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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신앙인으로 (마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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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쉽게 혼동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교회와 예배당을 혼동합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교회입니다. 반면에, 예배당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 건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혼동해서 좋은 교회가 되는 일에 힘쓰는 것보다 좋은 예배당을 짓는 일에만 힘쓰는 어리석은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쉽게 혼동하는 것 중에 하나는 예배와 집회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집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화살표로 이해하자면, 위로 향하는 화살표는 예배이고,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는 집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이고, 우리가 은혜 받기 위해서 갖는 것이 집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와 집회를 혼동한 나머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예배드리러 온 사람들이 은혜 받기 위한, 집회로 전락해 버리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교회에 가면 마음에 안식을 얻을 수 있으니까 간다. 오늘 교회에 가면 내게 은혜가 되는 말씀을 주시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은 잘못된 것들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뭔가를 받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드리는 시간입니다. 예배 시간은 내가 은혜 받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은혜는 우리의 삶 속에서 받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한 주간 동안 내 삶 속에서 실천하면서 내 삶 속에서 은혜를 받고, 주일에는 자신이 받은 그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내 모든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 부분에 있어서 많이 혼동하는 모습들을 보아 왔습니다. 

  한 가지만 더 들어본다면, 교회에 다니는 것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같은 의미로 생각하면서 이를 혼동하는 모습을 들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습니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이 곧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성전 뜰을 밟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제사를 드린 것입니까?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종교성을 갖고 있고, 종교적인 행사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종교인과 신앙인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대표적인 종교인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등장합니다. 종교인이었던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종교인이 어떠한 사람인지, 그 실체를 배우게 되고, 반대로 신앙인은 어떠해야 하는 지도 함께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을 우리가 함께 살펴보면서 종교인과 신앙인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에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전통을 지키지 않아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어떻게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여기에서 장로들의 전통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오경에 기록된 율법 이외에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로 전해주신 구전 율법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성경율법은 원리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세세하고 복잡한 현실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상세한 규범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부터 유명한 유대 랍비들이 고대의 전승 자료들을 중심으로 해서 세세한 생활 규범들을 정비하고, 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전통입니다. 그런데, 이 ‘장로들의 전통’은 원래 율법을 보호하고 율법을 잘 지키도록 돕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이것을 ‘율법의 울타리’라는 말로 표현을 하는데, 하지만, 울타리를 보다 견고하게 치려는 과잉보호와 보다 철저한 율법 준수를 위한 과열된 열심은 율법의 해석과 적용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율법 자체보다도 ‘장로들의 전통’이 오히려 더 중요한 것처럼 여겨졌고, 율법을 왜곡시기커나 과장하게 했고, 심지어는 율법으로 명령하지 않은 것들까지도 준수 사항으로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정결 규례가 그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입니다. 구약 율법에 보면,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써 손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례는 구약 율법에서 규정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통’의 하나로 만들어서 모든 유대인들에게 적용시켰습니다. 또, 율법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만 했는데, 그들은 안식일에 1km이상은 가면 안 된다고 규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0.9km씩 여러 번 가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또, 안식일은 일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 쉬면 되는 것인데, 안식일에 바늘을 옷에 꽂고 가도 물건을 운반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외에도 갖가지 세부적인 관습들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장로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계명과는 완전히 어긋난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하시면서 고르반에 관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명목 하에 세부 규정을 만들면서, 고르반이라고 하는 규정도 만들어 냈습니다. 이 고르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물건에 대해서 고르반을 선포하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께만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섬기기 위해서 돈 3백 만원이 필요한데, 이것을 고르반으로 선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돈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께 드릴 수 없다고 하면서 부모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고르반을 취소하면서 취소하는 데 드는 벌금 10% 정도, 30만원을 성전에 바치고, 270만원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장로들이 정해놓은 전통, 즉 사람의 계명을 더욱 소중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고 하는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곧, 종교인은 외적인 형식을 중요시하고 외식하지만, 신앙인은 내적인 것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외식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해진 기도 시간이 되면,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이나 회당 거리나, 도시 모퉁이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얼굴을 초췌하게 보이게 했고, 손을 높이 들고 괜히 기도하는 시간을 질질 끌면서 기도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경건하고 존경스럽다고 칭찬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떡 먹을 때 외식적으로 손은 씻었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죄는 씻지 않았고, 속에는 더러운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꾸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안에는 냄새 나는 송장과 같은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인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분명히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종교인은 종교생활 그 자체까지도 자기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해, 참된 신앙인은 외식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 모든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나 보이는 손과 발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하는 일에 힘쓰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제가 때를 따라서 저희 집사람에게 선물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비싼 선물은 아니지만,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해서 예쁜 카드에 정성스럽게 글을 써서 주면 참 좋아합니다. 