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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그 다음(4) : 이 세상 풍조를 본받지 않는 삶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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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풍조를 본받지 않는 삶 (롬 12:1~2)


책을 읽다가 많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있어 소개합니다.
예루살렘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해발 800m의 산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감람산입니다.
이곳을 감람산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당연히 감람나무(올리브나무)가 많이 서식하게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산에 감람나무가 가장 많이 서식하는 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철조망을 쳐놓고 한국어로 ‘한국인들은 들어가지 못함’이라는 안내문을 걸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한국인 성지순례 객들이 그곳을 방문하면 닥치는 대로 감람나무 잎을 뜯어가서 감람나무들이 몸살을 앓고 또 어떤 나무들은 죽기까지 하기 때문이라는 것닙니다.

사정이 이런 데도 왜 성지순례 객들이 감람나무 잎을 그렇게 닥치는 대로 뜯어 가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뜯어온 감람나무 잎사귀를 코팅 처리해서 한국에 돌아와 선물을 해 주면 최고의 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으며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사역하셨던 현장들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삶의 흔적에 감사하는 여정이 아닙니까?

그런 귀한 은혜의 자리를 곱씹기 위해 떠난 그 자리에서 성지순례단의 이름을 갖고 여행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당국에서 금지한 법을 어기면서까지 감람나무의 잎사귀를 뜯어냄으로 인해 감람나무의 흔적의 씨를 말리는 행위는 말 그대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자들의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왜 이런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신앙적인 내용과 삶이 유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적인 내용과 삶이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로마서 12장 1-2절의 본문을 통해 이러한 유리되어 왔던 우리들의 신앙적인 모순들을 반성하며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주인공이 되었다면 적어도 이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를 질문하며 도전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3주 동안 세 가지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② 자기주장을 하나님 앞에서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함을 또한 알았습니다.
③ 동시에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 삶의 예배자가 되어야 함을 지난 주에 살폈습니다.

이성의 예배를 드리는 삶은 

Ⓐ 그리스도인들로서 세상에 대하여 합당한 예의를 지키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셈하며 사는 삶 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이러한 삶을 사는 실천적인 교우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로마서 46번째의 강해를 통해 이어지는 4번째의 요소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4.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은 로마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 권면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게 다가옵니다.
본문에 기록된 ‘세대’로 번역된 헬라어 ‘aiwn’(아이온)은 일반적으로 ‘kosmo"’(코스모스)라는 단어와 비교합니다.

‘cosmos'라는 세상은 공간적이고 현상적인 세상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aion’이라는 세상은 시간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권면을 ‘아이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세상은 영적인 세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성경 구절 하나를 소개합니다.

에베소서 6:12절을 보십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교우들에게 편지하는 글에서 세상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의 주관자들에 의해서 통치는 되는 곳’
바로 이러한 영적인 어두움으로 잠겨 있는 영역을 바울은 ‘아이온’이라는 세상으로 정의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신학적인 기초를 토대로 본문 1절의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라는 구절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풍조는 보이지 않은 세속적인 모든 총체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본문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해석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바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은 뒤에 반드시 명심하고 지켜야하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은 ‘본받지 말라’는 단어입니다.
‘본받다’라는 단어는 원어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주물로 생산하는 경우 똑같은 것이 나오지 않습니까?
바로 똑같이 생산되는 그것을 의미합니다.
정말로 세속적이고 마귀적인 것과 똑같은 그런 삶을 절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을 설교할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대한 지칭이 사도행전 11장에 나옵니다.
그 때 안디옥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주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안디옥 사람들이 이렇게 불렀습니다.

행 11:26절입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
이 표현은 안디옥교회의 지체들끼리 부르던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칭은 철저히 안디옥의 비그리스도인들이 부르던 호칭이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이해를 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구별되게 모여서 비밀스럽게 모임을 갖고, 성만찬을 인간의 고기를 먹는 행위로 알고 식인종처럼 그렇게 폄훼하였고, 남녀가 함께 모여 집단으로 혼숙하는 아주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인정하여 평가절하 시키는 호칭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안디옥 교회의 지체들은 이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이 때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갖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심지어 분열과 싸움으로 진흙탕과도 같은 고린도 교회의 교우들에게 편지하는 글에서 이렇게 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감을 갖고 강력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고전 4:1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이처럼 강력한 어조로 선포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주의 사도로 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영적인 자존감을 사수하던 바울과 같은 초대교회의 신실한 종들이 있었기에 1세기 초기 기독교는 부흥과 흥왕함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잘 아시지요?
우리 주님으로부터 정말로 사랑을 많이 받은 수제자입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하면 최고의 특권을 부여 받은 것과 진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 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 들어갈 때 주님의 붙잡히심에 두려워하는 모습이 누가에 의해 포착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 22:54절입니다.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멀찍이’라고 표현된 ‘makroqen’(막로센)의 의미는 그냥 멀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하여 멀리 있는 상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는 마지못해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어찌 보면 체면 때문에, 어찌 보면 그 동안의 함께 있었던 의리 때문에 따라갔다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마지못해 멀리 따라간 베드로가 그 다음에 취한 행동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처절하게 세 번이나 부인하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주님에게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발은 주님에게 걸쳐 놓고, 또 한 발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머뭇머뭇했던 베드로는 씻을 수 없을 정도의 치욕적인굴욕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금 더 확대하여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제 그래도 한 발을 걸쳐 놓았던 그 발마저도 완전히 주님에게서 빼어놓고 이제는 마음 놓고 세속의 풍조를 닮고 따라는 가는 것은 아닙니까?

