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삼손(2) : 혼인 수수께끼 (삿 14:1~18)

  • 잡초 잡초
  • 1281
  • 0

첨부 1


삼손(2) : 혼인 수수께끼 (삿 14:1~18)


I. 고독한 전사

구약 역사 가운데 가장 참담했던 사사시대 -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사사로 부름받은 사람이 삼손입니다. 삼손은 “태양”을 뜻하는 셈쉬(Shemesh)에 ‘on’이라는 지소사가 꼬리에 붙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셈쉬온’ 삼손은 ‘작은 태양’ ‘한줄기 햇빛같은 아이’(sunny-boy)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둠의 땅에 한줄기 햇빛이 비춰지기 시작할 때 “보라, 야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삼손이로다”라고 우리는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사기 삼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삼손이 무슨 실수를 하나” 두 눈을 뜨고 찾을 것이 아니라 삼손의 약점과 실수 그리고 실패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관심과 시선을 두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삼손 드라마의 진정한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한 바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며 “저게 뭐야?” 그랬더니 다른 바보가 “손가락” 그럽니다. “왜 저렇게 밝아?” 그랬더니 “너, 메니큐 칠했잖아” 그럽니다.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만 쳐다봅니까. 손가락이 가르키고 있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삼손이야기는 손가락입니다. 저 배후의 하나님을 보라는 겁니다. 

13장 마지막은 “삼손이 태어나 자라매”라는 말씀으로 마칩니다. 
14장 1절 한 두절 사이에 얼마만큼 자랐느냐? 장가를 갈만큼 자랐습니다. 그래서 14장은 삼손의 결혼식 얘기입니다. 

13장 마지막 25절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움직이기 시작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하네단이란 “단의 캠프, 단 지파의 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성령이 역사할 때 삼손은 바로 다음절 14장 1절 이하에 이방여인과 결혼식을 합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얘기입니까? 지금까지 대부분 사사들은 원수를 무찌르기 위해 군인을 모집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이방여인과 혼인식을 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령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원수의 족속 블레셋 여인과 결혼을 하다니?

당시 이스라엘은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는 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삼손이 나팔을 불어 군사를 모아 모아도 지원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아예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잃어버린 약속의 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누구인지, 이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왜 싸워야 하는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가나안 땅에 왜 들어왔는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사기 저자는 우리에게 이 모습이 바로 네 얼굴 아니니?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지금 삼손이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을 깨우쳐 함께 싸움터로 나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삼손이 고독한 전사로 오직 나 홀로 싸워야 하는 그 전쟁전략이 결혼식이었습니다. 결혼잔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족속과 결혼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결혼을 통한 속국정책, 동화정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민족적 정체의식이 사라져 가고 있을 때에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을 아예 블레셋에 통째로 편입시킬 생각이었습니다. 삼손의 결혼은 이런 블레셋 정책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이 위장결혼을 통해 블레셋을 공격할 기회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14장의 문이 열려지면 삼손이 딤나를 내려갑니다. 이곳은 삼손이 속한 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인데 블레셋이 주둔하는 바람에 단 지파는 산 기슭에 웅크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이곳을 제일 먼저 치기로 작정합니다. 거기서 블레셋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 그 블레셋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부모님께 말합니다. 그때 삼손의 부모가 하는 말이 여기 단지파 처녀들도 있고 다른 형제지파 규수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고 합니다. 여기 “할례받지 아니한” 이 말은 블레셋을 멸시하는 말이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 표현입니다. 

이때 삼손이 부모에게 하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용모가 아름답다고 말할땐 “톱”이란 말을 씁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야사르”라는 말은 “옳다. 정당하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야샤르는 사사기에서 대단히 유명한 말입니다. 

사사기에서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고 할때 옳다는 말이 바로 “야사르”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내가 히브리인으로서 블레셋 여인을 사랑하여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블레셋 여인과 혼인을 해야 하는 옳은,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정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혼을 통해 블레셋을 치는 겁니다. 

삼손이 철부지 사사라서, 아니면 삼손을 플레이 보이라서 여성편력을 시작한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분들은 이 결혼이 전략적 결혼이요 위장 결혼이었다는 해석을 받아 들이기가 퍽 어려울 것입니다. 

14장 삼손의 결혼사건을 해석하는 핵심 구절 4절이 뒤따라 나옵니다. 


