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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다운 안식 (레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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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안식 (레 25:1~7)


1. 백로에 그리는 은총

어느덧 때가 白露 절기에 이르렀습니다. 農家月令歌는 이맘때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신선한 조석 기운/秋意가 완연하다…/아침에 안개 끼고/밤이면 이슬 내려/백곡을 成實하고/만물을 재촉하니/들 구경 돌아보니/힘들인 일 功生하다/百穀의 이삭 패고/여물 들어 고개 숙어/西風에 익은 빛은/黃雲이 일어난다.”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 저절로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 계절에 내리는 이슬은 각종 곡식이 열매를 맺게 하고, 또 그 속에 여물이 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민감한 영혼들은 이슬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보고 있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내 살아남게 될 주의 백성들은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아침 이슬과 같이 될 것이며, 푸성귀 위에 내리는 비와도 같이 된다”(미5:7)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가을날 이런 은총이 여러분의 메마른 심령 위에 내리시기를 빕니다.

며칠 전 선배 목사님 한 분을 만났는데 얼굴이 좋아보였습니다. 강원도에 있는 깊은 산에 들어가 보름을 지내고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딱 한 사람과 마주쳤다더군요. 그래서 어땠냐니까 씩 웃으면서 ‘나야 좋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당뇨병에 시달리는 그 선배는 서울을 떠나 지방에 내려가면 당뇨 수치가 내려가더라고 했습니다. 도시 생활은 사람들을 다 환자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병의 원인은 대개 ‘스트레스’입니다. 분주하게 질주하다 보니, 시각이 좁아지는 만큼 소견도 좁아집니다. 따라서 다른 이를 바라보는 눈빛은 점점 사나워지고, 말투는 퉁명스러워집니다. 언제나 경계의 눈빛을 하고 사람들을 대합니다. 그러니 마음도 찹찹하지 않고 늘 피곤합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기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울울해지면 언제나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들을 찾아 나선 여행길이 고되어서 지쳤으면서도, 너는 ‘헛수고’라고 말하지 않는구나. 오히려 너는 우상들이 너에게 새 힘을 주어서 지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구나.”(사57:10)

우리가 ‘살아갈 힘’,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마음의 고요, 이웃들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선물이라고 이사야는 단언합니다. 진정한 안식은 우리 마음을 주님께로 돌려보낼 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2. 사바트

히브리인들이 인류의 정신사에 끼친 영향은 막대합니다. 어떤 이는 서양 사상의 두 원류는 그리스를 뿌리로 하는 헬레니즘과 유대교를 뿌리로 하는 헤브라이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우리에게 소개해준 것 가운데 세상의 어떤 말로도 그 뜻을 옮기기 어려운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sabbath’입니다. 우리말로는 ‘안식일’이라고 옮겨놓았습니다만, 영어나 독일어는 사바트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자칫하면 안식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빈둥거리는 날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은 노동을 그치고 쉬는 것으로만 그 의미가 한정될 수 없습니다. 

어느 랍비는 안식일을 가리켜 ‘모든 인간의 왕 됨에 대한 기억을 회복하는 날’이라 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효율성과 속도를 중시하는 세상에서 뒤쳐진 사람들은 스스로 별 것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저 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몸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가 소명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하고 독자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함부로 살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메시지를 잃어버린 메신저”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사바트’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돌아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稟賦받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사바트’는 나의 왕 됨을 기억하는 날인 동시에, ‘다른’ 이들의 왕 됨도 또한 기억하는 날입니다. 내 마음에 는 차지 않아도 우리가 만나는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이 사실 하나를 마음으로 깨닫기 위한 기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식일은 그러니까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마음에 각인된 온갖 편당심, 차별 의식을 지우는 날이어야 합니다. 빈부, 학력, 피부색, 인종, 종교, 문화의 차이가 차별의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 속에 깃든 그런 마음을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땅의 주인

안식일의 의의는 안식년으로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주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 때에 그 백성들이 안식년을 꼭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 주가 쉴 때에, 땅도 쉬게 하여야 한다.”(레25:2b) 여섯 해 동안은 밭에 씨를 뿌리고, 포도원을 가꾸고, 그 소출을 거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일곱째 해에는 땅도 쉬어야 합니다. 밭에 씨를 뿌려도 안 되고, 포도원을 가꾸어도 안 되고, 밭에서 저절로 자란 것들을 거두어서도 안 됩니다. 거기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나 가난한 사람이 먹게 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합니다(출23:11).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점유(possession)와 소유(ownership)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을 점유하고 있을 뿐 소유할 수 없습니다. 땅 뿐이 아니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잠시 관리하고 있을 뿐 입니다. 관리인들은 하나님이 위임해주신 조건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진 것을 궁핍한 이들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는 것은 자선을 베푸는 게 아니라, 위임받은 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베푼다’는 말을 참 싫어합니다. 그 말 속에 깃들어 있는 자기만족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추수할 때 땅에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밭의 한 모퉁이는 남겨두라고 권고합니다. 그것은 그 마을에 몸 붙여 살고 있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의 몫입니다. 그들은 남은 것들을 자기 몫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굴욕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삶은 고단할지라도 그들은 인간적인 존엄성에 상처를 입지 않아도 됩니다. 

