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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의 박넝쿨과 하나님의 벌레 (욘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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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박넝쿨과 하나님의 벌레 (욘 4:1~11)


편견이라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해를 가지게 됩니다.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가장 좋은 부분도 안 좋은 부분으로 가려서 보게 되고 또 편견을 가지게 되면 사람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을 외곡하게 되고 외곡괸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 인생도 사람들에 의해 우리네 인생들입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오해도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오해는 특별히 이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장애인 주제에...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점점 더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 수도 있습니다. 오늘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2000년도에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우리 교회에서 발행하고 있는 우리신문의 주인공입니다. 가수 강원래씨가 2000년도에 사고를 당하고 지금 8년 정도 지났습니다. 처음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을 때에는 이 하반신 마비가 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반신 마비를 가진 그는 좌절했습니다. 좌절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좌절을 맛본 사람 너무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그는 죽으려 맘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좌절의 마음을 가지고 만이 내 인생이 이제 끝이다 라는 생각 때문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희망의 전도사로 젊은이들에게 휠채어를 타고 젊은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선도 대상자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을 하는 희망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장애인 이라는 편견이 싹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8년 이라는 시간을 극복해 내면서 장애를 극복해 낸 사람이 바로 가수 강원래씨입니다. 도리어 이제는 그가 만나는 사라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야 너희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8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이제 청소년들에게 향해서 너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희가 무엇을 하겠니 비아냥거리며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편견이란 이렇게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편견이란 또 깨지는 것입니다. 편견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못 세상을 향해 바라보는 관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깨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경에도 그런 인물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속에 나오는 주인공 요나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나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1절을 보면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라고 1절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왜 요나가 매우 성을 내야 할까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에 갔고 기쁨으로 가진 않았지만 물고기 배속에 갖혀있다가 가까스로 니느웨에 모래사장에 큰 물고기가 토해서 가까스로 니느웨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에 보니까 맨 처음에 니느웨로 가라 명령했던 상태가 아니라 다시스로 갔던 그 상태로 물고기 배 속에서의 그 순간의 아픔은 싹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싫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나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선지자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목사님입니다. 신약으로 치면 사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하나님께 대해서 어린이처럼 땡깡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까마득하게 물고기 속에 들어갔던 그 고통의 시간의 감정들은 다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가 왜 이렇게 하나님에게 대해서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싫어하고 성을 내고 있는지 그의 삶을 통해 살펴보고자합니다. 요나를 이해하려면 요나의 과거를 살펴보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1. 요나 선지자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편견이 보입니다.

요나서는 기록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요나가 직접 기록하였습니다. 요나가 기록한 이 성경은 요나는 공명정대하게 요나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필체를 보면 매우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행동은 신약시대의 어떤 사람이 생각나게 합니다. 신약시대의 어떤 사람이 생각나는 인물 없습니까? 생각나셨죠? 베드로는 나는 예수님을 어디든지 쫒아 가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혀갈 때 멀지감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요나의 삶이었습니다. 요나가 기록한 짭지만 이 4장의 성경은 너무너무 진솔한 성경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심성수가 자서전을 쓴다면 제 인생에 대해 디자인을 좀 더 하지 않겠습니까? 아주 똑똑하게 좀 예쁘게 한 일이 아주 사람들에게 칭송받은 것처럼 포장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글을 썻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기록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가지 않았던 자기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요나의 삶을 조금 더 보겠습니다.

요나에 관한 기록은 한 군데 나옵니다. 요나는 유명한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열왕기하 14:25에 보면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냐하면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맞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산에 용한 보살이 있었습니다. 이 보살이 얼마나 용했는지 일산뿐 아니라 분당에서도 오는 것입니다. 집을 몇 채씩 지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통이 났습니다. 무전기로 바깥에서 안으로 소스를 건네주는 것입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내용을 다 노출 시켜 주는 것입니다. 아니면 방석의 색깔이라든가 문양이라든가 어떤 모양을 가지고 들어가면 아 이것은 무슨 싸인이구나 하고 “남편이 바람피지!”, “애 때문에 왔구나!” 이렇게 족집게처럼 잘 집어내는 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번 뉴스에 사기꾼이라고 대서특필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성황중입니다. 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원합니까?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도 이와 같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했습니다. 요나가 한번 예언을 했는데 요나가 한 예언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요나를 휼륭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나에게는 이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희망의 전도사”, “희망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희망을 주는 사람, 기쁨의 사람이요 그는 기쁨으로 예언했고 이로 인해 요나는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요나입니다. 그러면 다시 요나가 4장 1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매우 싫어하고 성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2. 요나의 편견은 이중 잣대입니다.

요나는 지금 그렇게 인정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하나님에 대해 성을 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너무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관점은 그 잣대가 이중 잣대라는 사실입니다. 

