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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야! 모세야! (출 3:1~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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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야! 모세야! (출 3:1~6, 13~15)


지난 주간 여름휴가로 보냈습니다. 주일이 되었는데, 어느 교회를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까?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던 남해도를 처음으로 갔는데, 그래서 창원에 있는 양곡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작년에 우리교회에 부흥회를 오셨던 목사님이 설교하시는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한 주일 쉬는 것에 불과한데, 강단에 서서 말씀선포하는 목사님이 어찌나 부럽게 느껴지던지 주일강단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크신 은총이며, 귀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후에는 부산에 가서 대송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동창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인데, 제가 준비하여 간 말씀과 목사님이 주보에 올렸던 본문이 거의 같아서 얼마나 은혜가 있었는지, 교우들에게도 은혜가 되었고, 목사님과 사모님에게도 은혜가 되었습니다. 사모님이 은혜 받았다고 말씀하시니 은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출애굽기 3장에 나타난 모세의 소명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히브리(hebrew)인, 히브리 민족이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인이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지칭하는 독특한 명칭입니다. 창14:13에 보면 “히브리 사람 아브람”라고 하는 말이 처음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아브람을 부를 때에, 히브리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BDB 사전을 참고해보면 히브리라는 말은 셈의 후손인 ‘에베르’란 말에서 나온 말인데, 에벨의 사람들, 에벨의 후손이라는 말이 됩니다. 단어를 연구해보면 ‘저쪽 넘어’, ‘저편에서 온 사람’, ‘강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유프라데 강을 건너온 사람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 그들 토착민의 눈으로 보여진 아브람의 가족은 강을 건너온 사람, 이방인, 저편에서 온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히브리인라는 말은 경멸하는 이름이요, 이주자, 이민자, 낯선 자, 저쪽에서 온 자들이라는 조소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이 경멸하는 이름을 자랑스러운 민족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항상 낯선 자, 저쪽에서 온 사람들, 떠돌이였음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데, 430년간 노예로 살았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노예 족속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35년간 굴욕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일제 36년간이라고 하는데, 1910. 8. 29일이 국치일인데, 1945. 8. 15에 해방되었으니, 만35년에서 13일이 모자라는 기간입니다. 햇수로 치면 36년이라고 하지만, 36년간 1등이 아닌 2등 국민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430년 간 노예로 살았다는 기간에 비하면 사실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상과 가치관과, 언어와 제도가 달라지고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무려 430년이란 오랜 시간 노예생활에 젖어 있었는데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생각하면서 민족정신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정말 주목해야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민족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들 위에는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었습니다. 감독들이 항상 따라다니며, 간섭하고 일을 시키는데,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였고,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 애굽의 전체 농사를 짓는데, 그것은 다 히브리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애굽의 황제 바로는 히브리 민족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였습니다. 산파들에게 몰래 지령을 내려 “히브리 여인들의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애굽의 왕이 화가 나서 산파를 잡아들였는데, 산파들이 왕에게 변명하였습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그렇게 슬쩍 돌려서 말했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그들 산파의 집안을 흥왕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야만 합니다. 권세 있는 왕의 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레위 가족 중의 한 사람인 아므람이 그의 아버지의 누이인 고모인 요게벳과 결혼하여 위로 딸인 미리암을 낳고, 장남으로 아론을 낳았는데, 아론 밑으로 차남인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요게벳이 아들을 낳았는데, 잘 생겼습니다. 그 때는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지고 딸이면 살려두라고 하던 때였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석 달 동안 숨겨 길렀습니다. 아이가 크게 울기 시작하고, 더 이상을 숨겨 기를 수 없어, 갈대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서 있었습니다. 