유대의 율법은 인간의 존엄함을 보호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축제일에도 부잣집 소녀들은 좋은 옷이 없는 소녀들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도록 빌린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아무도 공동체의 축제에서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종교 필수품의 가격을 낮추는 일에도 개입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차별이 사라진 새로운 세상의 꿈을 꾸던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좋은 사회는 인간의 기본권을 지켜주는 사회가 아니겠습니까?(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참조) 가끔 고아원이나 양로원, 혹은 이재민들을 찾아가는 이들이, 가지고 간 물건들을 쌓아놓고 기념 촬영하는 광경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볼 때마다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립니다. 물건을 주는 대신 그들은 받는 이들의 가슴에 굴욕감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임받은 이들이 명심해야 할 게 또 뭐가 있을까요? 그것은 주인의 것을 함부로 파괴하거나 거덜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잡지에서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 밀림의 훼손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쇠고기와 대두 값이 오르면서 사람들은 돈벌이를 위해 숲에 불을 지르고 그 자리에 콩을 심고 소를 방목하면서 숲을 황폐화시킬 뿐 아니라, 마호가니 같은 경질의 목재를 얻기 위해 나무를 마구 베어내고 있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을 위해 지구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한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숲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사람들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농장으로 들어와 밭을 황폐하게 만드는 코끼리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리포터가 한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코끼리들이 다 없어졌으면 좋겠지요?” 그러자 그 농부는 그렇지 않다면서 “사실 우리가 코끼리들의 땅에 들어와 사는 것이니까, 힘들더라도 같이 살아야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마음이 아닐는지요?


4. 거룩한 삶이란? 

안식일과 안식년 규정은 희년의 이상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다 아시지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 그러니까 50년이 되는 해에는 채무자들의 빚이 탕감되고, 종으로 팔렸던 사람들은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가구당 빚이 3960만원이나 된다지요? 특히 올 2분기에 들어서면서 가계 빚이 크게 늘어난 것은 2-3년 전에 주택을 분양받은 사람들이 중도금이나 잔금을 내야 할 시기가 닥치면서 대출이 늘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빚을 지고 산다는 것은 참 마음 무거운 일일 것 같습니다. 재산증식을 위해 일시적으로 빚진 거라면 그렇게까지 참담하지는 않지만, 불운이나 질병 혹은 갑작스러운 재해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가난해진 이들의 경우는 빚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희년은 주기적으로 빈곤과 악순환의 고리를 깨뜨림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하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지속적으로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의 빚을 탕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희년의 꿈이 역사 속에서 실현될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지정책일 것입니다. 

지금 정부는 조세제도를 바꿈으로써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경제가 운용되는 시스템을 정확히 모르는 저로서는 이 정책을 정밀하게 분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혹시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복지예산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저는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에 희년의 정신이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도 이런 것을 두고 종교편향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창조된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첫 장에서 몇 번씩이나 이 구절과 만나면서, 당신의 작품에 만족감을 표시하는 하나님의 흐뭇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연신 ‘참 좋다’라는 말을 연발하는 하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음이 절로 시원해집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 앞에 설 때 우리 입에서는 저절로 ‘참 좋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도덕적인 판단도, 미학적인 판단도 아닙니다. 그냥 외부의 풍경이 우리 존재 깊은 곳에 울리면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만큼 근원적입니다. 

성경은 창조의 한 주가 지난 후 맞이한 이렛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2:3b) 안식일은 복된 날이고 거룩한 날입니다. 나의 뿌리를 돌아보고, 나와 이웃 모두 왕적인 존재임을 깨달으니 복된 날이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새긴 채 새 날을 향해 길 떠나니 거룩한 날입니다. 종교적인 일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제일 하찮아 보이는 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위임해주신 일을 수행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거룩합니다. 거룩함이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의 1/7은 남에게 주어야 할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힘들어도 더 필요한 이에게 주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삶에 더욱 뚜렷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더’ 가지려는 마음이 지옥이라면, ‘더’ 주려는 마음은 천국입니다. 이 마음이야말로 우리에게서 염려와 근심, 당파심과 시기심의 구름을 걷어내는 햇살입니다. 이 아름다운 백로 절기에 우리 마음에 흰 이슬로 내리시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 참다운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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