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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식] 사람이 무엇이기에... (시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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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이기에 (시 8:1~5)


성찬주일 (아침)에,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신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는 은총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8편을 쓴 시인 다윗과 같이, 주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삶이 회복되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자연환경이 회복되면, 그곳은 생명의 땅이 됩니다]

여러분은 요즘 행복하신지요? 사람의 행복과 지치지 않는 힘, 생명은 어디로부터 올까요? 누구나 이것을 찾고 있지만, 기대와는 정반대로 불행하고, 절망하고, 생명의 기쁨을 상실하며 삽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말씀드린 대로 2달 조금 전에 저희 가정은, 북한산 자락 밑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다가, 원로목사님 사시던 오래 된 집을 수리해서 마당이 꽤 넓은 집으로 이사해 왔습니다. 마당이 있어서 잔디도 심고, 꽃도 심어 자그마한 꽃밭도 가꾸면서 삽니다(아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10여 동안 아파트생활을 하면서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는 기쁨을 맛보면서,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낮이면, 손바닥만 한 노랑나비, 총천연색 나비가(사진 찍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제 아침에도 어디에서 그 이른 시간에 손바닥만 한, 까만 나비가 우리 집 꽃밭에 놀러왔습니다. 가만 쳐다보니 꽃마다 찾아다니면서 나풀거리며 앉아서 놉니다(계속 지켜볼 수가 없어서 아쉬운 맘으로 출근).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런 나비 첨봤습니다. 그 나비들이 어디서, 어떻게 알고 우리 마당에 놀러왔느냐는 겁니다. 꽃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느냐는 겁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 이번에는 밤에 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저도 모르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10수년 동안 들어보지 못하던 청아한 풀벌레 소리가 제 귀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누워서 가만 듣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옷을 주어입고, 소리 나는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풀밭으로 살금살금 걸어가서 쪼그리고 앉아 귀를 기울이는 데, 잠시 소리가 멈추는 듯싶더니 여기저기서 귀뚜라미 소리,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합창을 하는데 그 소리는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갑자기 제가 정말 놀란 것이 있습니다. 손바닥만 한 나비 때문도 아닙니다. 풀벌레들이 울어대는 소리 때문도 아닙니다. 놀란 理由는 딴 데 있습니다. '아, 自然이 回復되기만 하면 生命體들이 살아나는구나'하는 사실 앞에 너무 너무 놀랐습니다. 

우리 집 마당, 그것도 정원이라고, 농약 안치고 잡초 뽑아주며 가꾼 풀밭이라고, 꽃 몇 가지 사다 심어 놓았다고, 손바닥만 한 나비도 찾아오고, 풀벌레들이 와서 사는가? 놀람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하고, 하나님 창조하신 자연으로 살아 숨 쉬며 꿈틀거리는 생명의 몸짓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어디에서 그런 풀벌레들을 데려다가 우리 집에서 울게 할 수 있겠습니까?···어디서 그런 나비들을 초청해다가 우리 집 꽃밭에 모시겠습니까? 나비들이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데···살아 있는 自然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日常에 매여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늘 생존경쟁에만 빠져 살다보면, 제명에 못 죽습니다. 눈을 들어 자연을 보고, 생명의 몸짓을 보고, 귀를 기울여 자연의 소리,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행복해집니다. 자연의 소리, 생명의 몸짓을 보면 우리는 거기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삶의 환경이 되시면 나는 사는 자가 됩니다]

시편 8편을 쓴 시인 다윗은, 자연과 우주 속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9).···어떻게 이런 노래를···? 자연과 우주 속에는 그것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人生을 행복하게 하고, 우리를 살리는 󰡔삶의 환경, 살리는 환경, 생명의 환경󰡕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낙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 것 다 잃어버려도 행복하게 삽니다. 생명까지 빼앗긴다 해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참 생명, 영생을 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찾는 자가 삽니다. 그 하나님을 보며 사는 자가 행복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가 자신의 존귀함도 깨닫습니다. 

