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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 (느 1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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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느헤미야 (느 13:1~27)


느헤미야는 유다 지파 하가랴의 아들로 바벨론왕 아닥사스다 1세에게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수산궁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일했습니다(느 1:1-11). 
그는 항상 예루살렘과 고국에 남아 있는 동포들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주전 444년경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하나냐로부터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거기 남아 있는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성이 초토화 되었다는 소식에 슬피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줄 왕과의 접촉을 통해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기로 마음먹고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마침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니 아무도 그를 반겨 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을 타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불에 타버린 성문을 보았습니다(느 2:9-16).

그는 사마리아인과 산발랏과 도비야의 반대와 기타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성곽 중수에 힘을 다하여 52일 만에 완성하고 말았습니다(느 6:15-16).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느헤미야에 대하여 회고하기를 "그는 자기 백성을 행복하게 하고자 큰 포부를 가졌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성을 자기의 영원한 기념물로 남겨 놓았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느헤미야는 12년간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느 5:14). 

그는 다시 바벨론으로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오늘 설교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그는 성전의 한 방을 차지하고 있던 도비야를 축출했습니다(느 13:7-8). 바벨론에서 돌아와 보니 외적의 침입은 없었지마는 종교적인 타락상이 그 본래를 퇴락시키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신앙의 동지 학사겸 제사장인 에스라와 함께 성회를 열고 금식을 선포하고 백성들의 영적부흥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Ⅰ. 성전을 청결케 했습니다. 

1) 도비야의 세간을 성전 밖으로 던졌습니다. 
본문 13장 7-8절에 『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악한 일을 안지라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라고 했습니다. 

도비야가 어떤 사람입니까?
도비야는 저주받은 롯의 둘째 딸의 자손 암몬 사람의 피가 섞인 유대인입니다. 그는 산발랏에게 붙어 느헤미야의 예루살렘성의 중수 작업을 감행할 때 매우 방해했던 성전 중수의 원수였습니다(느 2:10, 19). 족보는 못 속입니다. 도비야의 근본은 노예였으나 제사장 일가와 결혼하여 출세하고 덕분에 성전 한 끝 방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 중의 유력한 인물들과 결탁하여 느헤미야를 괴롭힌 사람이었습니다. 더욱 한심한 일은 엘리아십은 성직자로서 세속주의자 도비야와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타협의 표면적인 증거가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갖춘 것입니다. 엘리아십은 여러 개의 곡간을 헐어서 방으로 만들고 그것을 도비야를 위하여 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심히 근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세간을 전부 방 밖으로 내어 던지는 일대 성전 청결운동을 감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다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요 2:15-16). 


2) 성전에 사용하는 기명들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본문 13장 9절에 『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하여(13:4) 그를 위해 한 큰 방을 갖추었다고 했습니다. 도비야가 있던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기명을 두는 방이었습니다.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두는 방이었습니다.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기도 합니다(13:5). 느헤미야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낙헌제를 드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본래대로 성전에 있어야 할 것을 도로 찾아 놓는 작업을 했습니다. 
우리는 성도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가 생활하는 터전 이하로 생각하는 현대판 도비야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보다 자신의 사적인 생활이 우선되어서는 안 됩니다. 

집에서 안락한 소파에 앉아 생활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딱딱한 의자가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집에서는 값비싼 고급 음식물을 먹는 사람들이 교회의 값싼 재료로 만든 식사에 무슨 구미를 돋구겠습니까? 
집에서는 명품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이 입고 있는 의복에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매력을 느끼고 모든 구성원들과 친화적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를 성도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친교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먹는 음식물 중에 독소가 없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마다 때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까지도 간섭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육신의 쾌락을 최우선 도모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현대판 도비야로 인해 유형무형의 없어진 것들을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식어진 새벽기도, 전설처럼 들리는 금식기도, 끌려가서 죽지 못해 하는 독경과 찬송,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전도생활을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Ⅱ. 전리(田里)로 도망간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을 다시 불렀습니다. 

본문 13장 10-11절에 『 내가 또 알아 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더니 』라고 했습니다. 

'각각 그 전리로 도망했다'는 말을 직역하면 '각각 그의 들판으로 그들이 빠져나갔다'고 해야 합니다(와이브레후, 그래서 그들이 도망했다. 이쉬 레사데후, - 각각 그의 들판으로). 

따라서 『 전리 』란 말은 '밭'이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레위 지파는 원래 성직을 담당한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 중에 고핫 자손은 노래를 담당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하여 레위 지파에게는 아무 분깃을 주지 아니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성전을 섬기는 자는 성전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11지파의 십일조를 가지고 레위 지파는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했기 때문에 레위 지파는 느헤미야가 없는 동안에 다 농사를 지으려고 밭으로 도망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민장을 불러서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을 불러 처소에 세웠더니 이어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곡간에 들였습니다(13:11-12). 

이것은 오늘 성직자들에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만인 제사장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고 했습니다(요 4:34).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을 때 『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고 했습니다(요 6:29). 『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니 내가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요 6:38-40). 

