이 고침 받은 것을 보며
얼마나 기뻐하며 감사했겠습니까?
힘들게 살던 사람이 깨끗하게 되었으니 감사하며 축하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베푼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Messiah,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손이 마른 사람의 고통’이나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노기가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눅 6:11)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에 환자를 고치심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전통, 
그들이 믿어 왔던 신념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유대민족의 뿌리를 흔들고 질서를 파괴하는, 
그래서 죽여야만 하는 위험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을 중요하게 여겼던 바리새인들은
정작 안식일을 지켜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창조주 하나님/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출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그리고 안식일은 이집트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안식일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몰두하다가
창조하신 하나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자신이 몰두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이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있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있는 날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서 참 안식일의 의미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어떤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영광 돌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배의 의미는 잊은 채 …
형식적으로/습관적으로/전통에 따라 예배드릴 때가 있습니다. 
예배는 ‘주의 인도하심 따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주보 인도하심 따라’ 예배드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주보에 나온 모든 글들은 목요일에 완성이 되어 인쇄소로 넘겨집니다.
그래서 목요일 이후에는 수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쇄소에 주보가 넘어간 후에
‘주일에 다른 찬송가를 불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찬송가를 바꿔 부르면 전화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왜 주보대로 안하십니까?" 
어쩌다 순서를 앞뒤로 바꾸면 왜 주보 순서대로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주보 인도하심 따라’예배 드려야 합니까?
‘주의 인도하심 따라’예배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 예배 순서를 주보에 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꼭 주보 순서에 따라 
예배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한데
주보 순서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만 빼놓고 … 

주일이 오면 아무 생각 없이 … 예전부터 해왔던 일이니까 …
습관대로, 습관처럼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성도, 감사도, 기대도 없이 … 
그냥 예배 시간에 앉아 끝나는 시간만 기다리다 집에 가면서
‘이번 주일도 지켰다’고 만족해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구원 받은 사람,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 
천국백성으로서의 감사와 감격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와 감격도 없이 … 온통 필요 없는 것들을 붙잡고
그것이 진리인양 그것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일할 교회를 구석구석 둘러봤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피아노가 놓여 진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피아노의 위치가 예배드리는데 방해가 될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직원들을 시켜 피아노를 옮겼습니다. 
주일이 되자 몇 몇 장로님들이 목사님에게 찾아와
“우리교회 피아노는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하면서
피아노 위치를 바꾼 것에 대해 화를 내며 항의했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피아노를 예전에 있던 자리로 옮겼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피아노의 위치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매 주 몇 cm씩 옮겼습니다. 
1년 후에 목사님이 원하는 위치로 피아노를 옮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피아노가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느냐’는 것이 예배보다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장로님들은 오래 전부터 피아노가 있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새로 부임한 목사님의 기를 꺾었고, 
목사님은 아무 것도 아닌 피아노 위치 때문에 1년에 걸쳐 매주 피아노를 옮겼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피아노 위치를 옮기고 싶은 자기 고집을 예배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예배당에 들어서면 피아노를 보면서 
‘이번 주는 몇 cm를 옮길까?’를 1년 동안 생각했을 것 아닙니까?

교인들 중에, 목회자들 중에 중요하지 않은 일에 목숨 거는 이들이 많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사업 하는 분들 몇 분과 만났습니다.
대화중에 “옛날 전화번호를 목숨처럼 지키는 사람들과는 
사업 파트너를 하면 안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요즘 휴대전화기는 인터넷검색이 되고, e-mail을 확인도 할 수 있으며, 
음악을 듣고 TV도 보는 아주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옛 번호에 목숨 걸고 
새로운 휴대전화로 바꾸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얘기는 거래처 사장의 휴대전화번호를 보고
그분들이 변화되는 세상에 얼마나 적응하며 사는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있답니다.
그래서 앞으로 계속 거래할지 거래를 끊을 지까지 고려한다고 합니다.
보통 휴대전화번호를 바꾼 사람들에게서 
‘그동안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제 번호가 바뀌었습니다. 
저를 기억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온다고 합니다. 
이렇게 휴대전화번호를 바꾸는 것이 
그동안 왕래가 없었던 사람들과 새롭게 연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사십니까? 

우리 교회에 구석구석에 붙여 놓은 중요한 문장 하나가 있습니다.