이 때에 갈대상자를 ‘테바’라고 합니다. 작은 테바이기에 ‘상자’라고 하였지만, 방주(Ark)라고 번역하는 말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그의 가족과 동물들이 대홍수를 면하게 하신 것이 방주입니다. 역청을 칠하였는데 석유를 정제하지 않은 원유였습니다. 나일강가에 원유가 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기가 태어나 1년 어간은 생명을 잘 먹이고, 놀라지 않게 잘 보호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기를 상자에 담아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으니, 정말 부모로서는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마침 바로의 딸이 나일강에 나아와 목욕을 하려고 하였는데, 어린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듣고 갈대상자에 담겨 있는 어린 아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바로의 공주는 어린 아이를 보는 순간 히브리 아이인 것을 알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이 조르륵 달려가서 공주에게 말을 붙입니다. “제가 가서,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아기에게 젖먹일 유모를 데려다 드릴까요?” 바로의 딸이 “그래, 어서 데려오너라” 그 소녀가 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 왔습니다. 바로의 딸이 엄마에게 말합니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나를 대신하여 젖을 먹여다오. 그렇게 하면 내가 너에게 삯을 주겠다.” 했습니다. 

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기 아기를 기르면서 젖을 먹이고 그 삯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자리에서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시고, 모든 사람들이 낙심하고 포기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도 피할 길을 주시고,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 아이가 다 자란 다음에 그 여인이 그 아이를 바로의 딸에게 데려다 주었는데, 바로의 공주는 그 아이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공주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다”하면서 그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의 ‘건져내다’는 뜻의 ‘마샤’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히브리식으로 해석하면 “물에서 건져내어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애굽어에도 모세라는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왕들의 이름에도 ‘가-모세’, ‘투트모세’, ‘아-모세’라는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애굽어 “므스-ms”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출생’이라는 뜻입니다. 모세라는 말은 “물의 아들”을 뜻하는 ‘모스’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봅니다. 

구약신학자 중에 그리피드스(Griffiths)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모세의 이름을 가지고 집중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름에 대한 연구를 끝맺고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모스에 기원을 둔 이름인 것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야웨 종교의 창시자가 애굽인의 이름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사실이라고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시는데, 애굽의 바로의 공주를 불러오시고, 애굽의 귀족들이 사용하는 이름을 사용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이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핍박자를 들어 사용하여 복음을 널리 증거하게 하십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문물과 학문을 섭렵하면서 40년을 보내게 됩니다. 모세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모든 법령을 제정하고 발표하는데, 실은 모세는 학문적으로 유일하게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의 남자들은 다 중노동하는 노예요, 혹 노예를 감독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으로는 모세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스데반이 구약을 설교하는 것을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행 7:22)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였을 때에, 세상에 나와서 막상 자기의 동족 히브리인의 고통을 보고, 자기 동족 편에 설 수 있던 것은 유아 시절에 모친 요게벳에게 양육 받은 때문이라고 봅니다. 막상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히브리 편에 서고, 애굽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모세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도저히 애굽 사람이 될 수 없는 피가 끓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동족 히브리인들이 날마다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에 애굽 사람의 십장이 히브리 노예를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히브리인을 때리는데, 그러다가는 사람을 죽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히브리 사람은 자기의 형제였습니다. 그는 노예로 살아가는 히브리인들을 자기 형제라고 보았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 같으면, 자기의 출신을 속이고, 출세하려고 합니다. 그가 성공하였으면 출신 성분을 감추고 애굽인과 결혼하고 어떻게 하든지 애굽 사람으로 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힘들게 살아가는 민족을 생각하고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어머니의 유아교육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쳐다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 속에 묻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거리에 나가보니 이번에는 히브리 사람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한 사람이 크게 잘못하고는 잘못했다는 말도 하지 않고, 사람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어찌하여 같은 형제를 치느냐?”고 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모세가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되었고, 바로가 사건을 알게 되자, 더 이상 애굽에 머물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국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하여 그동안 공주의 양자라는 것 때문에 미운 오리 새끼 같지만, 참아주었는데, 이때다 싶어서 모세를 체포하여 압송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다급해졌습니다. 애굽에 남아 있다가는 바로의 분노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습니다.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일곱 딸이 양떼를 치는데, 다른 목자들이 와서 자기들이 먼저 우물을 열고 양떼에게 물을 먹인 다음에 물을 먹이라고 하였지만, 모세가 나서서 여자들을 도와 먼저 물을 먹여주었습니다. 모세는 활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정처도 없이 길을 가는 중인데, 하나님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데릴사위가 되게 하시고 붙잡아두시고 있습니다. 애굽의 황제의 딸의 양아들이요, 애굽에서 호의호식하던 사람이었는데, 남자들이 자존심을 접게 만드는 데릴사위로 내려앉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를 준비해두시고, 그의 맏딸 십보라를 아내로 삼게 하셨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미디안에서 다시금 애굽으로 돌아가서 민족을 구하겠다는 그런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목자로 일생을 마칠 것처럼 아무런 욕심도 없이 양떼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가 양떼를 기르면서 40년 동안, 양이란 짐승은 목자를 잘 만나야 하고, 목자가 성실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미약한 동물인 것을 알게 했습니다. 모세는 양치는 목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혈기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 양치는 목자입니다.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자연을 벗 삼아 다녔습니다. 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양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하셨습니다. 양을 사랑하지 않으면 돌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혈기 왕성하고, 의분에 가득하였던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낮아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미디안에서 연단시키시고 새롭게 불러 세우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실패와 환란에서 헤매고 있습니까? 너무나 고통스러워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까? 하나님은 연단시키시고 고통 속에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고 있습니다. 미디안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처야 하는 훈련소입니다. 사람이 고독을 곱씹을 때에 성숙한 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교만하던 성격이 다 꺾이고 모난 부분들이 원만하게 다듬어져야 합니다. 

