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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과 소금 (마 5: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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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마 5:13~20)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가운데 먼저 여덟 가지 복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 거기에는 기독교인의 성격을 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봉독한 13절 이하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주님의 말씀하신 바를 어떻게 생활화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 됨을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가? 하는 생활 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세상과 고립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으나 그래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함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벧전2: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덟 가지 복을 주신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므로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애통하므로 위로를 받게 되고, 온유하므로 땅을 차지하게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배부름을 얻게 되고, 긍휼히 여김으로 긍휼 함을 받게 되고, 마음이 청결하므로 하나님을 보게 되며, 화평케 하는 자가 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므로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은혜와 복 받는 것으로 끝서는 안됩니다. 받았으니 이제는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하며 세상 사람들이 그 증거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복 있는 신자들로써 그 아름다운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교훈 해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평범하고 자연계에 있는 단순한 사실을 가지고 깊은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빛과 소금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누구나 체험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이 빛과 소금은 사람의 생존과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꼭 있어야 합니다. 빛과 소금이 없으면 아무것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생명체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과 같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 할 때에 이 땅에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와 교회가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에 자신은 맛 잃은 소금처럼 버림을 당하게 되며, 이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사명이 크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빛과 소금’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이름인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과 같은 신자는 교회와 천국에서만 보배가 아니라 오늘날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보배요, 어디서든지 필요 불가결한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자중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두려워 할 줄 알아야 겠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려야 겠고 그리고 깊은 각오와 결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너희는 세상의 빛이니....’이 중대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부패성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염될 염려와 타락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은 타락하고, 사악하고, 부정한 것으로 꽉 차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썩어 가고 있는 고기와 같습니다.
사람의 몸은 어제나 나쁜 병균의 침투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막지 못하면 병에 걸려 죽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세상의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방부제의 역할입니다. 방부제는 썩는 것을 막는데 사용합니다. 더욱이 우리 나라 보다 더운 이스라엘은 이 소금이 없이는 음식을 보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어떤 곳에서나 이 방부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어떤 민족이나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은 외적의 침입이 있기 전에 먼저 안에서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썩었기 때문입니다. 노아 당시의 멸망이 바로 이 진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명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참된 기독교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생선에 소금을 뿌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생활과 성격을 통해서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영역에서 방부제의 구실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좋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더러운 말이나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 갑자기 경건한 기독교인이 들어갑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으나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신자가 벌써 소금의 구실을 하여 방부제의 역할을 시작한 것입니다.

20여년 전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직장 복음 화를 위해서 일군들을 양성하였습니다. 그것은 직장에 입사하여 ‘빛과 소금’과 같이 조용히 사랑을 베풂으로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뿐만 아니라 감동을 주고, 그래서 스스로 마음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훈련된 청년이 난곡동에 위치한 자그마한 회사에 입사하였습니다. 그는 기숙사 생활을 할 때에도 아무도 모르게 지저분한 변소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신발을 정돈하고, 방도 깨끗이 청소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청소부가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청소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해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나타내지도 아니하고 입으로 전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라도 찾아서 조용히 봉사하였습니다.
칭찬이 자자하고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은 사장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습니다. 매사에 모범적이요 매사에 부지런하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1년,2년 꾸준하였습니다. 사장이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니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료들은 그 친구가 주일이면 성경책과 찬송가를 가지고 나가는 것을 보고 자연히 기독 신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의 전도를 받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은 사장까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사장이 직원 전체를 모아 놓고 예배 드려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초청을 받고 저와 김목사님과 몇몇 동역자들이 가서 말씀과 찬양으로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크게 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각계 각층에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소금의 다른 하나의 역할은 음식의 맛을 내게 합니다. 아무리 영양가가 많고 보기 좋은 음식이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 음식은 맛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맛을 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며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거치는 존재가 되어서도 안되며, 무섭고 지겨운 존재가 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이 사람들에게 복된 존재가 되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개가 끼기만 하면 골치 덩어리야, 분위기 깨져, 될 일도 안된단 말이다’이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무개가 있기만 하면 좋단 말이야, 일할 맛이 난다니까, 그 분만 있으면 안될 일도 잘 된단 말이다’ 이런 사람이 소금과 같은 신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바로 ‘화목’입니다. 막9:50절에 보면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맛을 내는 사람이란 화목케 하는 신자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화목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사람에게 밟힘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더 나가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교회를 욕되게 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은 갑자기 잃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잃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가 점점 게을러집니다. 예배에 종종 빠집니다. 혹은 자기가 맡은 책임을 점점 소흘이 합니다. 점점 세상과는 가까워지고 교회와는 점점 멀어집니다. 이러한 증상이 있다면 연초부터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금의 맛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2.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생명의 근원과도 같습니다. 빛이 없이는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 주검으로 덮이고 말 것입니다. 언제나 빛이 있는 곳에 생명이 약동합니다. 빛이 임할 때에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죽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빛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자연히 마음속에 흑암이 물러갑니다. 온갖 더러운 죄악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새 생명을 소유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 생명의 빛이 우리 마음에 임할 때에 음란과 온갖 더러움과 누추함과 어리석음과 희롱하는 말과 모든 불평과 모든 거짓과 죄악된 것들이 물러갑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작은 빛된 성도 한 사람이 일어나게 되면 어두움의 미신, 어두운 사상, 죄악된 습관과 풍속, 더러운 생활이 물러가고, 밝고 아름다운 생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된 신자가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아름다워집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어떤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마음속에 빛되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빛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에베소 5장에 있는 말씀과 같이 빛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거기에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착함이란 사랑을 근거한 성품을 말합니다. 사랑이란 모든 덕의 최고의 덕입니다. 이 덕은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아름답게 합니다. 밝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빛이 임할 때에 이기심이 사라집니다. 미움과 시기심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성내지 아니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합니다. 그리고 진실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이제 우리는 빛과 소금의 중요성과 그 결과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 강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소금이 어떻게 될 때 소금의 사명을 다하며, 빛이 어떻게 될 때 빛을 발할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자기 희생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금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소금 그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흙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소금이 녹아 없어질 때에 짠맛을 내서 그 역할을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도 그대로는 빛이 아닙니다. 빛은 자신이 타져서 없어질 때에 밝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되는 것입니다. 말로 되는 것도 아니고, 지식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표어나 붙이고 소리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자신이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 내 자신이 타져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빛과 소금의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죽노라’죽는 생활에 힘쓰셨습니다.
나의 인간성, 죄악성이 죽어야 합니다. 나의 고집과 교만과 편견이 죽어야 합니다. 내가 온전히 죽어지고 내 속에 성령 님이 역사 하실 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빛과 소금의 근본 정신은 바로 사랑입니다.
금년에도 다시 ‘사랑으로 일하는 교회’ 되자는 표어를 정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일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희생 없이는 진정한 사랑의 역사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 실천 목표는 첫째가 서로 희생하자, 둘째가 서로 관용하자, 셋째가 서로 존경하자 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시간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은 죽는 것 같지만 사실은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여 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꼭 필요한 일군이 되며, 자신에게 한없는 은혜와 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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