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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이 임하는 교회 (행 2: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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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행 2 : 37 - 47
제 목 : 부흥이 임하는 교회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지는, 일반적인 소망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는 축복이고, 또 하나는 부흥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개인적인 신앙생활과, 공동체적인 신앙생활, 이렇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가지는 소망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고, 공동체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가질 수 있는 소망은, 부흥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두 가지의 소망을, 항상 품고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소망은, 따로 구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이 두 가지를 따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축복과 교회의 부흥은, 별개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성도들 대부분이, 개인적인 신앙생활 속에서의 축복을 이루기는 힘쓰지만, 교회 공동체로서의 신앙생활 속에서 소망해야 될, 이 부흥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등한시 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 가운데, 교회 부흥을 소망하지 않는 성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선순위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축복이 먼저이고, 교회 부흥은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복을 받아야, 교회 일에 힘쓸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교회도 부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생각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생각에 여러분도 동의하십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별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생각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개인에게 임하는 축복이, 누구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왜 교회를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까?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누구의 피 값입니까?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교회를 가장 아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교회를 통해서 모든 축복이 세상에 흘러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축복입니까?   먼저는 영혼 구원의 축복이고, 그 다음은 육신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통한 축복은, 육신의 축복이 먼저가 아니라, 영혼 구원의 축복이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벧후 3 : 9절 말씀을 보세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소망은 유일합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다 구원을 받는 일인 것입니다. 

이 영혼 구원의 사역을, 무엇을 통해 이 세상에 펼쳐 나가시기를 원하시는가?  교회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란 무엇입니까?  에클레시아, 성도들의 모임이지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  이라는 것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그 속에 모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향한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자 할 때에, 하나님이 과연 누구를 들어 이 일을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인 줄로 믿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구원 사역을, 펼쳐 나가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를 축복해 주시느냐?   

이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성도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명 살리는 일이 힘쓰는 성도들을 축복해 주시되, 가장 먼저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생명 살리는 일에 헌신하며 앞장 서 나갑니다.  그래서 교회가 새로운 생명이 넘치는 가운데, 성장하고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처럼 성장하고 부흥하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기쁩니다.  흡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교회 성도들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지고,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신앙생활 하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님 앞에 즐거이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부흥과, 성도들 개인의 축복은, 자연스럽게 연결 될 수밖에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우리 성도들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를, 이제는 바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부흥하고 성장했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  입니다.  오늘 본문 47절을 보세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매일같이 교회 안에 구원받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매일같이 교회 안에, 전도되어 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일같이 전도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보세요.  이렇게 성도들이 매일같이 전도하러 나가니, 어찌 그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장하지 않고, 부흥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이 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43절 말씀을 보세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무엇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까?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기사와 표적을 통해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어떤 역사가 일어났겠습니까?   

여러 가지 역사들이 많이 일어났겠습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물질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오늘 본문 44절, 45절 말씀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했습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단순히 그들의 믿음이 좋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이렇게 구제활동을 벌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자기 창고가 넉넉할 때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나, 구제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먹을 것도 부족한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유를 나눈들, 무슨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오히려 더 궁색해지고, 더 근심이 늘어갈 것입니다.   왜요?  나누는 만큼 더 소유가 적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는, 전혀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기쁨의 생활이 이어지고 있고, 더  즐거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46절에 그들의 삶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이렇게 함께 나누고, 이웃을 위해 구제해도,   전혀 궁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들이 받은 물질의 축복이 너무나도 풍성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매일같이 전도하면서 생명 살리는 일에 수고하니,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해 주시는데, 매일같이 물질이 넘치는 축복으로 역사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쓰고 나눠주는데도, 계속해서 풍성해집니다.  
그러나 얼마나 신앙생활 하는 것이 즐거웠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가 이렇게 기쁨 속에서, 날마다 성장하며, 부흥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성천교회 안에도 이런 놀라운 축복의 역사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면 무조건 전도만 하면, 성도들이 복을 받고,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전도하면,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들이 복을 받는다고 하고서는, 이제 와서 왜 또 딴 소리냐?    