모세는 그의 장인의 양 떼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기를 광야에서 40년 세월입니다. 모세의 나이 80세였을 때에 하나님은 양떼를 인도하는데,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에 희한한 광경이었습니다. 나무에 불이 붙었으면 나뭇가지를 태우고 사그라지든지, 아니면 맹렬한 기세로 붙이 나서 다른 나무로 옮겨 붙든지 해야 하는데, 한 나무에만 불이 붙었는데, 불이 활활 타는데, 나무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생각합니다.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사라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가 떨기나무의 광경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당신의 종으로 삼으시지만, 성별의식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여 너무나 친밀하게 생각하고 분별 없이 가까이 하려하고, 하나님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발의 신을 벗으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고 옛날 종들에게는 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철저하게 헌신하라는 것을 말씀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세워 고통 받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건져내겠다고 하셨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지금도 여전히 고통받고 있으며, 탄식하는데 그 고통 하는 소리가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에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모세를 부르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가던 길을 멈추게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려는 계획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물에서 건져낸 사람”이라, “물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는 죽을 수밖에 없고, 물에 던져져 죽어야 했던 핏덩이에 불과하였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살려두시는 것은 내가 불러 쓰려고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의 이름을 불러줄 일이 별로 없습니다. 노회나 총회에 가면 전에는 호명을 하였는데, 지금은 유인물로 대신하여 체크하는 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교회에서나 이름이 불러지고 사용되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름을 부르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고요한 밤중에 기도하던 중에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을 불러 세우시고, 하나님의 사역에 쓰시려고 합니다. 80세의 나이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부르심을 받았고, 모세는 80세의 나이에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목숨을 유지하며 살게 하시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위함입니다. 

역사상에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보면 모세는 단순히 히브리 민족이나 인도하는 지도자로 세우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의 소명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 히브리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는 소명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과 그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로 삼으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신 것은 단순히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 세상에 펼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모세는 너무나 크신 부름과 사명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시며, 그들 조상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 하나님이십니다. ‘야웨’라는 이름의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아니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굳이 직역해본다면 “나는 내가 나 되게 하는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만물을 있게 하는 자, 창조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면서 지금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부름을 받았다면 정말 엄청난 영광으로 알고, 헌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영혼을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여름휴가도 지나고 이제는 올해의 후반부를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새생명축제가 남아 있습니다. 신앙의 결실이 바로 새생명축제입니다. 우리는 가을에 알찬 열매를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응답하는 것이 가장 알찬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현재의 모습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현재의 모습은 참 모습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서 능력의 지팡이를 받아야 합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동행하시고 역사하겠다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는 사람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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