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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 (갈 3:15~22) -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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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 (갈 3:15~22)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고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알이 없이 어떻게 닭이 생길 수 있느냐는 것이요 닭이 먼저 있기에 그 닭이 알을 낳는 것아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야 뭐 닭이 먼저면 어떻고 알이 먼저면 어떻겠는가 싶은데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사람들은 아주 결사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생각해 보면 그건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당연히 닭이 먼저입니다. 

마찬가지 논리가 바로 빛의 논쟁입니다. 빛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해가 생긴 것입니까 아니면 해가 먼저 있고 나서 빛이 그 해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빛이 먼저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첫째 날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해와 달과 별은 넷째 날 만드십니다. 

창세기 1장 16절로 19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두 개의 큰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 중 큰 빛으로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으로 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또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빛들을 하늘에 두셔서 땅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또 그 빛들이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저녁이 지나고 아침이 되니, 이 날이 넷째 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첫째 날은 해와 달과 별도 없는데 어디서 어떻게 빛이 생겨났고 또 비쳐졌겠습니까? 

하박국 3장 4절은 “주는 밝은 빛과 같습니다. 주의 손에서 광선이 나옵니다. 주께서 광선 속에 그 능력을 감추십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요한일서 1장 5절은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빛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빛은 어디까지나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해가 없는데 어떻게 빛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 즉 로고스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십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십니다. 뿌리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빛도 되시고 그 빛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 역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언약과 율법에 관한 논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은 분명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어떻게 뒤늦게 주어진 율법이 그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손은 곧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약속이란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규칙과 법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때로는 약속을 지킴으로 오히려 내게 손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기 때문에 약속은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 지키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죠. 일단 약속을 했다면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하고 때로는 내게 손해가 된다고 해도 지켜야 하는 것이 약속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였다면 뒤로 미루지 말고 반드시 지켜라 설사 네게 해가 된다고 해도 지키라고 하십니다. 서원이란 곧 하나님과 맺은 약속이기 때문이요.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 내 스스로 내가 먼저 하나님께 약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약속해 놓고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보니까 그것 지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도 하고 아예 무시해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약속을 잊으십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와 맺은 약속을 잊으신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지독하리만큼 철저하게 기억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 약속을 하나님께서 어찌 잊으신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에게 복을 주겠고 복의 근원이 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네 방패이다. 내가 너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그러자 아브람이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마스커스 사람인 제 종 엘리에셀이 제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입을 열어 말하게 마련입니다. 자식이 없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한이 되었으면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람이 또 말합니다. “주께서 저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셨으니, 제 집에서 태어난 종이 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네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이 아니다. 네 몸에서 태어나는 자가 네 재산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아라. 셀 수 있으면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들도 저 별들처럼 많아지게 될 것이다.”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는 이런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이다. 내가 너를 이끌어 낸 것은 이 땅을 너에게 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 아브람이 말하기를 “주 여호와여, 제가 이 땅을 얻게 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땅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오게 된 땅입니다. 하지만 그 땅 중 단 한 평도 아브라함의 것이 아직은 아닙니다. 그래서 도무지 그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자식은 준다고 할 때도 그럴 수 있지 했습니다. 후손이 많아지게 될 것이라고 할 때도 그거 될 수 있지 했습니다. 그런데 땅을 준다고 할 때는 이거 장난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그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를 가지고 오너라.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새끼 한 마리도 가지고 오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주께 가지고 왔습니다. 아브람은 그 동물들을 죽인 다음에 그 몸통을 반으로 갈라 서로 마주 보게 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새들은 반으로 쪼개지 않았습니다. 솔개가 죽은 동물들을 먹으려고 내려왔습니다. 아브람이 새들을 쫓아 버렸습니다. 해가 지자, 아브람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아브람이 잠든 사이에 어두움이 몰려왔으므로, 아브람은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은 나그네가 되어 낯선 땅에서 떠돌게 될 것이다. 그 땅의 사람들이 네 자손을 종으로 삼고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네 자손을 종으로 삼은 그 나라에 내가 벌을 주리니, 네 자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아브람아, 너는 오래 살다가 평안히 네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다. 