자기 가족에 대해서는 아주 긍정적이고 좋은 희망적인 잣대로 또 이방 민족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벌하려고 하였다면 벌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지금 하나님께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믿는 사람들 중에 거기에서 더 열심인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들 중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엄마는 구전에 보면 사렙다 과부라는 설이 있습니다.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요나는 엘리야가 살려준 과부의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가 죽자 엘리야를 따라 선지자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한 가지 더 이 어머니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방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어머니는 이방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시돈지방 사르밧이라고 하는 지방의 이방인 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부계사회입니다. 아버지가 이스라엘 사람이면 엄마가 이방 사람이어도 아버지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방인 엄마가 자기 어머니인데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할 때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는 어머니이기에 감싸고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왜 멸하시지 않으십니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이중 잣대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중 잣대를 가질 구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사이에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중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관계하는 사람 어 왜 저 집사님은 나하고 뭔가 통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런 관계도 없고 성격도 틀린 것 같고, 저 사람은 유익이 되면 소심한 사람이야 저 사람은 직업이 뭐래.. 이런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면 요나와 같은 이중 잣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열심히 기도하고 그러나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나의 이중잣대요 그리스도인들의 이중잣대인 것입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 불평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배푸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금 화를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다툴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요나는 지금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을 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데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옵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나음이니다” 욥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자기 생일을 저주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불평이지 진짜 죽기위해 하는 것은 아닙니다. 


3. 요나와 박 넝쿨 

요나는 자신이 선포한 대로 니느웨의 결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에서 나가서 초막을 짓고 기다립니다. 혹시 잘못된 일이 있다면 니느웨는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보다는 자기 민족의 미래를 생각했던 그였기에 사십 일이 지나면 성이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요나가 어리석게도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 대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그의 피난처와 휴식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6절). 요나는 그의 초막에 앉아서 밤의 냉기와 낮의 열기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가 고집센 아이에게 하듯이 그를 측은히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박은 입이 넓은 식물로, 갑자기 자라나서 그의 초막을 덮었다. 박 넝쿨은 미약한 그늘 밖에 안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박 넝쿨이 바르게 사용되면 백향목 보다 더 가치있게 될 수가 있습니다. 조그만 장난감이 때때로, 박 넝쿨이 요나에게 했듯이 골난 어린 아이를 달래는 데 유용하게 쓰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분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나 요나의 반응은 오히려 하나님의 올바르지 못함으로 인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방의 구원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것을 기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요나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요나의 반응에 하나님은 다시 참으시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도 잘못을 저질렀으며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서 다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이렇게 인간들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임하고 계십니다. 자기의 이익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수십만의 생명이 멸망할 것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이익 여부에 따라서 박 넝쿨이 수십만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박 넝쿨을 통한 하나님의 교훈 

이것은 요나로 하여금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습니다(8절). "만일 박 넝쿨을 죽게 하실 것이라면 박 넝쿨과 함께 나도 죽여 주소서."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불평거리가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해서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와 담론하셨습니다.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9절). 하나님의 곤고케 하시는 섭리가 우리에게서 친척, 재물, 즐거움이 되는 것들을 앗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인내할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성내지 말아야 한다. 즉 그 '박 넝쿨로 인하여' 성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교적 적은 손실, 다시 말해서 그늘의 손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불만을 잠잠케 해주는 것을 박넝쿨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요나는 유별나게 자신의 격노와 불만을 정당화시켰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9절). 감정이 격해지게 되면 양심마저 무시된 채, 요나가 여기서 했듯이 잘못된 판단 가운데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에 대해서, 즉 짜증으로 자신이 죽게 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니느웨를 구워한 것에 대해 불평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요나 자신의 입으로 그를 심판하시고자 하신다. 그러나 요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 영혼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다 같이 중요한 것이며 하나님의 동일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인식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리기 위해서인데 요나는 말씀의 표면적인 뜻에만 국한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이 땅에 보내신 분입니다. 그 마음은 돌이키는 자들에게 언제나 구원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십니다. 
    
요나를 선택해서 부르신 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이야 어떻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요나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요나의 일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그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5.  결 론 

요나의 분노는 그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생각은 너무나 좁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편협 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죄악 된 모습을 발견하시면서도 그들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1)우리는 인간의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명이라 말할 때에는 누구든지 모두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요나의 의식 속에는 죄를 범한 영혼은 전혀 무가치하며 구원은커녕 복음에 접할 기회조차도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생각을 고착화 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 삼 일간 들어감으로써 이러한 그의 생각은 많이 시정된 듯했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승복시켜야 합니다.

순종을 뛰어넘는 승복이어야 합니다. 물고기 뱃속에 삼 일 삼 야를 보냈던 요나였습니다. 이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편견과 아집과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자기의 의견을 그대로 내세워 니느웨 백성들은 죽어야 한다고 하나님께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강요였으며 생트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뜻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승복할 때 능력이 나타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에 승복해야 할까요? 리더에게 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에 승복해야 합니다.

3)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잊고 말아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나 죄 범한 니느웨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이 죽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자신을 제쳐놓고 니느웨만을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그는 이미 물고기 뱃속에서 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범죄는 불신앙보다는 처음 받은 은혜의 망각에서부터 비롯됩니다. 

4) 이제 방관자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방관자는 특히 교회안에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눈여겨 봅니다. 다른 가람을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신 것은 니느웨의 멸망을 구경시켜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동역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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