흉내만 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를 하는데, 왜 실패 합니까?  왜 부흥하지 못하고, 성도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흉내만 내기 때문인 것입니다.  흉내만 내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흥과 성장의 원리, 축복의 원리, 표면적으로 드러난 모습보다는, 그 내면에 있는 과정, 원리를 발견하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데, 원리는 생각지 아니하고, 그 과정도 생각해 보지를 않은 채로, 그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따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부흥하는 원리와 과정, 또 성도들이 복을 받는 원리와 그 과정,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전도하는 모습 속에, 먼저 있어야 할 것과, 나중 있어야 할, 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두 가지를 겸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런 부흥의 역사나,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무턱대고 전도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를 함에 있어, 그 전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믿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전도를 하는데, 한번 설교로 3,000명이 회심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40절, 41절 말씀을 보세요.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할렐루야!!!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한 번 설교로, 3,000명을 전도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슨 대단한 설교를 했습니까?   여러분, 36절 말씀을 보세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한 설교입니까?   이정도 설교는 베드로만 아니라, 사도들이라면 누구라고 할 수 있는 설교인 것입니다.  

사도들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사도가 아닌 일반 성도라 할지라도,   은혜 받은 성도라면, 또 예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성도라면, 누구라도 이런 설교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의 내용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역사가 일어났던 것일까?   설교의 능력도 아니요, 전도의 열심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런 부흥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일까?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기도의 능력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사도행전의 핵심 되는 구절이 무엇입니까?   행 1 : 8절 말씀 아닙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멘!!! 
내 증인이 되리라.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곧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전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성령이 임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성도들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성도들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아가는, 능력의 전도자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한번 설교에 3,000명씩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날마다 전도하며, 구원받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무엇을 통해서, 이런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까?   오직 기도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그들이 주님이 하신 행 1 : 8절 말씀을 듣고, 곧 바로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 2 : 1 - 4절까지 말씀, 다같이 찾아서 읽어 봅시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할렐루야!!!   그들이 마가 다락방에서 모여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기도했더니, 오순절 날에 이런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부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기도하는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 각 사람 위에 성령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담대한 전도자가 되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방언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흥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던,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오늘 우리 성천교회 성도들도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에, 비로소 교회 부흥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기도와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기도가 먼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전도는, 물 없는 오아시스요, 앙꼬 없는 찐빵인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전도에는, 생명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전도에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3,000명이 아니라, 3명도 회심시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도 이전에 늘 기도했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무시로 기도했습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요?  전도할 목적을 가지고...   믿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를 주님이 축복해   주셔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넘쳐나도록 만들어 주셨고, 또 초대교회   성도들을 축복해 주셔서, 그들의 삶에 여러 가지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천교회 성도들도, 기도함으로 이런 교회의 부흥과, 축복을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바로 부흥의 열쇠인 것입니다.  
암만 전도해도, 기도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스스로가 지쳐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에 재미가 없어요.  전도하라고 하면 겁부터 납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 말만 들어도 짜증냅니다.  

실제 그렇잖아요.  이제 곧 새 생명 축제가 시작 될 텐데, 이런 분위기가 슬슬 돌고 있습니다.  또 전도 소리 나오는구나.  그런데 안 할 수 있습니까?  
전도하지 않고, 어찌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전도하지 않고, 어찌 교회가 성장할 수 있고, 부흥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전도하자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자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전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자리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요기도회에 나오세요.  새벽기도회는 못 일어나면 못 나오지만, 금요 합심 기도회는 잠 안 자면 나올 수 있습니다.  

“거리가 멀어요.”  거리가 먼데, 오늘은 어찌 예배에 나오셨습니까?  
“집에 돌아가면 너무 늦어요.”  그러면서 왜 직장과 사업장에서는 밤을 세서 일하십니까?   우선순위인 것입니다.  가치의 문제인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여러분의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기도에 여러분의 신앙의 최고 가치를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전도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반드시 일어납니다.  주님이 기도하면서 전도하는 교회는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믿습니까?  
47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누가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까?   주께서.... 
주님이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수고와 전도하는 노력을 보시고, 축복해 주시는 데, 교회의 부흥을 일으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을 축복해 주셔서, 날마다 삶 속에서 기이한 표적과 기사들을 많이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아니 성천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이와 같이 전도를 목적으로 기도하는 신앙을 통하여, 우리 성천교회의 부흥의 축복과, 성도들의 삶의 축복을 동시에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그러면 두 번째, 전도하는 모습 속에, 나중 있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을 향한 나눔과 섬김, 구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회 안의 공동체 속에서만, 이런 나눔과 섬김이 있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왜 이런 오해를 하게 되느냐?   오늘 본문 44절 말씀 때문인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누가 다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까?  믿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 성도들  끼리만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초대교회 성도들 간의 이런 아름다운 교제가 분명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눔과 섬김의 모습이, 꼭 성도들 간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7절에 보면,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온 백성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교회 성도들이 아닌, 교회 주변의 사람들, 다시 말해, 아직까지 예수를 주로   영접하지 아니한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을 칭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칭찬을 했을까요?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칭찬했을까요?  유대인들은 예수를 핍박하고 배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며, 성도들끼리 나누고 섬기는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칭찬하겠습니까?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이유였을까요?  