네 자손은 손자의 손자 때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텐데, 이것은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은 벌을 받을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해가 져서 매우 어두운데, 갑자기 연기 나는 화로와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나서 반으로 쪼개 놓은 동물들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이 쪼개 놓은 동물 사이로 지나가심으로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맺으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400년 뒤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을 없던 것으로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으로 인해 살 것이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인 다음에야 100%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하나의 저주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으로 인해 살 것이라고 했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기에 결국 율법으로 인해 망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저주처럼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럼 처음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은 언약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약속하시고 율법을 핑계 삼아 그 약속을 깨버리신다는 것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말미암은 저주에서 우리를 풀어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 예수 그분이 율법이 우리에게 씌운 저주를 거두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사람은 다 저주를 받은 것이다.” 라고 성경에도 적혀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시고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이방인들에게도 미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믿음으로 받게 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약속을 맺으면, 아무도 그 약속을 무효로 하거나 어떤 것을 덧붙일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그 자손들이라 하시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네 자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약속이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그 언약이 그 약속이 우리들에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는 자녀들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우리 모두는 다 약속하신 복을 누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을 믿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복을 누리시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율법이 약속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산 위에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 골짜기를 가로 질러 산을 연결해주는 통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이쪽 골짜기에서 저쪽 골짜기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통나무를 타고 넘어야 합니다. 아니면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 멀리 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통나무야말로 이 산과 저 산을 연결하는 지름길입니다. 그 통나무로 한 마리의 염소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도 다른 염소 한 마리가 골짜기를 건너기 위해서 통나무로 들어섰습니다. 그만 두 마리의 염소가 통나무 가운데서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뒷걸음질을 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만 가기에는 통나무가 너무 좁습니다. 결코 두 마리가 서로 비킬 수 있는 공간은 전혀 없습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싸워서 상대편 염소를 떨어뜨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두 마리 모두에게도 다 위험한 일입니다. 뒤로 갈 수도 그렇다고 앞으로 갈 수도 없는 이런 때 두 마리의 염소는 어떻게 무사히 자기가 가고자 하는 쪽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그 중 더 힘이 세게 보이는 염소가 그 자리에서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염소가 그 염소를 밟고 가던 방향으로 넘어가고 그 다음 엎드렸던 염소가 다시 일어나 자기 가고자하는 방향으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때 서로 마주치면 머리를 맞대고 으르렁거리면 싸우기를 좋아하는 염소들인데도 불구하고 이 골짜기 위에 있는 통나무에서만은 서로가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간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게만 느껴집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 삶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도로 교통법이 있습니다. 도로 교통법에 의하면 차는 오른쪽으로 달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어디까지나 차가 생겨나고 보다 많은 차들이 도로를 달리게 되면서 정해진 규칙일 뿐입니다. 처음 차가 만들어졌을 때는 차가 꼭 오른쪽으로 달려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길에서 두 대의 차가 서로 마주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되고 그래서 각각의 차가 어느 쪽으로 비켜야 할까 하는 규칙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을 받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약속의 주님 복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아브라함은 찬양했습니다. 기쁨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 감사를 십일조에 담았습니다. 성심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또 기쁘게 받으셨고 이삭을 복되게 하시며 야곱을 복되게 하셨고 야곱의 자녀들인 요셉과 그 형제들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이런 기쁨과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날로 날로 생육하고 번성했지만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쁨과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여 율법을 주셔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절기를 지키라고 하셨고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으니까 규칙을 정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는다는 뜻 보다는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에 따라 아브라함에게 복을 베푸시고 그 후손을 복되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왜 주셨는가 하면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왜 생겼습니까?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편리하게 사용하고자 해서 생긴 자동차가 사람을 죽입니다. 왜요? 다 제멋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도로 교통법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고를 방지하고 죽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로 교통법을 만들고 나서 보니까 그것을 위반하는 사람이 있더란 말이죠. 결국 그래서 범법자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도로 교통법은 죄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만든 법이 아닙니다. 사고를 방지하고 죽음을 면하도록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만든 법인데 오히려 그 법으로 인해 범법자가 생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로 교통법의 원래의 목적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까? 아니죠.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원래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처벌이 목적이 아닙니다. 원래 목적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대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주신 분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을 받은 수 있는 자격이 내 스스로에게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면서 까지 지키라고 하시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주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안 지켜도 되는 것입니까?