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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손(5) : 저를 죽여 주의 뜻을 이루소서 (삿 16: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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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5) : 저를 죽여 주의 뜻을 이루소서 (삿 16:20~31)


I. 실패

미국인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언제나 1위 2위에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인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도 몇 위안에 드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분처럼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도 많지 않을 겁니다. 젊은 시절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합니다. 아내를 잃고 신경쇠약에 시달립니다. 주의회 선거, 연방하원의원 선거, 상원의원 선거, 부통령 선거... 수없는 선거에서 실패를 겪습니다. 그러고 대통령이 됩니다. 

인생경험에서도,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실패를 원치 않으나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는 내가 실패자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아직 성공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뜻입니다. 실패는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패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성공은 실패를 극복한 사람이 얻는 선물입니다. 성공은 실패를 올바른 태도로 받아들인 사람이 얻는 보화입니다. 

「11만번의 실패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책에 보면 에디슨은 평생 11만 번의 실패를 경험했고 건전지 하나를 만들기 위해 무려 5만 번의 실패를 겪어야 했답니다. 포기를 종용하는 친구에게 에디슨은 “아닐세 나는 이렇게 하면 귀한 경험이 쌓였을 뿐일세”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삼손은 지금 사사로서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실패로 그의 두 눈은 빠졌고 다리엔 놋줄이 매인 노예가 되었고 옥에서 맷돌이나 돌리며 어릿광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딤나 평원 추수단을 불사르던 그가 맷돌을 돌리며 추수를 하고 있습니다. 

피터 폴 루벤이라는 화가의 작품 중 “삼손”을 주제로 그린 그림에 보면 두 개의 원에 각기 다른 의미의 그림을 담고 있답니다. 첫 번째 원엔 삼손이 젊은 사자를 제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두 번째 원엔 사나운 사자가 삼손의 심장을 할퀴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삼손은 하나님의 원안에 있을 때는 젊은 사자도 찢어 죽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원을 벗어나면 정욕이라는 사자에 자신이 찢겨질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요. 

사탄은 삼손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권투 경기를 보면 꼭 복부와 턱을 공격하더라구요. 사람마다 바로 거기가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잔인하게 우리가 약한 곳을 골라 공격합니다. 돈에 약한 사람은 시험에 들어도 꼭 돈 때문에 시험 듭니다. 부정적인 말에 약한 사람은 꼭 부정적 얘기만 들립니다. 이성에 약한 사람은 늘 거기에 걸려 넘어집니다. 당신이 명예에 약한지 자존심에 약한지 사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삼손은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시므로 슈퍼맨 이상의 큰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영적으로도 자신은 슈퍼맨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어떤 죄를 가지고 놀아도 괜찮을 줄로 알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은사를 가지고 장난을 해도 괜찮을 줄로 알았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6.25이후 어릴 때 포탄과 총알을 만지작거리고 놀다가 포탄이 터져 두 팔을 잃고 두 눈을 잃어버렸습니다. 

삼손은 신령한 나실인 신분의 마지막 마지노선이었던 머리카락을 두고 농을 즐기다 넘어졌습니다. 힘을 잃고 두 눈이 빠졌습니다. 블레셋의 심판자가 블레셋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신성한 것을 가지고는 말로라도 장난을 하면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주님의 교회,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버린 것은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II. 나귀가 된 삼손

삼손을 보십시요.
16:17에서 신성(sanctus)의 마지막 노선을 무너뜨립니다. 
“나는 나실인이라 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다. 내 머리를 깎으면 내게서 힘이 떠나게 되고 나도 너희처럼 약한 인간이 되고 만다.”

참으로 충격적인 말입니다. 원수 앞에서 신성의 담을 무너뜨리는 것도 충격이지만 자신이 나실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지금 이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술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그가 술독에 빠져 살고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 할 그가 시체를 만지작. 그리고 거기서 얻은 꿀을 퍼먹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로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야 할 때이지 더 멀리 도망갈 때가 아닙니다. 마지막 마지노선 마져 무너뜨리려야 할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삼손은 자신이 나실인으로서 머리만 짜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삼손처럼 이것 저것 무너뜨리고 살면서 삼손처럼 자기가 설정해 놓은 마지노선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이 정도는 지켜야지. 자기 스스로 정해 놓은 상징 한 가지를 붙들고 삽니다. 

한 가정에 남편 집사는 퇴근 때마다 소주를 한잔 씩하고 집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부인 집사님은 적어도 집사라면 이러지는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늘 남편에게 잔소리를 합니다. 그런데 정작 부인 집사님은 교회에 대해 입만 열면 불평입니다. 남을 욕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이게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술 먹고 퇴근하는게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누가 더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겁니까? 

