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아름다운 만남 (행 18:1~4)

  • 잡초 잡초
  • 649
  • 0

첨부 1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아름다운 만남 (행 18:1~4)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한 공연장에서 지휘를 마치고 팬들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되자 그를 좋아하는 팬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레너드 번스타인 선생님, 수많은 악기 중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악기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재치 있는 말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제2바이올린입니다. 제1바이올린을 훌륭하게 연주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은 참으로 구하기 어렵습니다. 

프렌치 호른이나, 플루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연주자는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 줄 제2연주자는 너무나 적습니다. 만약 아무도 제2연주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음악이란 영원히 불가능하지 않겠어요?" 참 의미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요즘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인생의 무대 위에 서서 주연이 되고 싶어합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청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인생 무대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 무대를 밝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주연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아도 조연이 되고 싶은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조연 없이 감동적인 영화를 만들 수 없으며, 훌륭한 연극, 탁월한 드라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대가 빛나는 것은 주연을 위해 헌신하는 조연과 엑스트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안도현이라는 시인은 다른 사람이 빛나도록 배경이 되어 주는 '안개꽃과 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안개꽃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장미나 다른 화려한 꽃을 돋보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안개꽃과 같은 인생을 산 사람들이 나옵니다. 2절입니다. "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자!! 여기 누가 나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 부부 역시 상처가 많은 인생들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소아시아 본도에서 출생한 유대인 부부입니다. 그들이 로마로 이주해서 로마에 살았으나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을 다 ?아낸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돼서 온 것이 고린도 도시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장막 치는 일이었는데 이들과 동일한 일을 했던 사도 바울을 고린도에서 만난 것입니다. 같이 교회를 다녀도 부부가 한 믿음이 되고 같이 헌신하기가 어려운데 이들은 모든 것을 다 잃고도 한마음이 되어 바울이 가는 곳마다 다라 다니며 그의 사역을 도왔던 것입니다.

지난주도 보았지만 사도 바울의 아덴에서의 전도는 그다지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철학적으로 전하니까 사람들이 별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을 비웃으며 조롱하고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 말쟁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결실을 거두지 못했을 때, 그 마음에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바울이 아덴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고린도라는 도시에 들어오게 됩니다.

막상 고린도에 들어섰지만, 이 도시는 한 마디로 세속화된 도시입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도덕적인 기준을 포기한 채로 매우 세속적인 죄에 몰두하는 삶을 산는 사람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무역항을 끼고 발전하던 상업도시로서와 로마의 검투 경기를 수용한 스포츠 오락도시의 영향으로, 고린도 시민들은 황금과 오락에 빠져 죄의 안락한 심연으로 빠져들어 있었습니다. 이 세손에 찌들고 병든 죄악의 도시 한 복판에 서 있는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당시 그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느냐면 18:8-9절에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보세요. 그가 얼마나 두려움에 빠져 절망 가운데 있었으면 주님이 한밤에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셨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을 믿어주신 하나님의 변함 없는 은혜 앞에 복음을 들고 정말 열심히 살았지만, 몇 번의 문제를 만나는 동안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감을 갖게 되었고, 그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비단 바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여기 모인 우리 역시 얼마든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안에 그 당당하던 모습도 그 멋있는 비전도 다 잃어버린 채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그 당시 어떠한 상태였는지를 훗날 당신이 개척을 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한 통의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그는 편지 속에서 옛날에 고린도 도시에 들어갔을 때의 일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고전 2:3절에 보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에 있을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아무리 읽어도 너무나 솔직하고 처절한 고백입니다. '너희 가운데에 있을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얼마나 솔직한 고백입니까?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바울은 지금 2차 전도 여행 중에 있습니다. 당시 바울이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영적인 불모지입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수치를 당했습니까? 그래도 그 가운데 하나님이 예비해 둔 영혼들이 돌아 올 때 그는 다시 힘을 얻곤 했습니다. 그 한 영혼의 기치 때문에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않은 채 밤낮 뛰어 다녔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영적 싸움은 그의 피를 마르게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 과정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탈진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탈진을 영어로 'burnout'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 타서 없어진 상태' 말합니다.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마슬락'은 '약이 다 달아진 건전지와 물이 다 증발한 주전자'에 비유했습니다. 이 탈진은 몸의 기력이 빠지고 마음의 극도로 쇠약해지고 영혼이 극도로 침체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서 바울은 이 아름다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남으로 그는 사역에 엄청난 힘을 얻은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은 롬16장에서 이들 부부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아주 의미 있는 메시지 하나를 남깁니다. 16:3-4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이들 부부를 자신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권적인 사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동업자라고 말하고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을 동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숭고한 목적을 위해 함께 희생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동역자란 영어에 helper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로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함께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인물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일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선택하실 때도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전도하러 보내실 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함께 일할 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지만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홀로 생각하고, 홀로 걸었습니다.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지 못했고 마음을 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보조를 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사역의 효율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 일할 때보다 함께 일할 때 훨씬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함께 일할 때 상승효과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보통 말 한 마리가 끌 수 있는 짐은 대략 7,000파운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두 마리가 동시에 함께 끌 때는 대략 1만 4,000파운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팀을 구성하여 적절한 훈련을 시키면, 두 마리의 말은 2만 5,000파운드의 짐을 끌 수 있습니다. 이는 한 마리가 끌 수 있는 짐의 세 배가 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너지, 즉 상승효과의 위력입니다. 상승효과는 둘 이상의 사람들이 협동하여 작업한 결과가 각 개인의 작업한 결과의 총합보다 더 큰 결과를 낳는 현상입니다.