“시간낭비 비효과적이면 성경만 빼놓고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교회”

우리도 「내 고집」,「내 자존심」,「잘못된 내 생각」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내세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목숨을 걸고 … 분란과 다툼을 만듭니다. 

신앙생활의 연수가 길어질수록 
스스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의 기준을 만들어 
그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 생각에,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도 가로막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래 믿었어도, 생명이 없는 속이 텅 빈 껍데기 그리스도인 일뿐입니다.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청년문화를 형성한 히피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직 사회에 불만을 품고 인간성 회복과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바닷가나 거리에 모여 노숙을 했습니다. 
그들은 씻지도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으며, 
신발도 신지 않고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미국에 갈보리채플의 척 스미스(Chuck Smith) 목사님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그들이 주일에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노숙을 하며 잘 씻지 않았기 때문에 
온 몸에 모래가 묻어 있었고 퀴퀴한 냄새가 났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에 머리는 길게 늘어뜨리고 신발도 신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 의자는 성찬용 잔을 놓기 위해 동그란 고리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성찬용 잔을 놓는 그 곳에 발가락을 끼고 앉아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분위기는 물론 예배 분위기도 망쳐놨습니다. 
그들은 교회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면서 
모래를 떨어뜨려 카펫을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카펫에 떨어진 모래는 청소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자 교회의 중직들이 척 스미스 목사님을 찾아가 
“히피들 때문에 교회가 지저분해지고 카펫이 망가진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모래 때문에 카펫이 더러워진다는 이유로 
저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 카펫을 걷어버리십시오!” 했습니다.
<김병삼목사 지음,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이야기」참조>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합니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해도 … 제도와 규정이 잘 되어 있다 해도 …
여기 저기 많이 돕고 후원하다고 해도 …
많은 교인이 모이고, 은혜로운 예배를 드린다 해도 …
예수님이 바라보았던 한 영혼,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다워야 합니다.
천국 백성은 천국 백성다워야 합니다.

거룩한 겉모양만 있고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지 않고
영혼 구원에 관심이 없다면, 예수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 
껍데기 크리스챤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 일터에서 … 존경 받으십시오. 
인정받으세요. 칭찬 받으세요. 돈 많이 버세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성경 말씀 앞에서/교회에서 … 
자기 생각, 자기 지식, 자기 판단, 자기 경험 내세우지 마세요. 
겸손하게 믿고 순종하며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손 마른 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해도, 조롱해도 여러분은 예수님 앞에, 말씀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낙심치도 말고, 낙심케도 말고 …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 아멘”하며 
손 마른 자가 예수님이 ‘손 내밀라’고 말할 때 손을 내밀어 고침 받았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멈춘 피가 흐르고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도 멈춘 영의 피가, 평안의 피가, 경제가 흐르고, 돌고, 회복되는 역사가 
여러분 개인, 가정, 일터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기 싫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버리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왜 지키고 싶고, 왜 버리고 싶습니까?

명절만 다가오면 엉뚱해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전통이라고, 가문의 전통이라고 … 
버리지 못하고 옛것을 찾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좋은 것은 지키고, 자기 싫은 것은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초상이 나면 이상해지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어제 허경제목사님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익산에 빈소가 있어서 어젯밤에 다녀왔습니다.
빈소에 가서 보니 남자들은 검정 양복을, 여자들은 검정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초상이 나면 남자는 양복을 입고, 여자는 한복을 입어야 합니까?
왜 그래야 합니까? 반은 서양식이고, 반은 한식입니다.
여자들은 검정 양장을 입으면 법에 위반되는 것입니까?

우리들이 고집하고 있는 것들 중에, 지켜야 한다는 것들 중에 …
얼마나 웃기고 엉터리인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들이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인지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명절에 고향에 가고 친구를 만나 하는 일들이 정말 지켜야 될 것들입니까?
그것이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까?
“어느 것이 옳으냐? 어느 것이 옳으냐?”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물으셨던 그 질문이
여러분의 귓가에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 … 집사, 권사, 장로, 목사로 
“어느 것이 옳으냐?”하는 주님의 음성 앞에
겸손히 자신의 잘못된 점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살아서는 안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 
하나님 마음에 합한 복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던 그 질문을 
오늘 우리가 대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가졌던 고집, 판단, 전통이라는 것 
과연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해야 하는지
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단지 지키기 위한 전통을 지켜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에 살며 땀 흘려 애써 모은 것을 구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립니다.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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