지난 결혼기념일 때도 그냥 화장할 때 쓰는 거울 하나를 선물했습니다. 값을 따지자면 얼마 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카드에 글을 잘 썼기 때문에 고맙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큰 맘 먹고 좀 좋은 선물을 해줬는데, 시간이 없어서 카드를 쓰지 못하고 선물만 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아무리 비싸고 좋은 선물을 받았어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선물보다도 카드에 써진 제 글씨체가 마음에 들고, 카드에 써진 그 내용이 좋다는 얘기를 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선물은 외적인 것이고, 카드는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사람도 외적인 것보다도 그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많은 헌금을 드린다고 기뻐하시겠습니까? 외형적으로 남들이 보기에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게 행동한다고 해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몸이 교회에 와서 앉아 있다고 해도, 그 마음이 세상을 향해 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서 출전대기만 하고 있는 후보를 벤치워머라고 부릅니다. 엉덩이로 벤치를 따뜻하게 데우기만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드리지 않고, 우리의 몸만 와서 앉아 있는 것은 벤치워머에 불과합니다.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켜서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마음과 정성, 우리의 전 인격과 전 존재로 예배드려야!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내적인 모습이 거룩한지를 점검하면서, 우리의 모든 마음을 다해 살아가는 삶을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떻게 보일 것인가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면서 '외식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내 말과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 모든 생각과 노력을 기울이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점은 종교인은 율법의 형식만 강조하고, 신앙인은 율법의 내용을 중요시한다는 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형식은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율법의 정신은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르반이라는 규정이 왜 생겨났습니까?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정신은 잃어버리고 그들은 그 형식만 강조하고, 오히려 그것을 악용했습니다. 안식일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참된 안식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인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율법이 말하고 있는 그 근본정신은 다 잃어버리고, 엉뚱한 것만 강조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아기 엄마가 물건을 사기 위해 가게에 갔습니다. 그 아기 엄마는 자신이 갖고 있던 돈으로 빵과 우유를 샀지만, 동시에 고기를 몇 근 훔쳤습니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할 때에 아기 엄마는 빵값과 우유값만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뭔가를 눈치 챘는지 가게 주인은 가방을 열어보게 했습니다. 그 아기 엄마는 당연히 가방을 열어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왔을 때는 가방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방을 열어봤더니, 아닌 게 아니라, 고기가 나왔습니다. 그 아기 엄마는 그 길로 곧장 경찰서로 끌려갔고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재판하는 과정에서 재판관은 그 아기 엄마의 상황을 알게 됐습니다. 그 아기 엄마는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고, 현재 다섯 명의 아이를 기르고 있는데, 집도 없고, 몇 달 동안 기름진 음식이라곤 한 번도 입에 대보지 못한 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재판관은 그 아기 엄마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그 가족이 살기 적절한 집을 제공해 주고, 연금을 지급받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재판관은 법조문보다도, 법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식보다 정신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형식에 주목을 했습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않았으면 자신들은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의 정신은 자기 목숨까지 주셨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의 의미가 실천되어져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문자적인 측면, 그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이 말씀하고 있는 그 궁극적인 정신을 따르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는 그 형식은 귀중하게 여겼지만, 그 정신은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물질 뿐만 아니라, 박하와 근채와 회향의 십일조까지 드렸지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인들은 겉으로 볼 때는 문자적으로 굉장히 세밀하게 계명을 지킨 것 같지만, 율법의 정신에서는 벗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의 형식만을 강조했던 그들은 종교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형식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신을 중요시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십계명을 준수해서 살인하지 않고, 우리의 이웃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형식만 지킨다고 해서 신앙인일 수 있겠습니까?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종교인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율법의 형식을 행하는 것보다 더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번제 헌물과 희생물보다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성전에 희생물을 바치는 것보다 긍휼을 더 원하십니다. 금식하는 것보다 의를 행하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제단에 헌물을 드리는 것보다 형제와 화해하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율법의 형식보다 순종이 중요하고, 공의가 중요하고, 긍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것들을 “율법의 더 중대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원하기는, 우리는 종교인들과 같이 율법의 형식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근본적으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율법의 정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인들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는, 종교인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제일로 삼고, 신앙인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제일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들이기에 하나님을 제일로 여기는 것처럼 보여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보다도 그들의 전통을 더 우위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보다도 사람의 계명을 더 우위에 두는 어리석은 우를 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보다도 다른 것을 제일로 여기게 될 때에, 그 사람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종교인입니다. 