어떤 사람은 주일 성수가 마지노선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가 마지노선입니다. 어떤 사람은 봉사가 마지노선입니다. 

삼손은 머리털만 지키고 있으면 나실인으로서 능력이 유지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머리가 깎여지자 정말 능력이 떠나갔습니다. 그 엉터리 마지노선이 무너지자 능력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20절에 보면 삼손이 힘을 잃어버린 것은 머리털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떠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능력이요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이 저주다. 이것이 사사기의 해석입니다. 이미 자기 머리가 짤려진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나자 삼손은 한순간 모든 것을 잃고 인생의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삼손의 영적 미천함이 무엇이었습니까? 눈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들릴라가 사랑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사탄의 나라 블레셋 다섯 방백과 연계된 사탄, 악영인 걸 몰랐습니다. 삼손은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잘못인가? 감정에 충실하자라고 했겠지요. 그것은 죄를 사랑하는 것이요 죄는 엄청난 사탄의 나라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감정에 충실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충실했어야 했습니다. 

삼손은 자기 존재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는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삼손은 눈이 뽑히고 노예로 전락한 다음에야 들릴라 무릎을 베고 장난을 하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고 몸서리를 쳐야 했습니다. 16:21에서 그토록 끔찍한 일을 간결하게 기록하고 넘어갑니다. 말해서 무엇하리요. 이 얼마나 당연한 결과인가? 이런 뜻입니다. “눈 빠진 노예가 되었다” 끝.

지금 삼손이 맷돌을 돌리는 이 일은 나귀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나귀의 뺨으로 블레셋의 뺨을 쳐죽이고 수치를 안겼던 그가 지금 나귀가 되어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다곤 신은 토지와 곡식의 신입니다. 딤나와 추수밭을 불사른 것은 다곤 신을 조롱한 것입니다. 이제는 삼손이 다곤 신당에서 곡식을 타작하기 위해 눈먼 나귀가 되어 맷돌을 돌리고 있습니다. 눈먼 나귀가 되어 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블레셋 사람들은 “우리 토지를 헐고 우리 곡식 밭을 불사르고 죽이던 원수의 꼴 좀 보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붙였도다”고 노래했습니다. 블레셋을 나귀 같은 놈이라고 놀리던 삼손이 바보 나귀가 되었습니다. 


III. 내 자녀를 조롱하지 말라

삼손이 이런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을 때에 참 특이한 기록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2절입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머리를 깎아도 다시 자라지요. 이 당연한 사실을 왜 특이한 사건처럼 기록했을까요? 삼손은 머리가 밀리고 여호와의 영이 떠나고 두 눈이 사라질 때 하나님이 영원히 자신을 버린 줄로 알았습니다. 절망과 낙심 후회와 회한만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머리털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머리털이 당연히 자라듯이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다시 나를 찾아와 주신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머리카락은 자랍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당연히 그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는 자라납니다. 삼손이 채찍에 맞을 때도 머리카락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연자 맷돌을 돌리는 그 시간에도 머리카락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조롱받는 그 시간에도, 깊은 밤 외로이 울고 있는 그 시간에도 머리카락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눈은 뽑혔고 발은 쇠고랑을 차고 어깨는 맷돌을 돌리고 있었지만 머리카락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영원히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삼손이 실패한 자리 거기가 삼손 인생의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습니다. 

삼손은 머리카락이 한줌 잡히는 그순간 눈물을 흘렸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구나. 하나님, 저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군요. 이 감옥에 저 혼자 버려두신 것이 아니군요. 삼손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삼손이 한 마리 눈먼 노새가 되어 맷돌을 돌리고 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를 우리 손에 붙였도다. 곡식의 신을 비웃던 자가 곡식을 탈곡한단다.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당하고 망해 가는 모습을 사탄은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면 세상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망한다는 소문이 있으면 사탄은 춤을 춥니다. 그래서 블레셋은 다섯 방백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잔치를 벌이며 기뻐합니다. 삼손 별거 아니네. 삼손이 더듬거리는 저 우스꽝스런 꼴 좀 보게나. 한국교회 별거 아니네. 예수 믿는 것들 별거 아니네. 하나님, 별거 아니네. 저, 더듬거리며 헤매는 꼴 좀 보소. 

그래서 여러분 잘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잘 섬겨야 합니다. 절대로 여러분은 사탄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비웃음과 축제 뒤에서 엄청난 일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삼손이 붙잡혀 노리개감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축제를 벌이기 위해 다섯 방백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것이었지요.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대적인 복수를 하기 위해 출정식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낄낄대고 웃고 즐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그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모으고 계십니다. 다섯 방백의 통치자는 다 모여라. 군사령관과 지휘관은 다 모여라. 온갖 장관들 다 모여라. 부자, 잘난 사람 다 모여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어떻게 멸하는지 모이라! 너희가 비웃고 조롱하는 나의 종 삼손이 어떻게 너희를 멸하는지 보아라!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꾸미고 계셨습니다. 

