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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헌금에 담긴 정신 (고후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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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에 담긴 정신 (고후 8:1~9)


1974년 저는 첫 미국 유학중에 여름 방학을 맞이하면서 카나다 토론토의 ‘Peoples church’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지금의 윌로우 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만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교회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그 당시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Smith)라는 목사님이 시무하셨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미국 첫 유학으로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근교의 Bible college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 학교에서 카나다 쪽으로 국경을 건너가면 두세 시간이면 토론토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미국 친구와 함께 이 교회를 향해 가면서 마구 가슴이 설레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제가 기독교 진리를 구도하고 있었던 20대초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이 쓴 작은 전도 책자중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나라’라는 글을 통해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구분하게 되는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며, 기독교는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으로 살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어떤 율법을 지키려는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한 인생을 위해 아니 율법을 이미 깨트리고 죄인된 인생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오직 그분을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받는 다는 결정적인 진리를 깨닫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그 교회에 도착하여 성전에 들어서자마자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의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도 7월 초순이어서 그 교회에서 여름철 단기 선교와 단기 봉사를 떠난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고 장기 선교로 파송되는 한 선교사를 축복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스미스 목사님은 그 선교사님이 본 교회에서 파송되는 70번째 선교사이며 협력하는 선교사까지 합해서 이제 그 교회는 약200명의 선교사를 지원하게 되었고, 이 여름철 비슷한 숫자인 약 200여명의 교우들이 해외 선교의 장에 나아가 단기 선교로 봉사하게 되었다고 보고하고 계셨습니다.

 당시의 한국 교회에는 단기 선교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고, 한줌의 해외 선교사 밖에 파송하지 못한 실정이어서 저에게는 이 숫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감동의 숫자였습니다. 저는 그 주일(1974년 7월초, 34년전) 그 교회 구석 코너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한국에 돌아가 목회를 한다면 어느 날 제가 섬기게 될 교회가 이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피플스 처치’만큼만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그리고 그 기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오늘 주일로 우리 교회에서 단독으로 파송되는 선교사님이 85명, 협력하여 지원하게 된 선교사님이 265명, 도합 우리 교회는 350명의 선교사님들과 동역하게 되었고, 이번 여름철 단기 선교사로 봉사하는 교우들만 국내외를 합하여 3,662명의 교우들이 이 여름 선교의 장에서 땀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녕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런 선교의 사명을 지속하는 교회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다시 되새겨야 할 헌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헌금을 통한 재정적인 헌신인 것입니다. 요즈음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와 함께 제일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이 바로 세계 선교의 마당입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말은 경제적인 위축이 오면서 성도들이 헌금을 통한 헌신에서 제일 먼저 후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가 칭찬한 1세기의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에서 헌금의 정신을 다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매주 드리는 헌금-이 헌금에 담아야 할 우리의 정신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1. 헌금은 헌신의 정신을 담아야 합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우리가 바라던 것 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배경은 예루살렘에 기근이 왔을 때 그 지역 성도들의 고생의 소식을 듣고 마게도냐 지역의 성도들이 헌금을 드린 상황을 바울이 칭찬하며 격려한 말씀입니다. 그들이 헌금을 할 때 그들은 단순히 헌금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단순한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헌금은 물질의 헌납이나 봉헌을 통해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행위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헌금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몇 푼의 돈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배후에 존재하는 헌신에 대한 우리의 철학을 시험하고 테스트하는 과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막12:41-44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날 예루살렘 성전의 뜰에 위치한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계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막12:41입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그날 예루살렘 성전 뜰에 서 계시던 주님이 오늘 우리가 섬기는 동일한 주님이시라면 그는 또한 매 주일 헌금함을 지나며 헌금하는 우리의 모습을 주목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가 이렇게 우리를 주목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헌금의 양에 대한 관심 때문이실까요? 아닙니다. 이 헌금에 담겨야 할 우리의 헌신을 주목하시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이 인상 깊은 장면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드린 한 가난한 과부 여인의 에피소드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막12:44입니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두개의 렙돈 배후에 존재한 자신의 전부를 드리고 싶어 한 그녀의 헌신을 평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헌금에 나 자신을 담아 드려야 합니다. 헌금은 헌신인 것입니다.