유대인인 자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는데, 예수를 믿는 성도들끼리만 나눈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이런 나눔과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그들이 감동을 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을 칭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의 효과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효과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유대인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생리가 어떻습니까?   전도하는 것을 달갑게 여겼겠습니까?   그들 가운데는 목숨 걸고, 예수를 증거 하는 성도들을 없애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전에 그러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이 숨어서 신앙생활을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어찌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여서 예배했겠습니까?   또 어떻게 그런 분위기 속에서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이런 유대인들을 향한 섬김과 구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알아도 모른 척 한 것입니다.  굳이 전도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신들을 섬기는 그 모습 때문에...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모른 체 해 준 것이 아니라, 실상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받은 물질의 축복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이 역사하신 일인 줄로 믿습니다.  모든 일이 다 물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 속에서,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아보는 그 신앙 중심을 기뻐하셨기에, 완악한 유대인들의 마음을 이렇게 유순하게 만들어 놓은 줄로 믿습니다.  

또 한 가지의 효과는 무엇입니까?  그 완악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47절에,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는데, 그 구원받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어디 이방 사람이겠습니까?   외국인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회심한 3,000명도 다 유대인들이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이런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까?   바로 유대인들을 향한 사랑의 섬김과, 구제 때문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가 더 왕성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어떤 교회가 전도가 잘 되고, 또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합니까?   지역 주민들을 향한 사랑의 섬김과 구제가 있는 교회가, 이런 놀라운 부흥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눅 6 : 38절에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지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아멘!!  주라는 것입니다.  베풀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해?   먼저는 함께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을 향해 내 소유를 나누고 섬기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지역 주민들을 구제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라는 것입니다.   이런 구제와 섬김으로 그들을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성천교회를 향한, 아니 한국교회를 비롯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안 됩니다.  잘 안 됩니다.  너무 인색합니다.  성도들 간에도 그렇습니다.  인색한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습니다.  저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에만 열중합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여럿이 있는데, 한 자녀가 좀 잘 나서, 재물을 많이  모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자녀가, 그 많은 재물로 다른 형제들을 섬길 줄 모릅니다.  자기가 수고해서 모았으니, 자기만 써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괘씸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어디 지가 잘 나서 벌은 것입니까?   부모가 키워 줬고, 또 자기 사업 잘 되도록 후원해 주었기에 그만큼 성공한 것인데, 그런 은혜도 모르고, 그저 지가 잘 난 줄 알고, 다른 형제들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업신여기기까지 한다면, 그 자식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을 향해 계속적인 후원을 하겠습니까?   나중에 유산인들 제대로   물려주겠습니까?   안 주는 것입니다.  차라리 다른 자녀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한 지체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된 성도들을 향해,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더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교회 성도들이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지역 주민들을 섬기며 구제하게 되면, 하나님은 더 크게 기뻐하시면서, 그 교회를 축복해 주셔서, 부흥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나도 힘든데 내가 누구를 도와 주냐?”  “우리 교회도 힘이 든데, 어찌 지역주민들까지 구제 하냐?”   그러면 백날 그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부흥은 생각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축복도 생각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재미가 있겠습니까?   즐거이 헌신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겠습니까?  그래서 계속 침체되고, 정체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흥의 원리나, 축복의 원리는, 먼저 심는 것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로 먼저 심으시길 바랍니다.  새벽마다, 금요일마다 심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인생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도들과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으로, 먼저 심으시길 바랍니다.  

심으면 도로 납니다.  그냥 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도를 목적으로 심는 교회와 성도들은, 놀랍게 부흥하게 되고, 기인한 표적과 기사 속에 놀라운 물질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초대교회와 성도들이 그러했고, 또 오늘날도 놀랍게 부흥하며 성장해 나가는 교회들을 보면 그러합니다.  
이런 귀한 축복, 우리 성천교회와, 우리 성도들도 다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8월도 절반이 지나갑니다.  무더운 여름도 곧 지나가고, 가을의 문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가을을 흔히 결실의 계절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모든 만물들이, 다 결실을 맺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천교회도, 또 속한 모든 성도들도,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특별히 기도로 심는 가운데, 물질의 섬김과 구제로 심는 가운데, 다가오는 가을에 생명의 결실을 맺고, 축복의 결실을 맺어가기에 부족함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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