II. 전략 결혼

4절을 보십시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삿14:4)

이것이 삼손의 엉뚱한 짓에 대한 성경의 해석이요 평가입니다. 이 해석은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다. 삼손이 전략결혼을 통해 블레셋 사람을 칠 틈을 찾고자 했다. 그의 부모는 모르고 있었다. 이 전략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을 하듯이 삼손은 하나님의 백성은 아직 죽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완전히 포기하신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원수 족속의 딸과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지파가 많으면 뭘하고 백성이 많으면 뭘합니까? 군사로 쓸놈 한놈이 보이질 않습니다. 기드온을 따랐던 300명 용사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홀로 전쟁터에 나서 게릴라가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게릴라 전략이 위장결혼 작전이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 동화정책이 먹혀 들어가 삼손 같은 인물조차 블레셋으로 귀화하고 있구나 안심하고 있을 때 여기 딤나 땅을 칠 합법적 이유, 틈을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삼손의 결혼식은 이스라엘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일종의 거사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사람이 다 죽은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속국으로 이땅에서 사라져갈 백성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삼손은 혼자서 3.1만세 운동이라도 펼치고 싶었습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사사기 저자는 해석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방 족속과 결혼을 해도 좋다고 허락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모를 거역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삼손의 배후에서 삼손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죽은 땅에 새로운 구원을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이 짓밟혀 죽도록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수도 많아졌고 대형교회도 많아졌고 교인도 많아졌습니다. 그 많은 교회가 영적 전투력을 상실했다면 그게 바로 사사시대입니다. 그 많은 교인이 하나님 나라의 강한 군대가 되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삼손시대입니다. 삼손이 사사가 되어 블레셋과 싸울 때 유다지파는 삼손을 묶어 블레셋에게, 원수에게 넘겨줍니다. 사단을 무찌르고 이 땅에 복음전하여 구원하는 일에는 무능무력하고 교파끼리 싸우고 교회끼리 싸우고 교인끼리 싸우고 사사를 묶어 원수에게 넘겨주는 시대라면 그게 사사시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누군가 지금 우리 시대를 일컬어 적과 아군을 분별 못하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정글 밀림을 질주해야 할 사자가 동물원에서 사육사가 던져주는 고기나 받아먹고 사는 꼴입니다. 독수리가 날개가 적어 날지를 못하고 참새의 조롱거리가 된 꼴입니다. 얘기 칫솔이 엄마 칫솔에게 엄마 우리 칫솔 맞지? 그럼 칫솔이고 말고. 그런데 왜 우리는 이빨 안 닦고 운동화만 빨고 있어? 이게 우리 꼴 아닙니까? 


III. 젊은 사자를 찢다

삼손이 부모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지만 결혼 승낙이 되어 블레셋 이 여인의 집을 드나들게 됩니다. 한번은 처가가 있는 딤나 마을 포도원을 찾아갑니다. 나실인이 먹지 말아야 할 포도를 찾고 있습니다. 거기서 젊은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 장면 - 삼손이 젊은 사자를 찟어 죽이는 사건을 주일학교에서 얼마나 손에 땀을 쥐고 들었습니까? 그 이후 로버트 태권V, 슈퍼맨, 600만불의 사나이, 두 얼굴의 사나이, 마징가 제트 하면 삼손을 떠 올리곤 했지요.

성경은 바로 이 순간 중요한 기록을 남깁니다. 
6절 “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다”

그런 소중한 경험이 있은 얼마후 삼손은 다시 그 여자가 있는 딤나 마을로 갑니다. 바로 그 포도원 곁을 지나다 보니 갑자기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내가 죽인 사자가 어떤 꼴을 하고 있을까? 사자의 시체에 야생벌들이 벌집을 짓고 꿀을 잔뜩 모아놓았습니다. 손으로 그 꿀을 떠서 먹고 길을 가며 꿀을 실컷 먹고 그 부모에게도 꿀을 드려 먹게 합니다. 이번엔 시체를 만지거나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야 할 나실인이 사자 시체를 가까이 하고 시체에 매달린 꿀을 먹습니다. 

