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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함이 있는 믿음 (약 1: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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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있는 믿음 (약 1:22~25) 


야고보서는 로마서와 상반되는 표현으로 믿음과 행위의 중요성 및 불가분리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믿음이 있는 자는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보편적 진리를 결론지으며 믿음과 행위가 있는 실천적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여기 본문은 신자들이 말씀을 듣는 목적과 그 취지를 주의 깊게 설명하면서 행하기 위해서 말씀을 경청하라는 내용으로 우리들에게 접근하며 설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음악이나 미술품을 감상하듯이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서 자신을 완전하고 표준적인 신앙인으로 자부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종교적 독선과 교만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본문은 이런 자들의 신앙생활에 나타난 큰 허점을 지적하고 그 보완점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스스로의 부족을 인정하고 하며 말씀을 청종하면 더욱 은혜가운데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1. 행하는 자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낫게 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 11:27,28)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위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는 믿음보다도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의 축복이 얼마나 큰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행하는 자’는 희랍어(포이에타이)서 유래한 것으로 윤리적 측면의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포이에타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생활로서 증거하는 자를 말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어 늘 생활에서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의 실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배, 전도, 기도, 헌금, 구제... 등 중요한 여러 일들을 열심히 지켜 행합니다. 이런 일들을 더 알차고 내용 있고 생기 있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감동 감화를 힘입어 말씀을 지켜 행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읽는 시간이 수십, 수백 시간이라 할지라도 지키는 것에 전혀 사용치 않는다면 책망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롬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사람의 됨됨이는 이목구비와 사지가 바로 있고 조화가 되어야 정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듯이 신앙생활도 영적 듣는 귀만 크고 행하는 손과 발이 작거나 없다면 기형적인 신앙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보행을 할 때에는 앞을 똑 바로 보고 발을 앞으로 구르고 손을 앞뒤로 움직일 때 안전한 행진을 할 수 있듯이 신앙생활의 전진도 듣고 보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손발이 움직여야 명실상부한 행하는 자로서 규모 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하루에 1만보를 걸어야 좋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1만보는 6.5Km에 해당되는 거리입니다. 만보를 걸으려면 1시간 30분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적 운동은 역시 중요합니다. 영적운동은 실천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칼빈은 “말씀이 가라는데 까지 가고 말씀이 서라는 데에서 선다”는 사상으로 행동한 신앙가였습니다. 실로 우리도 이 같은 사상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은밀한 속삭여 줄 것입니다. 

(약 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 듣기만 하는 자

(약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여기에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가 그것을 행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참여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교회 집회에 참석하여 성경 말씀과 그 해석을 경청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하여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 출석만 하고 거기서 읽는 것과 말하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자입니다. 듣기만 하고 마는 것은 스스로 옳다고 하면서 그대로 행치 않으므로 그는 이중생활을 할 우려를 갖게 됩니다. 즉 들은 말씀을 인정하면서도 믿지 않는 이율배반의 모순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위선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행하는 체, 지키는 체하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듣기만 하는 자’ 즉 행하는데 관심이 없는 자는 결과적으로 영적 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우리는 교회에 여러 번 출석하여 설교자가 자기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여 주길 원합니다. 설교자가 자신의 감동시킬 때 흔히 우리는 그를 훌륭한 설교자라고 합니다. 또 모두가 감동을 받고 이구동성으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대체로 듣는 사람들은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처방을 받는 것으로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그 처방대로 따라 실행할 때에 비로소 완치됩니다.

목사님 혹은 설교자가 신령하고 은혜가 있다고 해서 듣는 자에게까지 신령이나 은혜가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 말씀을 이해하고 느끼도록 권유하는 것은 설교자 일지라도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듣는 자라는 것임을 인식할 때 우리들의 처신이 더욱 중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거룩한 장소에서 들은 것을 시장에서도 실행할 줄 아는 지혜로운 실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실천하려는 노력이 없거나 나약한 껍데기 신자보다는 실천하는 참된 알곡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식적이고 실천 없는 위선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눅 3:7-9) 말씀하셨습니다. 이 책망이 누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이겠습니까?

  
3. 말씀의 거울

(약 1: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여기에서 언급하는 ‘거울’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유리가 아닌 금속제품으로 닦아서 광을 낸 것입니다. 용모를 비췰 때는 명확치 않고 희미한 정도입니다. 그래서 거울 속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지만 희미한 모습만 볼 뿐 자신의 용모에 대하여는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맛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론적인 지식으로 차있는 그런 신앙을 소유한 자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말씀의 거울’은 세상의 희미한 거울과는 달라 사람의 용모를 있는 그대로 명확히 나타내고 우리의 형편을 그대로 명확히 나타내고 우리의 형편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선악을 분별하는 참 거울입니다. 여기의 용모는 우리의 육체적 본성, 우리의 사악함과 연약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말씀의 거울 앞에서 말씀을 경청 할 때 자신의 고쳐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없애야 할 것, 있어야 할 것, 등등 여러 가지 단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눅 11: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구약 열왕기상 22장에 요시야 왕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국가적인 신앙의 부흥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또 삼무엘상 7장에 나타난 미스바 부흥회는 전 국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대 각성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에 무관하였다면 이는 희미한 거울로 자신을 비취므로 자신을 단장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거울은 우리가 보고자 하는 부분을 세밀히 보여줍니다. 때문에 감동력이 있고 또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역사 합니다. 한편 구약의 바로 왕이나 신약의 헤롯 왕, 아나니와 삽비라 부부의 경우를 볼 때 이들은 대로 감동이나 뉘우침이 있었으나 신앙의 결실이 없는 과오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그리고 습관적으로 여러 번 혹은 수십 번, 수백 번 감동을 체험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즉시 행하는 데에는 대부분 실패합니다.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얻은 지식이 희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기만 하므로 그 말씀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참 가치는 그것을 실행하여 경험한 자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 7:24-25)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마태복음 13장에서 비유한 옥토에 떨어진 씨와 같아서 30배 혹 60배 혹 100배의 결실을 합니다. 

서양 우화에 두 마리의 개구리가 우유 통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데, 한 마리는 좌절하고 낙망 끝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는 좌절치 않고 끝까지 시도하는 중에 우유는 버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개구리는 딱딱한 버터 위로 올라 와서 우유 통에서 껑충 뛰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이 정치가 프랭클린을 찾아온 농부는 돌아갈 때에 그의 기념친필을 요청하였습니다. 벤쟈민 프랭클린은 ‘오늘 일은 오늘 하라’는 글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추수를 그날 다해 버렸는데, 다음날 많은 비가 오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 곳에 있는 농작물의 절반은 떠내려가거나 젖어서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농부는 프랭클린의 말대로 실천하므로 피해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겨울 벤쟈민 프랭클린은 그 농부로부터 통나무 장작 20마차를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결 론 

본문은 우리들에게 믿음과 행위가 있는 실천적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이야말로 살아 있는 신앙이며, 능력을 나타내는 믿음일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듣는 것에 너무 익숙하여서 말씀을 행하는 데에는 대부분 실패한다.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얻은 지식이 희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참 가치는 그것을 실행하여 경험함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서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므로 은혜가운데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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