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신 뜻을 헤아려 기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약속의 주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키는 것이 아닌 오히려 명령 이전에 내가 기쁨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학생이라면 마땅히 즐겁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못하니까 부모님들이 규칙을 정하고 명령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저렇게 해라 공부해라 그러면서 꼭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라는 거야. 하지만 아이는 어떻습니까? 당장은 공부보다는 컴퓨터가 더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큰 소리가 오고가고 속상해서 씩씩대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자녀를 보며 부모의 마음을 썩어 들어가지 않나요? 그게 부모 위해서 공부하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성수 십일조, 공예배 출석 뭐 전도하고 봉사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머리가 다 지끈거리죠? 괜히 목사를 보면 미안하고 마음으로는 다 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도 않고 또 꼭 이래야만 하나 싶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율법 다시 말해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하는 규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행복을 누리게 되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약속을 주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기에 기쁨으로 주신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말씀을 따라 하라 하지 말라고 하는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벌을 받지 않고 복을 받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너머에 나를 복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안 계시고 또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따라 살고 율법을 지킨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약속은 오직 믿음으로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왜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대로 살라고 하십니까? 나의 본질을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왜 자녀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합니까? 그들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학생이라는 것입니다. 학생이라면 마땅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하기에 학생이 아니라 학생이기 때문에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학생이 아니라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걸 인제서야 깨달아 뒤늦게 공부해 보고 싶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요 그것을 깨닫는 그 순간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후회 없도록 도전하십시오. 그런데 그 공부도 뒤늦게나마 깨달아 혼자서 공부해보면 그게 쉽지를 않아요. 하지만 다시 학교나 학원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나태해지고 마음이 풀어질 때 다시 나를 다그칠 수가 있게 됩니다. 공부하는 자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당연히 주신 약속을 따라 우리가 복 받도록 만들려고 하니까 어떻게 해요? 억지로라도 복 받도록 만들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다 먼저는 그런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공부는 내가 열심히 해도 잘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지 반드시 잘 된다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에 이랬다저랬다 하는 분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래서 재물 사이를 하나님 혼자 타는 횃불 같이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엉뚱한 길로만 갑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규정을 정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주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주신 말씀을 따라 율법을 따라 살아보니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뭐에요? 믿음으로 약속의 주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모든 율법을 주신 원래 주님의 뜻을 깨달아 기쁨으로 실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 받기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복된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또 기뻐 받으시고 더 많은 것으로 주시고 이렇게 상승곡선을 그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믿음으로 순종하며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내가 불편하게 여기며 하면 불편하게 여긴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믿음입니다. 불편하게 여기는 믿음대로 더욱 불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받으면 그 믿음대로 더 기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의 근원 되시는 분이 바로 우리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만이 이 약속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보려고 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왜 자녀들보고도 그렇게 공부하라 공부하라 그토록 안달을 하십니까?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어서요, 우리 역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 없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우리가 복을 누리도록 주신 명령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또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억지로 한다고요? 저주 받기 싫어서 한다고요? 이왕이면 마음을 바꾸세요. 기쁨으로 하십시오. 복 받고 싶어서 복 받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된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 약속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순종하십시오. 열심히 충성하십시오. 기쁨으로 섬기십시오. 그래서 모든 약속의 자녀로서 주신 바 하나님의 약속된 모든 것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분 하나님 안에 모든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따라 왔듯이 우리 역시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될 때 그 믿음의 삶을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복된 인생으로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우리 모두가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순종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실천하라 하십니다. 힘들다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힘도 능력도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고 순종하십시오. 굳이 왜 꼭 그래야 되느냐고 어깃장 놓지 마십시오. 그래 보야 손해 보는 것은 나 밖에 없습니다. 

이왕 사는 것이라면 이왕 해야 되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사시고 믿음으로 순종하시고 실천하십시오. 괜히 혼자 똑똑한 척 하지 마십시오. 그건 똑똑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미련한 것입니다. 좋은 길 놔두고 험한 길로 갈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 그런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즐기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아요?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시고 주님의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실천함을 통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신 약속대로 복을 받아 누림으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복된 인생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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