사자의 시체에 벌떼가 꿀을 모아 두었다는게 금방 이해가 안됩니다. 벌은 부패한 동물위에 벌집을 짓지 않습니다. 사막에서는 시체가 부패과정을 거치지 않고 금방 바싹 말라 바위처럼 굳어 질 수가 있습니다. 혹은 다른 짐승이 금방 시체를 뜯어 먹고 남은 뼈에 벌집이 매달려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8절에서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전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자의 시체가 금방 굳어 바위처럼 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건을 접하는 독자들은 해석상 혼란을 겪게 됩니다. 나실인이 포도원을 찾고 시체를 만지고 거기서 난 꿀을 먹는 이 일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런 과정에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다. 삼손의 결혼식 준비는 가슴이 설레이는 행복이 아니라 가슴 조이는 전쟁준비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물론 부모들도 이해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외롭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바로 이때 젊은 사자를 통하여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이 결혼 작전을 통해 블레셋을 칠 틈을 노리는 것은 참 잘한 것이라는 여호와의 보증입니다. 이 작전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할 것이니 두려워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실인이 포도원을 가까이 한 것도, 시체를 만진 것도 다 인정하고 용납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랑입니다. 삼손의 혼란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삼손이 영적으로 약해져 있기 때문에 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사시대가 영적으로 어두웠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인도하심이 필요했습니다. 삼손이 사사로서 혼돈된 정체의식을 가지고 혼란스런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사기를 읽는 우리조차도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깨끗하고 정당한 삶을 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충성된 삶을 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사업이 잘되고 있습니까? 가정이 평안하십니까? 당신의 주가가 오르십니까?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십니까? 자녀들이 세상에서 사랑받고 있습니까? 반드시 당신이 하나님 앞에 잘 살아서 그런 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님은 누구보다 당신 자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두려워 마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죄와 실수, 약점과 허물을 모두 인정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내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고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경험, 축복, 기적의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겁니다. 


IV. 수수께끼

본문 10절부터 결혼잔치가 벌어집니다. 이 잔치는 신랑 삼손이 신부집에서 잔치를 베푼 것으로 되어 있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었다고 말합니다. 거기 잔치에 참여한 신랑의 친구들이 모두 블레셋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결혼 후에도 부인이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러한 블레셋의 혼인 풍습을 “차디카 혼인”이라고 부릅니다. 차디카란 연인, 애인, 현지처라는 뜻입니다. 차디카는 신부집에 지참금을 주고 부인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혼인 후에도 신부는 친정에서 삽니다. 신랑은 신부집을 방문할 때 마다 돈이나 선물을 가지고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공인된 현지처 같은 것입니다. 

삼손의 부인으로 선택된 이 여인을 사사기 14장은 처녀라는 말을 쓰지 않고 줄곧 여자라고 합니다. 원문에서도 처녀 - 베툴라가 아닌 주로 결혼한 여인을 가르키는 여인 - 이솨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과부나 이혼녀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랑의 잔치 친구로 30명이나 초대한 것을 보면 딤나 마을에서 대단히 영향력이 있는 집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 같지 않은 결혼식, 신부 같지 않은 신부, 친구 같지 않은 친구들, 그래도 삼손에겐 비교적 든든한 후원군이 될만한 처가댁... 합법적인 시비거리가 생겨 한판 붙게 되면 그럴듯한 싸움이 될만한 상황을 삼손은 설정한 것입니다. 

결혼 잔치에 흥이 달아오르고 절정에 이를 무렵 삼손이 싸움판을 준비합니다. 수수께끼를 내서 맞추면 상을 주는 그들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수수께끼 상금을 엄청나게 크게 걸어 도박판이 되게하고 마침내 그것이 시비와 싸움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합니다. 베옷 - 즉 비단 속옷 30벌, 겉옷 - 요즘으로 말하면 비싼 양복정장 30벌 내기를 합니다. 모인 들러리 친구 30명의 겉옷 속옷을 발가벗겨 놓겠다는 것이지요. 

신랑이 들러리들이나 마을 사람들을 무작정 죽일 수는 없지요. 그러나 옷을 벗어라 못 벗는다. 장난한 것 가지고 왜 이러냐 게임은 게임이다. 비겁하게 굴지마라. 이래서 30명 친구들이 폭동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싸움을 격하게 만들어 일순간에 그들을 죽이겠다는 계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정당방위 상황을 만들어 가는 거지요.