25절에 보면 삼손에게 재주를 부리게 해 놓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눈먼 삼손으로 춤을 추게 했다는 겁니다. 이 조롱 앞에 삼손은 피를 토하며 어눌한 몸짓으로 춤을 추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보고 계시지요. 하나님을 조롱하는 저 원수들의 꼬락서니를. 


IV. 나를 죽여 주의 승리를 이루소서!

삼손이 활동하던 이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두 번 삼손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삼손 혼자서 나귀턱뼈로 블레셋 군사 1천명을 무찌르고 너무나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샘물을 터뜨려 기도에 응답합니다. 

오늘 본문 16:28이하에 삼손의 부르짖는 기도가 나옵니다. 이 기도 속에 독특한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1) “이번만”이란 단어입니다. 이 기도는 생사를 건 기도입니다. 죽음을 담보로 드린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한번이라도 보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2) “단번에”라는 단어입니다. 단 한번의 기회로 블레셋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겁니다. 자신에게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회개하고 결단한 자의 기도입니다. 

3) 이 기도 속에 독특한 동사들이 몇 가지 등장합니다. 
부르짖다 (카라) 하나님의 이름에 매달리는 기도입니다. 
생각하옵소서 (자카르) 하나님! 나를 잊지 마시고 기억해 달라는 겁니다. 
강하게 해 주소서 (하자크) 저의 허물로 잃어버린 그 능력을 돌려 달라는 겁니다. 
원수를 갚게 해 주소서 (나캄) 이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를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친히 복수하소서 그런 뜻입니다. 

4) 계속 “구하옵나니”라고 부르짖는데 그 부르짖는 내용이 30절에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죽여 여호와의 뜻을 이루시라는 겁니다. 이 철부지 사사의 목숨을 담보로 그 블레셋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삼손의 기도를 풀어봅니다. 
“여호와여, 부르짖을 자격조차 없는 이 철부지 사사가 감히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합니다. 일찍이 나를 나실인 사사로 부르시고 저 하나님의 백성을 무참히 짓밟던 원수 블레셋을 무찌르도록 강한 힘을 주셨던 그 일을 기억하옵소서. 내 어머니 모태에서부터 함께 하셨고 위기때 마다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여 이제 단 한번 나를 강하게 하옵소서.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마땅히 감당했어야 될 그 사명을 소홀히 했습니다. 나의 죽음으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내 눈을 빼고 나를 눈먼 나귀로 만들고 나와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는 저들을 그냥 두고 보지 마십시오. 여호와의 승리를 위해 제가 죽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제가 죽겠나이다. 원수를 무찌르는 제물이 제가 되겠나이다. 제발 비웃고 조롱하는 저 원수들과 함께 죽게 해 주십시요.”

이 기도 속에 보면 삼손이 머리카락 빨리 자라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그 힘의 근원이 머리카락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삼손은 눈이 먼 다음에야 영적인 세계가 보였습니다. 그동안 때묻고 더러워진 머리카락이 짤려진 다음에야 새로운 언약의 소중함이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안내하는 소년 장병에게 신전을 버티고 있는 기둥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마침 신전의 중심을 잡은 두 기둥 사이에 섰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두 기둥을 오그라뜨려 버립니다. 비명, 아우성, 아비규환과 함께 거기 모인 블레셋 고관 대작들이 건물에 깔려 다 죽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을 30절은 짤막하게 기록합니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이때 모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27절에 의하면 지붕에 구경 삼아 모인자 만도 3000명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삼손은 12명 사사들 중 유일하게 적에게 잡혀 죽은 비운의 사사입니다. 유일하게 자연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삼손은 언약을 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지금 삼손이 잡히고 눈이 빠지고 지금 죽는 이유는 그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깨뜨린 자는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삼손은 그 언약을 파기한 댓가로 자신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에 들어가 언약을 모두 깨뜨리고 짓밟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이방의 발아래 짓밟히며 살고 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지금 자신의 죽음과 함께 자신의 사명, 블레셋을 도륙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언약을 깨뜨린 삼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거둘 수가 없어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죽으시므로 그 언약이 회복되었습니다. 원수는 머리가 깨져 죽었습니다. 마귀의 신전은 무너졌습니다. 그 죽음의 더미 - 지옥에서 나를 건져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주여 나를 죽여서라도 주의 뜻을 이루소서!
주여 나를 죽여서라도 주의 승리를 이루소서!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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