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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삶의 원칙(롬 1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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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삶의 원칙(롬 13:8~14)
 

우리가 가진 경전인 성경은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표준이고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는 믿음의 기준입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인간의 신앙과 삶의 표준으로써 성경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과함이 없습니다. 그 성경의 핵심 가르침이 10계명이요 10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대강령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2:34-40). 이웃 사랑에 대한 그 핵심이 율법이요, 계명들입니다. 이 율법과 계명들에서 가르치는 핵심이 사랑인데, 이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여러 율법과 계명들에서 가르치는 사랑을 완벽하게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이 후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또한 몸소 실천하신 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본문 로마서 13장 8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핵심은 사랑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하였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 내용이 나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무엇무엇을 하라는 말씀과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십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을 한 단어로 말하면 그것은 역시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아래로 수평적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사랑은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오늘은 이런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들의 심령과 가정과 삶의 터 위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사랑이 가득하게 되기를 축원 합니다. 민족의 대 명절인 한가위를 앞두고 점점 더 건조해지는 인심에다 어려운 경제사정이 우리를 더욱더 힘들게 합니다. 오늘 주시는 이 말씀으로 이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 사랑은 인간의 삶의 원칙입니다. 

8절의 말씀을 보시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반과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인생의 기초요 삶의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고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은 열어 놓으셨습니다. 즉 이웃 사랑의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그 이웃을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에 대하여 한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0장 25절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웃이 누구이며 그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10:25-37). 

진정한 이웃 사랑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타인의 필요에 의해 자신을 내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한다 하면서 간음하고,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이웃이 가지고 있는 것을 탐내면 되겠습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모든 율법을 다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사랑할 것인가? 성경은 원수까지라고 말합니다.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음식을 주고, 원수가 목마르다고 하면 마실 물을 주고, 원수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 주고, 원수가 겉옷이 없다고 하면 속옷까지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원수는 물러가라. 한번 원수면 죽을 때까지 원수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삶의 힘이 되고 활력이 되고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실천하는 사랑, 행동하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살도록 노력하기를 원합니다.


둘째, 사랑은 종말론적 신앙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11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하여 말하다가 이제는 종말에 대하여 진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왜 종말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대단히 의미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종말론적인 진지함과 긴박감 속에서 살아야 함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천국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최종 구원이 임박한 줄 알고 그것을 예비하는 자세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 윤리를 실천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깨어라 명하고 있습니다. 천국 시민이요 그리스도인으로 깨어 있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입니다. 세상의 끝이 임박한 때입니다. 심판의 때이며 그리스도인이 들림 받는 그 때입니다. 이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바로 이런 종말론적 의미에서 긴박감과 위기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깨어 있어야 된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어야 할 모습에 대하여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한다 함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이 있는 삶의 자리에서 거룩함과 경건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둠에서 방황하고 헤매며 길을 잃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도는 거룩한 빛을 비춰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 길을 온전히 가도록 인도하는 향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과 의로운 삶과 진실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용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착한 행실과 바르고 의로운 행위와 진실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신용도 회복을 위해 우리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성도들이야 말로 종말론적 신앙으로 살아가야 하리라 봅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어둠의 시대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지켜야 할 삶의 기본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아야 한다. 음란과 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쟁투와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악행을 절대 피하여야 함을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로마 시대에는 귀족 유부남이나 귀부인이나 가릴 것 없이 여러 명의 부인이나 정부를 두고 살았습니다. 또한 한계점에 넘어선 권력 투쟁과 도를 넘어 극에 달한 파벌 의식이 만연하였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원수처럼 얼굴을 돌리며 살았습니다. 세인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후손들이나 뜻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화살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너무 너무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바울은 성도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세인에게서도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사람이 옷을 입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듯이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야 함은 당연한 원칙입니다. 세상이 어둡고 혼탁하며 악에 빠져 있을수록 성도는 더욱 반듯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옷이란 무엇입니까? 낮에와 같이 단정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건함과 거룩함과 절제 속에서 그러면서도 활성화된 모습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사회속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향기요 빛과 소금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2008년 우리교회 표어와 같이 소금 같은 빛 같은 교회되게 성령께서 도우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 것입니까? 

마지막으로 이렇게 이론적으로 무장이 되었으면 실천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려는 한 마디는 종말의 시대를 사는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신령한 삶을 살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천국 시민이기에 이 세상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허랑방탕하게 사는 사람들과 달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에 두 가지 표준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모습이고 또 하나는 성령의 능력 안에 사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높은 보좌를 포기하고 자신을 비우며 낮아짐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사시고 몸소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천국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설교입니다.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알되 믿음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먼저 믿는 사람들이 오늘도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예수가 구세주라고 전해야 합니다. 말로써도 전하고 행함으로써도 전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말로 전도지 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향기로운 삶이며 진실한 빛과 소금되어 사는 모범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믿겠습니까? 초대교회 같은 기적 아니면 행함입니다. 바른 교회, 바른 행함은 교회가 반드시 행해야 할 일입니다. 대형 교회를 욕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을 욕하지 말고 나 자신을 냉정하고 철저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며 오늘도 강도 만나서 신음하는 이들을 찾아 돌보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하는 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고 그렇게 살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부어지게 되고(롬 5:5) 우리 마음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신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갈 5:22-23).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율법의 요구까지도 충족하며 살 수 있다(롬 8:4; 갈 5:16-18). 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의지나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힘입게 됩니다.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주의 일을 하라. 인간의 의지나 지식이나 기술이나 경험으로나 힘으로 하지 말라.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령을 의지하라. 성령의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이끄시게 하라. 교회의 운영도, 가정의 화목과 행복도, 국가의 안녕과 평화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성령의 충만하신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I have a dream’이라는 강연에서 백인과 흑인이 같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꿈을, 백인과 흑인의 자손들이 같은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는 꿈을, 백인과 흑인이 같은 수영장에서 같이 수영하고 아름답게 어울려 노는 꿈을 꾸고 그동안 백인이 흑인에게 저질렀던 추악한 과거를 사랑으로 잊고 사랑으로 용서하며 한 가족으로 함께 살 것을 꿈꾸며 노래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특별히 열매의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이 절제입니다. 왜 하나님은 절제를 마지막에 편집하게 하셨을까? 사랑과 절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사랑이 지나치면 분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절제력 있는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에 절제가 들어가야 합니다. 충성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절제가 없으면 과잉 충성이 됩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루고 절제로 지나침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에 의하여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초대교회처럼 칭찬 듣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젊은이들이 하는 사랑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에로스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불사르고 내어 줄 수 있는 가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허다한 이웃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감싸고 치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세를 맞이하여 종말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 사도는 삶의 표준이요 고상한 가치로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애인을 위하여, 이 땅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물질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철모르는 물질주의자들을 위하여, 거대 기업과 거대 교회들까지도 포함하는 맘모니즘에 사로잡힌 우상 숭배자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롭게 될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소망하면서 끝까지 이런 모습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요즈음 기도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 나로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교단의 현실 문제나, 제 개인의 목회나 주변의 일들에 대하여 그냥 체념하려는 듯한 자신을 발견하고 열심히 기도 합니다. ‘주님, 나로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으로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목사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기도하며 삽시다. ‘주님, 나를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 사랑의 책임을 다하는 빛 같은, 소금 같은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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