14절 수수께끼가 참 애매모호합니다. 수수께끼란 원래 애매모호하지만 그 해답을 알고 나면 명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신선함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삼손의 수수께끼는 그 해답이 질문보다 더 애매모호합니다. 수수께끼는 “이게 뭐지?” 질문 형식이 되어야 하고 대답은 “그것은 이거다” 서술 형식이 되어야 하는데 삼손의 수수께끼는 서술문으로 되어 있고 대답이 오히려 질문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수께끼란 보편 타당성이 있어야 하는데 삼손의 수수께끼는 자신만이 경험했던 내용을 가지고 수수께끼라고 던집니다. 

애매모호, 알송달송, 아리까리, 이게 삼손의 수수께끼입니다. 
(독일) (프) (일본)

그래서 주경가들은 여기 수수께끼는 성령의 사람인지 천방지축 철부지인지 애매모호한 삼손 자신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사시대 즉 족장시대, 지파시대도 아니고 왕정시대도 아닌 모호성의 시대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삼손이 활동하던 무대 소다, 딤나, 아스글론, 소렉골짜기, 가자 지역 - 즉 평지도 산지도 아닌 어중간한 산기슭 애매모호 지역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멋대로 낸 수수께끼, 자기만 아는 정답. 이것이 삼손의 수수께끼 넌센스입니다. 수수께끼가 아니라 차라리 넌센스 퀴즈입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이게 수수께끼입니다. (성서연구가 바우엘, 포터, 가스터, 넬 같은 사람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건 섹스다 성생활이라고 대답하리라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을 청년들이 삼손의 부인을 협박하고 부인의 눈물어린 사랑투정으로 알아낸 정답은 18절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입니다. 이 일로 삼손이 정당하게 블레셋 딤나 도시를 치겠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애써 수립했던 전략을 자기 자신이 일순간에 무너뜨립니다. 사자보다 강했던 삼손 꿀앞에 맥을 못 추었듯이 사자같은 사사 삼손은 꿀같은 여자 앞에 늘 맥을 못추다 걸핏하면 실수, 실패를 반복합니다. 

삼손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블레셋을 치기 시작했는지 14:19부터 15장에 계속 나오게 됩니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 30명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옷을 빼앗아 오는 얘기. 삼손이 여우 300마리를 붙잡아 꼬리를 묶고 불을 붙여 블레셋의 곡식 밭을 태우는 얘기. 삼손이 나귀턱뼈로 일천명 블레셋 군인을 죽이는 얘기... 감동과 서스펜스... 다음 시간을 기대하시라!


V. 사자와 꿀

삼손이 딤나 포도원에서 경험했던 두가지 사건은 삼손을 지켜주는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하여 젊은 사자를 찢어 죽일 수 있었던 승리의 경험입니다. 두 번째는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떠 먹었던 실패의 경험입니다. 삼손이 이 경험을 늘 묵상하며 소중히 간직했더라면 딤나의 포도원은 삼손의 영성의 고향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젊은 사자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경성하지 아니하면 꿀에 미끄러져 넘어질 수도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나는 이리떼같은 블레셋 앞에 젊은 사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깨어 있지 못하면 나는 그들에게 꿀이 되어 그들이 나를 빨아 먹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도 딤나의 포도원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승리의 경험, 작은 유혹을 이기지 못해 실패하고 넘어졌던 경험의 고향 말입니다. 사자를 이긴 당신이 꿀에 넘어졌던 경험이 없습니까? 그토록 멋지게 헌신했던 당신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넘어진 경험이 없습니까? 그 엄청난 기적을 체험한 당신이 그 보잘 것 없는 시험에 쓰러진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큰 복을 주셨는데 그 지푸라기 같은 것을 붙들고 바둥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삼손이 사자를 찢어 죽인 딤나의 포도원 경험을 묵상하고 있었더라면 블레셋을 칠 틈을 찾는 게임도 거기서부터 지혜를 얻어야 했습니다. 내가 삼손이었다면 30명과 차례대로 팔씨름 경기를 했을 것 같애요. 10명씩 차례로 줄당기기를 했으면 어떨까요? 이왕 수수께끼 게임을 시작했으면 꿀에 넘어진 사건을 기억하고 꿀같은 아내의 꼬임에 넘어가지 말아야지요. 삼손은 지금 하나님이 주신 성공의 경험도 자신이 겪었던 실패의 경험도 소홀히 간직하다가 또다른 실패를 겪게됩니다. 이 엄청난 삼손의 실패를 하나님이 어떻게 만회하시는지 다음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하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