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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뢰와 사랑과 교제의 소통 (마 2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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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와 사랑과 교제의 소통 (마 26:6~13)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의 내용과 그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한 여인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평가와 예수님 자신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여인의 행동을 보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본문 8-9절)

한 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본문 10절)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하신 것을 보면 제자들이 그저 단순히 “그 향유를 많은 돈을 받고 팔았으면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줄 수 있었을 걸” 하며 아쉬워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여인을 향해 바보다, 멍청이다, 미련하다, 정신 나갔다,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저의가 뭐냐? 하며 여럿이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야단치며 욕지거리까지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여인이 그렇게 행동한 뜻을 잘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본문 12절) 하셨으며 더 나아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본문 13절)고 극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는 달리 이 여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고 있었고 그의 죽음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 여인에게 있어서 주님께는 아무리 귀한 향유 한 옥합이라 할지라도 아까울 것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 값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다 부은 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감히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주님은 존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곧 예수님을 가장 수치스러운 형틀인 십자가에 매달고 그 몸을 갈기갈기 찢어 내던질 것이지만 이 여인은 그 몸이 이 세상의 제 아무리 비싼 향유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하신 주님의 몸임을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그 주님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 그것은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일보다 우선하며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밝히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지만 그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온 인류를 살리시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안다면 그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따라서 그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그의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를 이해했기에 언제나 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역사에 단 한 번뿐인 죽음, 그러나 단번에 세상을 구할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런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아끼지 않은 행위는 이 세상에서, 아니 온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보다 우리에게 더 귀하고 중요하고 복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선언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셨는데 여기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여인의 행동이야말로 복음의 선포였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이해가 되지 않을 여인의 그 행동이 바로 말없는 복음의 선포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것 아닙니까?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위하여 장례를 미리 준비한 그 여인의 행동은 곧 복음을 선포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막상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서는 예수님의 생각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한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서는 완벽한 소통을 보는 이 사실에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 사이의 소통의 비결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 여인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여인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요12:1-3을 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그 여인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삼남매 중의 마리아였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그들의 집에서 머무실 정도로 한 가족처럼 친근한 사이였습니다. 

요11:3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전하기를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요한은 요11:5에서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었고 그래서 온 동네가 슬피 울고 있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고 사람들은 말하기를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했다고 요11:33-36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기사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집에 들르신 어느 날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준비하는 일이 많아 혼자서 마음이 분주하던 마르다가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신 일입니다(눅10:38-42). 

이 이야기는 이 삼남매와 예수님이 얼마나 친근한 사이였는지를 잘 말해주며, 특히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의 말씀 듣기를 그 무엇보다 좋아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의 죽음이 어떤 죽음일지를 열두 제자보다도 더 바로 알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관계로부터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특별한 신뢰와 사랑과 교제의 관계 속에 있었으며 그것이 남들이 갖지 못한 예수님과의 완벽한 소통의 비결이었으리라 봅니다.

창11:1에 보면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합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가 끝나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명령대로 온 땅에 퍼져 번성하기 위해 동방으로 이동하던 그들이 기름진 시날 평야를 만나자 생각을 돌이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했습니다(창11:2-4). 

그래서 거기에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 그 탑이 하늘에 닿게 하려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막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창11:6-9).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불통하게 된 역사의 시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인간에게 닥친 불통의 문제는 하나님께서만 푸실 수 있으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화평과 하나 됨을 이루시려고 보내신 이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 사이의 소통의 주로 오신 것입니다. 오직 그 안에서만 소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불화와 반목과 갈등이 그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그를 통한 변화만 있으면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교만과 불순종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불통을 가져왔고, 탐욕과 미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통을 일으켰습니다. 그 이후 인간사회는 불통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남녀 간의 불통, 인종간의 불통, 계층 간의 불통, 세대 간의 불통, 이념간의 불통, 종교 간의 불통이 자리 잡은 세상입니다. 이 불통은 곧 개인과 사회집단과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오해와 갈등과 혐오와 전쟁의 역사를 반복해서 만들어왔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처럼 불통의 답답함을 느끼는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과 불통하는 상황을 타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제 이 불행한 각종 불통의 역사를 청산하고 소통하는 세상, 소통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소통의 열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소통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신뢰하며 사랑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와 소통의 길이 되셨습니다. 또한 그는 할례 받은 이스라엘과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즉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을 가까워지게 하시고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시며 화평하게 하시는 이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엡2:11-1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지혜를 얻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같은 사건, 같은 현상을 두고도 생각이 다르고 보는 눈이 너무나 달라 소통이 안 되는 일이 허다한 오늘날의 세상입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 특히 그렇습니다.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불신 사회, 사랑이 없는 사회, 사귐이 없는 사회는 그야말로 불통의 사회일 뿐입니다. 서로 소통하는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사랑과 교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서로 신뢰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누가 와서 온갖 그럴싸한 거짓말로 이간질하려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뭐라 해도 나는 그를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의 관계를 끊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불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게 됩니다. 도무지 소통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신뢰보다도 더 강한 소통의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게 만듭니다. 온갖 잘못까지도 다 덮어주려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무슨 소리도 다 통합니다. 안 될 일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루어집니다. 오랜 교제 또한 상호이해를 수월하게 해주어 소통을 원활하게 합니다. 

오래 사귄 사람들에게서는 말이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부 사이에서는 “여보, 그거 ...”까지만 해도 벌써 뭘 말하려 하는지 다 압니다. 숨소리만 듣고도 상대방의 의사나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오래 사귀어보지 않아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편견이 개입하기 쉽고 경계하느라고 소통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소통을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신뢰를 쌓고 사랑을 키우며 교제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신뢰와 사랑과 교제의 관계를 갖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통하는 사회의 회복을 위해 앞장서야 합니다. 옛날 예루살렘 교회에서 놀라운 소통의 역사를 일으키신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그 위대한 소통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일으켜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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