  한 때 베스트셀러여서 안 읽어보신 분이 거의 없을텐데,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쓴 “긍정의 힘”, 또, “잘되는 나”라는 책을 아실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읽고 삶의 희망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잘 되는 나'라는 책은 출판되기도 전에 천문학적인 선급금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그 책에 대해 좋은 칭찬을 했던 것처럼, 어떻게 보면, 참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 돼 있습니까? 그 책을 보면, 긍정의 힘, 즉 긍정적인 자기계발을 하고 긍정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마치 성경에 나타난 복음인양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최면적인 자기 계발이나, 긍정적인 자아상의 회복을 통해서 잘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있습니다. 

  조엘 오스틴이라는 사람은 신학공부를 한 적이 없습니다. 미국의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몰몬교도 진정한 기독교라고 발언을 해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문제는 깊이 공부하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라고 하면서 몰몬교도 기독교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책이 큰 방향을 일으켰고, 그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해서 그를 옳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종교인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옥한흠 목사님도 “조엘 오스틴이야 말로 이단이 아니면서도 이단에 버금가는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를 긍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도 우선하는 것입니까? 내가 나를 긍정할 때에 내가 잘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보다도 내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입니까? 하나님보다도 다른 것을 우위에 두는 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보다도 장로들의 전통을 더 우위에 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종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천금보다 더 귀중한 아들, 사무엘보다도 하나님을 더 우위에 두었던 한나처럼! 자신의 목숨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골리앗에게로 나아갔던 다윗처럼! 자신의 화려한 이력보다도 복음 전파의 사명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드렸던 바울처럼! 우리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유대 사회는 외면적으로는 한 종교 체계 밑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고, 한 종류의 경전을 가지고 있었고 한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판이하게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완벽한 종교인'처럼 보이는 무리가 있었는가 하면,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 볼품도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만은 '참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철저하게 구분하셨습니다.
  종교인과 신앙인은 어떻게 다릅니까?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에 대해 써놓은 글이 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종교인은 좋은 게 좋은 거라 말합니다. 신앙인은 아닌 것에 대해 분명히 아니라고 말합니다. / 종교인은 선행을 강조합니다. 신앙인은 복음을 강조합니다. / 종교인은 다른 것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앙인은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 종교인은 교인이 많아지는 것을 부흥이라 말합니다. 신앙인은 악이 심판되어지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남는 것을 부흥이라 말합니다. / 종교인은 교회건물이 커 가는 것을 기뻐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 종교인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자녀 삼으심의 목적임을 믿습니다. / 종교인은 복을 받는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 종교인은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 종교인은 날이 갈수록 종교 전문가가 되어갑니다. 신앙인은 날이 갈수록 열매를 맺어갑니다.” 이렇게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에 대해서 쭉 열거한 후에 마지막에 묻습니다. “당신은 종교인입니까? 신앙인입니까?”   

  중국이 서방에 개방을 하기 전에 한 사람을 미국에 스파이로 보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외모도 미국인과 비슷하게 생겼고, 영어도 유창하게 잘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인인지 중국인인지 판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꾀를 내서, 그가 미국인인지 중국인인지를 밝혀내려고 했습니다. 그 스파이 곁에서 미국의 국가를 불렀더니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중국의 국가를 불렀더니 발을 구르면서 박자를 맞추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중국 스파이라는 것을 알아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아무리 누구인 척 해도, 결국은 드러나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인인 척 행동을 해도, 우리가 종교인이라면, 결국은 그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인이면서 신앙인인 척 하거나, 신앙인인 줄로 착각하면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역시 '종교인'들은 많이 있지만 참된 '신앙인'들은 소수인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신앙인의 길은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신앙인으로 살기 보다는 그저 적당히 신앙인인 체하고 흉내만 내는 종교인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쉽고 편한 넓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종교인들이 가는 길은 결국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뿐이며, 오직 신앙인의 길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되고도 유일한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부류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고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만이 목적이 되는 종교인'입니까, 아니면 모든 중심이 하나님으로 향해 있는 신앙인입니까? 신자인 척하는 인본주의적 종교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진정한 신앙인입니까? 원하기는, 우리들 모두가 종교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종교인과 같이 살아가던 우리의 모습들은 다 떨쳐 버리고, 참된 신앙인으로 새롭게 지어져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귀한 모습으로 쓰임 받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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