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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드러나지 않은 선구자 안드레 (요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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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지 않은 선구자 안드레 (요 1:4~42)


간혹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 중에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성격의 사람을 쓰시는가 아니면 리더로서 어떠한 성격이 적합한가 등의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말한 "그건 그때그때 달라요'라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기준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상황과, 위치, 시대 등에 따라서 대답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리더와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격과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아도 무척 다양한 성격의 소유자들을 선택하셨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라는 제자를 생각해 볼 때 같은 형제라도 베드로 사도와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와 동일하게 어부였으나 성격적으로는 베드로와는 상반된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베드로가 폭죽처럼 요란하게 터지기를 좋아하는 행동파라고 한다면, 안드레는 밑불처럼 숨쉬며 조용히 열기를 간직하고 기다리는 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의 문자적 의미가 '남자' 또는 '장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과묵하고 묵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추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안드레가 예수님께 인도되는 장면을 재구성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그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스승인 세례 요한으로부터 요한복음 1장 29~30절("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에 기록된 말씀을 듣고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 둘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요 1:40). 초대교회는 안드레가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자라고 하여 '프로토클레테'(protoclete)라고 불렀습니다. 무엇이든 첫 번째가 된다는 것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또한 선구자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드레 사도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복음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41절 이후를 보면 '그가 먼저(the first thing Andrew did)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풀어 생각해 보면 세례 요한의 말을 따라(40절) 예수님을 좇은 안드레는 그분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을 인지한 후 41절의 '먼저'(the first thing)라는 표현을 39절('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과 연결을 통해 알 수 있듯, 예수님을 만난 다음날 안드레는 가장 먼저 베드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하여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는 단호, 간결, 확실, 요지부동의 내용을 담아 짧지만 확신에 가득한 표현으로 괄괄하며 화끈한 베드로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자신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포함해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산 안드레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총 13번의 안드레의 이름 중에서 3번은 모두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로 그 이름이 나온다는 사실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항상 인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인도하는 안드레' 더 나아가 그를 닮자는 의미에서 '안드레 주일'이라는 표현 속에 이러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은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사명이며 신앙 생활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분명히 하고 있듯 크리스천 존재의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지상 명령이 주어져 있으며(비교, 막 16:15), 마태복음 24장 14절('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을 통해 알 수 있듯 역사의 종국은 복음 전파의 완성을 담고 있습니다. 역사가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우리 믿는 이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이들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으로 하나님의 시각을 품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을 안드레의 삶을 통해 배우게 만드는 부분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그가 다른 이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두 개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선 오병이어의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만 보아도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는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안드레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와있듯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향해 빌립은 재빠른 계산으로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거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점심으로 가지고 있는 한 소년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옵니다. 그 이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적의 사건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드레가 한 소년을 데리고 온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특별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들 또는 세상의 시각으로 그리 신통치 않게 보이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드려졌기에 놀라운 기적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기록은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이곳을 보면 헬라인들이 빌립을 찾아와(아마도 빌립이라는 이름이 헬라 이름이기에 제일 먼저 그에게 찾아왔을 것임) 예수님을 만나 뵙겠다고 청합니다. 이러한 헬라인들의 (예루살렘이라는 몇 번이나 죽임을 당할 뻔한 도시에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 당시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볼 때) '쉽지 않은' 요구를 듣고 빌립은 즉각 안드레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사실은 왜 빌립이 안드레를 찾아 왔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을 찿아가 부탁하였다면 매우 강경한 반대를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참고: 눅 9:51 이후). 그러나 늘 사람을 주께 인도하는 큰 아량을 지닌 안드레는 그들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이로 인해 12장 23~25절에서의 예수님의 죽음과 한 알의 밀의 죽음을 통해 많은 열매를 연결시키는 유명한 말씀이 남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며 안드레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는 '자신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틀'이라는 것은 우리 문화의 틀, 생각의 틀, 사역의 틀이라 할 수 있는 교단, 전통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허용할 수 있다는 과감한 시도를 하지 않고는 이 변화의 시대에 복음 제시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의 태도와 같이 '한 사람이라도 얻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 틀을 깰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것이 변화하는 세상과 그 속에 사는 이들을 향해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요구되는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위해 이인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안드레 사도는 가장 먼저 예수님께 다가와 그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 사실에 더해 중요한 리더들을 예수님께 연결시키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명단에서는 항상 네 번째 또는 베드로 다음에 나올 뿐 아니라, 그를 설명할 때는 '베드로의 형제'라는 단서가 함께 나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이름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그리 유명하지 않았다고 하는 상황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늘 베드로의 형제라고 소개된 것을 볼 때 안드레는 베드로의 그늘에 자기 위치를 정한 느낌이 듭니다. 이러한 것은 그는 항상 두 번째의 위치에서 자신을 지켜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나는 치유의 현장에 없었고(막 5:37), 변화산의 눈부신 영광을 목격한 일도 없고, 겟세마네 동산 예수와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서 제일 가까운 앞줄, 예수의 기도의 음성이 들리는 자리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었던 그 자리에 참여할 권한이 없는 제자로 남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른 8인 제자보다는 더 존귀한 인물이지만 정점에 있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3인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자리는 그의 능력 때문에 일어난 서열이 아니라 그가 자기 분수와 자기의 설자리를 스스로 그와 같이 결정한 그의 인격의 원숙함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건실한 교회는 베드로와 같은 인물이 많아서는 안 되며 안드레 같은 인물이 회중에 많아야 건강하고 건실한 교회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요즘같이 튀고자 별의 별 일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은 분위기 속에 묵묵히 일을 행하는 안드레와 같은 이들을 많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설에 따르면 안드레는 희랍의 파드라에서 X형 십자가에 처형이 되어 지금도 X형의 십자가는 안드레의 십자가라고 불리며 스코틀랜드의 성인으로 스코틀랜드 국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는 죽음까지도 잠잠한 감동을 던져 줍니다. 

지난 날 리더에게 요구되던 카리스마적인 권위는 점점 중요성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협력과 미덕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조직 세계에서 권력은 한 사람에게 있지 않으며, 따라서 앞으로는 정치가든 기업가든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분산해 공동 스타, 공통의 가치와 포부를 가지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일해 나갈 협력자들을 만들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안드레는 한마디로 위대한 협력자로서의 특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고자 했던 용기에 더해, 오병이어와 헬라인을 예수님께로 가져온 창의성을 가졌으며, 제일 처음이라는 이유로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인자로 남을 수 있었던 건강한 자아를 소유한 자였습니다. 우리 또한 용기, 창의성, 건강한 자아를 지닌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박성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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