바울은 우리 신앙생활의 원리를 "서로 서로"의 원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서로 서로를 지원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이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순종하고 실현하는 동역자로서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동역자의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롬16:4절에 보면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여기 목을 내 놓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울을 위해서라면 물질도, 심지어 생명도 아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위하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하는 것이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진 부부였기에 바울을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인물들입니다. 목이라도 대신 내어놓고 싶을 정도로 존경하고 사랑할 만한 사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행복한 자들입니까?

여러분! 이들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함께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누가 이들의 앞길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역을 하면서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이들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안개꽃 같은 사람입니다. 모두들 자기를 나타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시대에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돋보이도록 뒤에서 이름 없이 받쳐주는 안개꽃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답다 할지라도 안개꽃이 뒤에서 받쳐줘야 그 꽃이 훨씬 더 돋보이는 법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어디서나 누구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 혼자 있을 때보다는 여럿이 어우러져 있을 때에,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이 드러날 때에 더욱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섬김은 바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까지 감사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헌신하는 한 사람 때문에 가정이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하고, 이들을 통해 복음이 온 땅에 퍼져 가는 아름다운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자기의 인기, 체면 ,목표보다도 주님의 사역이 더욱 활발 하기를 원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여러분은 이 사람들이 그립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면, 주의 교회가 좀더 부흥될 수 있다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주를 섬기리라"고 살았던 부리스가와 아굴라,

그들에게 있어서 자기 의나 체면이 세워지는 것, 그것은 그의 일차적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 역시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의 일이 부흥되기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승리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했던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원했던 사람, 그리고 자신들의 섬김을 통해서 그 섬김 속에서 세워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부리스가와 아굴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라면 자기는 조용히 사라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더욱 필요로 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울보다는 아마도 부리스가와 아굴라일찌도 모릅니다.

며칠 전에 이런 훈훈한 기사 하나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한의학계 원로인 류근철 박사가 KAIST에 578억 원을 기부하였습니다. 류 박사는 서울 잠실의 부인 명의 아파트 한 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과학기술 발전과 인재 양성에 써 달라”며 KAIST에 기부했습니다. 그가 기부한 액수는 대학 기부금 사상 최고액입니다. 단순히 액수만을 따진다면 그가 기부 액수는 국내 대학 중 기부금 수입이 가장 많다는 고려대와 연세대가 지난해 거둔 기부금의 총액보다 많습니다.

류 박사는 '전자침술기', '‘추간판 및 관절 교정용 운동기구' 등을 개발해 국내외 특허를 여러 개 취득하고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96년 모스크바국립공대 종신교수가 되었습니다. 578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거금을 기부했다니까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류 박사는 스크루지 같은 자린고비의 삶을 살아 왔습니다. 찌는 듯한 올해의 무더위에도 그가 숙소와 사무실로 겸하여 쓰는 아파트에는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습니다. 이발소에 가서도 머리만 깎고 면도는 집에 돌아와서 합니다. 장롱과 침대를 빼고 모든 가구는 낡은 물건을 자신이 직접 재활용한 것들입니다. 고물 쇠판과 나무는 책상으로, 남이 쓰고 버린 털조끼는 방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1만 원에 네 개를 주는 넥타이를 시장에서 구입하여 맵니다. 그는 평생 통장에 돈을 넣을 줄만 알았지 뺄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은 돈 578억 원을 내놓으면서 그는 "이것은 내 돈이 아니라 청지기인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관리한 돈"이라고 말했습니다.

류박사가 한 말 "이것은 내 돈이 아니라 내가 관리한 돈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비로소 그 말이 진실인 것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주인의 물건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지나지 않음을 미리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어찌 물질뿐이겠습니까? 내 인생 자체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선한 일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섬김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인간의 성공은 은혜를 아는데 있고 은혜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아는데 있고 은사를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기는 삶이 최상의 가치를 사는 길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니에요. 얼마를 베풀었느냐. 당신은 얼마를 섬기며 살았느냐. 이걸 묻고 싶어요. 이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어떤 자리에 섰든 나의 만남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우리에게도 일어 나야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정말 바울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준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만남의 진정한 가치는 함께 삶을 살기 위해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나옵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최초로 하나님과 동행했던 인물입니다. 창5: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여기 동행한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어 함께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누리는 것, 곧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함께 동행할 줄 알고,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또한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할 줄 압니다. 더불어 일할 때 혼자 일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역의 원리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혼자 일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일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함께 일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과 함께'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뜻도 모르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으로 함께 일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이 시대의 부리스가와 아굴라가 되기 위해 주님 앞에 절대의 헌신을 결의 할 용의는 없으신지요?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저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좋은 목사도 필요하고 직분자도 필요하고 은사 있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필요한 사람은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이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은혜 앞에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