육신의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영생하는 양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곧 우리의 양식입니다. 영생하는 양식을 두고 썩어질 양식을 구하려고 달아나지 맙시다. 느헤미야는 양식 때문에 밭으로 도망간 레위 사람들과 고핫 사람들을 다시 성전에 불러 들였습니다. 


Ⅲ. 안식일(主日)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안식일(day)은 24시간을 말합니다. 
본문 13장 17절에 『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1) 생업을 못하게 했습니다. 
본문 13장 15절에 『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그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2) 매매행위를 못하게 했습니다. 
본문 13장 15절에 『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식물을 팔기로 그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3) 타인의 상행위에 동조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본문 3장 16-17절에 『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예루살렘에서도 팔기로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4) 안식일(主日)을 거룩하게 했습니다. 
본문 13장 22절에 『 내가 또 레위 사람들을 명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별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성문을 드나드는 자들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너희가 다시 안식일에 물건을 팔려고 오면 잡으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빌리 그레함 목사를 찾아와서 질문하기를 주일날 소가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내야 할까요? 라고 했을 때 빌리 그레함 목사는 물론 건져내고 교회에 와야지요. 하지만 다음 주일도 빠지거든 그 소를 팔아 치우시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주일 성수에는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Ⅳ. 성결한 결혼을 명했습니다. 

본문 13장 27절에 『 너희가 이방 여인을 취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불신 결혼의 근절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가정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방 여자와의 결혼은 가정의 영적 질서를 파괴시키는 씻을 수 없는 무서운 범죄행위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습니다(23절). 아스돗 사람, 암몬 사람, 모압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잡혼을 했습니다. 그 자녀들은 아스돗 방언, 암몬 방언, 모압 방언은 하지만 유다 방언은 못합니다. 느헤미야는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머리털을 뽑고 너희 딸을 저희에게 주지 말고 저희 딸들을 너희 자부로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했습니다(25-26절). 불신 결혼은 행복을 깊은 바다 속에 던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언약의 하나님 앞에 복을 구했습니다. 
본문 13장 31절에 『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나를 기억하사 복을 달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무엇을 기억해 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한 거룩한 성결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만족케 할 만한 것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는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뿐입니다. 느헤미야가 아무리 용기 있고 탁월하다고 해도 그의 말 한마디로 이 모든 일이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무너진 성벽을 52일 만에 완수하겠습니까? 어떻게 그의 명령 한 마디로 국민들의 의식이 완전히 전환되겠습니까?

아무리 외쳐도 백성들이 따라주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야군이 승승장구 한 것이 용맹스런 알렉산더 대왕 때문인가?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군을 공포에 떨게 할 만큼 카르타고군이 용맹했던 것이 한니발 때문인가? 자마 전투에서 로마의 스키피오에 의해 패배하기 전까지 한니발은 어린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할 만큼 맹장이었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5만의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300명의 전사와 더불어 목숨을 바꾼 것이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의 용맹 때문인가? 

일본군과 23번의 해전에서 23번을 승리한 이순신 장군은 과연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용맹 때문인가? 
그들에게 뚜렷하지 아니하고 선동적이지 못할지라도 이면에 흐르는 정신세계는 강한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불사하고 사지로 모는 지도자를 따랐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한사코 지도자들의 탁월한 리더쉽(leadership)이라고 해야 될 것인가? 
어떤 리더십이길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데까지 대중이 따랐습니까? 리더십은 단순히 따라오게 한다, 혹은 이끌어 온다는 차원에서 한계를 가지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리더십은 한 무리를 통솔(統率)하는 일체의 힘이라고 할 때 대단히 복잡한 의미가 요구됩니다.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내가 너를 죽인다고 할 때 단순히 살기 위해서 따르게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리더십(leadership)이 아닙니다. 리더십과 펠로우십(fellowship)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펠로우십은 자원해서 추종한다는 의미가 더 부각되고 있습니다. 펠로우십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대적입니다. 강제적이지 않고 더불어 해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의식의 발로입니다. 

우리의 구주(지도자, 왕,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일방적이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쉽은 펠로우십과 무관하지 아니했습니다. 그의 사랑은 선수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요 3:16).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고 했습니다(요일 4:9).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고 했습니다(요일 4:10).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요한일서 3:16).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했습니다(요 14:2). 예수님은 자신의 명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했습니다(요 15:14). 우리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요 15:13).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요 13:1).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겠다고 했습니다(롬 16:4).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이 할 수만 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갈 4:15). 
예수님의 리더십은 자신을 먼저 드리는 리더십입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일본군이 "길을 열라"고 하자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리더십을 목사에게 구하다가 실망에 빠지고 맙니다. 목사가 아무리 애를 써본들 예수님의 리더십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중생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으로 만족합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합니다(눅 10:20). 이것 외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다시 무슨 특별한 리더십과 펠로우십이 필요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리더십과 펠로우십의 압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자신의 리더십을 자랑하지 아니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기대하거나 칭찬하지 아니했습니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자신이 저들을 통제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미디안을 칠 때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고 했습니다(삿 7:18).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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