부흥사 중의 한 유명한 부흥사 목사님의 설교를 우연히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본인의 교회의 대예배를 설교였습니다.
설교 중에 원고에 준비가 안 된 이야기를 하는 중에 같은 지방의 교단 목회자들과 배구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상업적인 부흥사들의 입 실수 중의 하나가 생각지 않은 단어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인데 그 날 그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끼리 경기를 하다가 저녁 식사를 위한 100,000 * 내기를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냥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툭 던졌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단어는 놀음판에서나 사용하는 용어임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것을 설교 중에 해명하고 그 실수를 주워 담으려고 노력하는 땀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소개한 책에서 밝힌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다이아몬드 세공 기술이 세계에서 최고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이스라엘 성지 순례단이 도착을 하면 가이드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수당이 올라가도록 하기 위해서 다이아몬드를 구입하도록 최고의 선전을 합니다.

하나님이 물질의 풍요로움을 주셔서 그 능력으로 다이아몬드를 이스라엘에서 사가지고 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나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이아몬드를 사고 난 뒤의 일입니다.
다이아몬드를 구입한 뒤에 현지 가이드들은 그 때부터 관광버스 안에서 그 다이아몬드를 인천공항에 가지고 들어갈 때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들어가는 비법들을 전수하기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밀반입 특강입니다.

그런데 그 버스 안에서 그 가이드가 부르는 호칭은 영락없이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입니다.
그렇게 성공하여 가지고 들어온 이 땅의 일명 크리스천들의 다이아몬드는 부지기 수입니다.

전에 시무하던 교회에서 부임 후 초창기에 목회를 할 때 교우들과 거제의 몽돌해수욕장으로 야유회를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버스를 대절하여 함께 다녀오는 시간에 마음이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부임 초기이기에 진해교회 교우들도 저를 잘 모르고 나도 그들을 잘 모를 때의 허니문 기간이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성도들의 모습은 이미 성도이기를 포기했습니다.
후에 벼락을 한 번 내려서 그 후부터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당시의 버스 안에서의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몽돌해수욕장은 백사장에 몽돌이라는 둥근 조약돌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것의 금기 사항은 몽돌을 반출하면 안 되는 데 갈 때 즈음에 주머니는 이미 두둑했습니다.
가지고 가기 위해 닫은 것입니다.
소위가 세상 사람들보다 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몰라서 그런다고 칩시다.
그러나 죄악에 대하여 민감해야하는 우리들은 오히려 세상의 풍조를 더 앞서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교우들과 공동목욕탕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온천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안에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지인들끼리 온 사람들이 상당수인데 그들의 언어소통을 들으면서 많은 부류가 교인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어 중에 교회에서 친숙한 언어들이 오고가는 어간,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알아들 수 없는 방언과도 같은 은혜의 수사 어구들이 오고가는 과정에 온천물이 나오는 수도꼭지에서 면도를 할 때, 머리를 감을 때 누구하나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본인들이 사용하던 비누거품이 묻어 있는 수건을 수건수거함에 넣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는 은혜, 사랑, 능력의 단어들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세상 풍조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목욕탕에서의 일련의 일들이 한국교회의 현 수준임을 부인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백성들은 찬송가 490장 3절의 찬송을 어떻게 부를 수 있습니까?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은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다.

이율배반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앞서 설명 드린 ‘본받다’로 번역된 헬라어 ‘suschmatizw’(쉬스케마티조)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sun’(쉰:∼ 과 함께)라는 단어와 ‘schma’(스케마: 품행, 행동, 외형, 모양)라는 단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모든 모양조차도 닮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국 서진(西晉) 때의 문신학자인 부현(傅玄)의 ‘태자소부잠(太子少傅箴)’에 나오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故近朱者赤 近墨者黑” 
“붉은 모래(朱砂)를 가까이 하면 붉게 되고, 먹을 가까이 하면 검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함께 곱씹어야 하는 명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생각할 때마다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적입니다.
그 은혜를 받고 사는 우리들이라면 우리는 구원 그 다음에 이 세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아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은혜가 삶으로 실천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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