2. 헌금은 희생적인 헌신의 정신을 담아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이 정말 의미있는 헌신이 되려면 희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한 주석가는 소수의 교인들에 불과한 초대 교회가 당시의 세상을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초대 교인들의 희생적인 헌신 특히 희생적인 헌금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실례가 오늘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천거하는 마게도냐 교인들일 것입니다. 본문의 2절을 보십시오.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도 안되는 헌신을 주목해 보십시오. 자신들이 환난과 시련속에 있었고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남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다음 절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한마디로 놀라운 희생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런 희생의 헌금 정신이야말로 하나님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절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나는 저와 여러분이 이런 은혜를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독일 고백 교회의 목사이면서 나치 독일에 항거했던 본 훼퍼 목사는 당시의 독일 교회가 무력하게 나치 국가에 종속되어 영향력을 상실한 원인이 교회가 ‘값싼 은혜’(cheap grace)에 도취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대가를 지불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어떨까요? 초대 교회가 소수의 교인들로 세상을 바꾸었던 것이 희생적인 헌신 때문이었다면 오늘의 교인수가 적지 않은 다수가 되었음에도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희생의 정신을 상실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 믿고 이만큼 삶의 풍요와 평안을 누리고 있음이 우리의 선배들의 희생에 빚지고 있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는 실제로 너무 안이한 삶 속에만 안주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본래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영어로 표기하면 "sacrifice"라 했습니다. 제물은 곧 희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신을 제물로 드린다는 말은 곧 희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구약성경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왕이 아리우나라는 사람의 타작 마당을 방문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 경치 좋은 언덕에서 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요즘 말로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물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 마당의 주인이 왕이 자기 처소에 왕림하여 제사를 드린다 하니까 너무 감격해서 자기가 제물을 가져오겠다고 합니다. 그때 다윗 왕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삼하24:24입니다. “왕이 아리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다윗을 쓰신 이유를 짐작할만 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또 한번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은 희생적으로 자신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헌금의 정신-바로 이런 희생적인 헌신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3. 헌금은 사랑으로 희생하는 정신을 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모범을 칭찬하며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탁하는 8절의 바울의 권면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다.” 여기 사랑의 증명이란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희생적인 헌금 정신에 이어 사랑에 기초한 헌금 정신을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포드(Ford)라는 설교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법을 따라 드리는 의무의 정신이지만 그 이상을 드리는 것은 사랑의 증명이라”고. 그렇습니다. 옛 언약인 구약의 율법은 우리에게 모든 소유의 십분의 일을 드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법을 따라 드리는 것은 율법에 대한 우리의 당연하고도 의무적인 순종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새 언약의 정신을 따라 십분의 일 이상도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사랑의 고백이요, 사랑의 응답이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의 증명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굉장한 희생을 하면서도 사랑의 정신으로 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3:3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드릴 때 정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금하나, 이 헌금이 사용될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 그리고 진실로 선교지의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는가를 우리는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면 아낌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기뻐하시는 목적을 위해 진정 아낌없이 드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할일은 너무도 많고 광대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는 성도들의 희생적인 사랑의 헌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님이 자식 때문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한 성도가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제가 한 말씀드리겠으니 양해하고 들어 주십시오. 혹시 모르실수도 있으시겠습니다만 저는 얼마 전 저의 자식을 잃었습니다. 저에게는 자식만 살아 있다면 아니 자식을 다시 살릴 수 만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기쁘게 감당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헌금의 태도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드린 헌금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살리고 구원할 수만 있다면, 아니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 세상에 그의 사랑을 증거 할 수만 있다면, 저는 저 자신을 기꺼이 사랑으로 희생적으로 드릴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우리의 헌금에 담아야 할 고백적 정신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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