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애통하면 행복합니다 (마 5:1~4)

  • 잡초 잡초
  • 295
  • 0

첨부 1


애통하면 행복합니다 (마 5:1~4)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팔복에 관한 말씀을 드립니다만 무엇보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행복이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존재하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6:24~26“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정말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참 행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해 지려고 해도 재대로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행복은 어떤 것일까요? 

그 첫 번째의 복을 지난주에 말씀드렸는데, 심령이 가난함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애통이 행복의 열쇠라는 겁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한국의 유명한 암 치료의 권위자인 이 상구 박사를 잘 아실 것입니다. 90년대 초 한국의 엔돌핀 열풍을 일으켰었죠? 한번 웃을 때 마다 암세포를 막아주는 엔돌핀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시는 말씀은 이 상구 박사가 주장하는 웃음으로가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론은 애통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주장하는 논리라 맞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논리는 많이 웃는 것이 행복이고, 예수님의 논리는 애통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논리가 맞는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 철학은 세상의 슬픈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고통과 괴로움을 잊어버리고 행복하기 위해서 할 수만 있으면 인생에 쾌락을 즐기고 남은여생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꿈이고 행복의 논리인 듯, 싶은데 우리 주님은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이 맞는다면 참으로 애통하는 것이 행복일까요.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마태복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6장 25절을 보시면 마태복음 보다 강한 어조로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눅6:25후반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여기서는 복이 아니라 화가 있을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퍼할 일이라면 장례식에 가보면 죽은 이의 유가족들이 곡을 하고 슬퍼합니다만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애통하면 복되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신 가요? 
이런 유의 슬픔을 지금 이야기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곧 인생에 있어서 영적인 애통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란 영적상태의 관련된 말씀을 드렸듯이 오늘 말씀도 바로 영적인 상태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들의 내적인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표면상의 교회의 모습이 지금 어떻게 비춰져 보이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교회가 목적하는 부흥을 위해서 시스템을 동원하고 여러 가지 묘안을 짜내서 교회의 외형적인 면을 부흥의 수단으로 삼는 것 보다 비극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만합니다.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청교도들의 정신은 순고하고 빛났지만 이것이 제도가 되고 형식이 되다 보니까 청교도 정신이 청교도 주위가 되고 그러다 보니까 거짓된 청교도주의가 어떤 형식적인 경견의 모양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기독교의 생명 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겁니다. 
보다 이 문제를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 기독교인이 비 기독교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밝고 명랑한 모양을 가장하고 어떤 외형적인 면에 치중했다는 말이지요.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의 단편적인 면을 엿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외형적인 겉치레는 거룩해 보이고 얼굴은 피상적으로 미소가 흘러넘치는 듯 보이려고 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잘못된 죄의식과 자기 성찰을 놓쳐버리고 마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러한 우리들을 향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을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취해야 할 자세는 첫째가 우리 심령이 가난해져야 하는 것이며, 또 두 번째로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참구원의 기쁨이 있기 전에 속죄의 의식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는 복음의 본질을 지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복음을 들고 등장하기 전에 선포된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이거 없이는 아무리 귀한 복음이라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닮고 그분의 형상을 닮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삶을 한번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예수께서 웃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님이 노하셨다는 내용과 굶주림과 갈증으로 고통을 당하셨다는 기록은 찾을 수 있지만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그 분을 일컫는 말씀을 짚어보면 그분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설명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누구보다도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로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더듬어 봐도 예수님이 웃었다는 기록은 없고 울었다는 기록은 성경에서 세 번 나옵니다. 

한번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내용이 (요 11:35절에 나오고, 또 (눅 19:41-44) 말씀가운데에 나오는데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다고 나옵니다. 

또 한 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 깊도록 기도하시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우시면서 기도하신 내용을 (히 5:7)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은 그렇게 사시다가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팔복가운데 두 번째 복을 완성하시고 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들이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닮아야 할 사람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 중에 귀한 삶을 살다가 간 바울의 삶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을 닮아야 할 이유는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마치 우리가 고백해야 할 내용을 고백하고 있거든요.

롬7:18~19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롬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러분들이 알고 내가 아는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내안에서 경험되고 있는 속사람의 경험하고 느끼는 고백을 지금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우리들을 돌아보면서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나를 속량해 달라고 울부짖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귀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한번 보세요.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앉혀놓고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는 말씀을 하시니까. 대뜸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그러지 않겠나이다. 말합니다. 
이 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이 때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제자들도 다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루가 체 넘지 않아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어린비자 앞에서 세 번씩 그것도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합니다. 
이 때 여지없이 닭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이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참지 못하고 울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를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깨닫게 될 때 통회 자복하면 애통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게 되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십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7장까지는 우리 자신들의 죄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할 것 같으면 로마서 8장부터는 하나님의 속죄에 대한 선언의 말씀이 주어지게 됩니다. 

주신 말씀대로 죄를 회개하면 다시는 그 죄에 대하여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에 있어서 애통이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참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해야 만합니다. 내가 결을 수 있는 죄에 문제투성이 속에 머물러 사는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가슴아파합니다. 원래 죄라는 속성은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박테리아가 번지듯 더욱 번지고 확산되기 때문에 이를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결과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게 마련입니다. 우리 주님이 애통하신 것도 이와 같은 심정이셨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로 사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선지자 중에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는 눈가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항상 이상 중에 택한 이스라엘의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그 타락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공통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고통 중에 처한 백성들은 다름 아닌 내형제고 내 자매인데 이를 보고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은 책이 예레미야 애가서입니다. 

여러분! 과연 전도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슬픔을 많이 격고 질고를 많이 나는 자들이 그 고통 중에 처한 자기 백성들을 보면서 뜨거운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눈물이 메말라있기 때문입니다. 

시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눈물이란 수고의 눈물을 말합니다. 눈물이란 항상 눈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눈물의 결과는 항상 기쁨으로 보답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어미의 순고한 눈물은 자식의 성공을 기약할 수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위대한 역사의 인물이 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어거스틴의 모친인 모니카의 의 눈물이 있었기 에 가능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한참 막나갔을 때에 하시도 골방에서는 항상 모친인인 모니카의 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기도로 인해 어거스틴이 일명 성 어거스틴이 되었던 겁니다. 

모세가 영적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일생에 있어서 모세를 나아준 모친이 있었고, 그를 물에서 건져준 공주가 있었고, 또 그를 가슴에 품어 보듬어 않고 눈물로 젖을 물린 유모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 54:1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잉태치 못한 여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전도하지 못한 분들에게 주시는 여호와의 말입니다. 우리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써 자녀를 생산하는 자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때가 다가오기 전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림으로 머지않아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는 축복의 역사가 바로 여러분들이 몫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