이 소원이 있는 자에게 주님은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罪와 軟弱함 때문에 마음이 傷한 자를 멸시치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지난 수요기도회에, 캄보디아 뜨라인정 예수사랑공동체 가족들(11-18세) 열일곱 명이 우리교회를 다녀갔습니다. 2년 전, 그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하루 한 끼 멀건 쌀죽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던 아이들입니다. 양말이 어디 있습니까? 신발이 어디 있습니까? 저녁에 세족식을 하면서, 우물물을 떠다가 아이들의 발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씻어주고 기도하고 안아주는데, 눈물을 펑펑 쏟아냅니다. 발이 거북등짝 같이 딱딱하고 거칩니다. 양부모를 다 잃은 아이들입니다(···). 그들도 부모와 같은 병으로 죽을 수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힌 아이들입니다(···밥 문제, 그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가만 보면, 버려진 삶의 환경에서 만난 새로운 환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들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하나님을 만난 아이들에게서 웃음이 회복된 것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입술에 노래가 있는 것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아이들이 비록 살아가야 할 길이 험악하지만, 그들이 지금 만난 하나님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저는 그들이 평생 웃음과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고 사는 복을 받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환경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인생의 환경이 되십니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과 삶의 환경이 되신다면, 비록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 위기, 낙망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처해있다 하여도 죽지 않고 반드시 삽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과 삶의 환경이 되어주시는 데, 내가 어찌 살지 못하고 죽겠습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다윗의 노래처럼,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 13-14). 아멘.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환경이 되시는 분은, 그 입술에 노래가 있습니다.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매 맞고 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가 그러했습니다(그도 살고, 간수와 그 가족도 살렸습니다). 요셉의 인생이 그러했습니다(자기도 살고, 이집트사람도 살리고, 자기를 증오하며 죽이려 했던 형제들과 아버지도 살렸습니다). 다윗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탄식을 노래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증오와 미움을 용서와 사랑으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온전합니다. 하나님은 해를 惡人과 善人에게 비추어주십니다.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살지 못할 사람, 가능성이 없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악인이 변하여 선한 사람이 되고, 불의한 자가 변하여 의로운 자가 되면, 그들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교만과 의를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구원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 사람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합니다. 피를 쏟으면 죽습니다. 얼핏 보면 사람의 피는 진한 적색의 잉크처럼 단순한 액체 같지만, 수십 가지 아니 수백 가지의 물질이 섞여 있어, 현대과학으로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복잡한 액체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상처가 나면 출혈이 일어납니다. 크고 작은 상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신비하지 않습니까? 피는 出血이 되면 곧 응고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삽니다. 그런데, 몸 안에서는 절대로 응고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신비입니다. 이 피가 우리의 생명을 좌우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나의 생명과 구원은 예수님의 피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영성가(聖人)인 이현필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금욕주의자 같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 같아 보이는 분이셨습니다. 채식주의자였습니다(고기를 일체 잡숫지 않는 분).

말년에 후두결핵으로 고생하셨는데,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신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업고 어디 거지굴로 데려다 주시오”(선생님은, 늘 제자들에게도 존댓말을 쓰셨음). 거지굴에서 몇 번이나 사경을 헤매던 어느 날 밤에,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자 선생님은, 필담(筆談)으로 제자들에게 놀라운 고백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시간까지 예수님을 섬김에 있어 ‘선행위주’였습니다. 오늘 그 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자백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저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는 앞으로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만 달려갈 것입니다. 저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제자들이 혹시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이나 예수님의 보혈보다 철저한 절제를 통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자로 오해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현필 선생님은 자기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 자기 신앙의 근본이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을 천명함으로, 제자들의 잘못된 신앙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겁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철저히 반성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부질없는 '이현필 관(觀)'을 뒤엎고, 사람들의 모든 관심을 예수님에게로 돌리려고 했던 겁니다.

그러고는, 제자들에게 부탁합니다. “무엇이든 좋으니 먹을 고기를 사다 주시겠습니까?” 제자들이 너무 놀랐습니다(충격을 받음). 선생님 말씀을 어찌 거역합니까? 굴비 하나를 사다가 끓여 왔습니다. “수고했소. 그 국물을 내 입에 떠 넣어 주시오.”

수십 년간 지켜오던 목숨과도 같은 채식의 정절을 의도적으로 파계(破戒)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선생님의 사상이야 어떻든 밖으로 나타난 순결생활, 금욕생활, 청빈생활을 보고 神人(신과 같은 사람)으로 따랐는데, 지금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파계였던 겁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제자들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 예수님의 보혈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구원만을 증거하기 위한 선생님의 파계에서, 위대한 신앙이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베푸신 성찬, 떡과 잔에 초대받았습니다. 이 떡과 잔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환경입니다. 낙심하신 분, 노래를 잃어버리신 분, 웃음을 잃어버리신 분,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 우리를 살리는 환경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교만과 나의 의, 자랑, 욕심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만 믿고 바라는 성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제 찬송 285장 1, 4부르며 성찬에 참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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