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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갈 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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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갈 4:8~20)


우리 교회는 매년 이맘 때에 제자훈련을 비롯한 여러 훈련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서 서로 호흡을 맞추며 새로운 리듬을 준비한다. 다가올 9월 부터 새로운 한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새롭게 제자훈련에 참여하는 분들은 담당 목사님들과 대화를 하며 훈련을 위해 부탁하는 말씀을 나누게 된다. 제자훈련을 위한 새일꾼반도 그렇고 제자훈련 이후에 진행되는 사역훈련도 마찬가지이다. 

이 일을 위해서 이번 주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교역자 DT forum의 시간을 갖게 된다. 모든 교역자들이 영적인 준비를 하는 아주 exciting한 수양회가 될 것이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훈련을 받고 양육 받는 교회이다. 주보 앞면에 있는 우리 교회의 사명 선언문을 보더라도 이러한 내용이 잘 나와 있다. 

함께 읽어보자. '예수의 온전한 제자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공동체’ 그렇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공동체이다. 

이민 생활이 힘들어서 지쳐 있을데 왜 교회도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편한 삶을 좋아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속성이다. 우리 교회는 왜 제자훈련을 이렇게 강조하는가? 이것은 말씀을 통한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였고 무슨 사역을 하였던가? 

막3:13-15을 읽어보자.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주님은 산에 오르시면서 따르던 많은 무리들을 놓아두셨다. 이것은 결코 그들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략 중 하나였다. 물론 주님은 모든 무리를 사랑하시지만 그 순간은 그들을 떠나서 12명의 제자를 세우시는 일을 하셔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주님은 무엇을 하셨나? 

먼저,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사셨다. 이것은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의 모델을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둘째, 보내어 전도하게 하셨다. 사역을 하게 하신 것이다.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통해서 실천적 삶을 배우게 하셨다. 그리고 셋째, 악한 영을 내어쫓게 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철저히 훈련된 자들을 세우시려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자들을 세워서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마지막 지상명령을 주시며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지상의 마지막 명령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 마지막 부탁이며 일종의 유언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이행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서 이후의 서신서에서도 이같은 주님의 뜻이 많이 나타나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19절을 다시 보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사도 바울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그들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지속적으로 훈련을 통해서 자라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것은 명확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훈련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model 되심과 전략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훈련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몸을 쳐서 순종하기까지 훈련을 받아야 한다. 갈라디아인들이 훈련을 받지 않을 때에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었다. 훈련을 받지 않을 때에 우리도 실족하게 되는데 두 가지 형태의 실족함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도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먼저 두 가지의 부작용은 어떤 것인가?

(부작용1) 옛 관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8-9절을 다시 보자.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갈라디아인들은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8절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애매한 모습을 배제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든지 세상 유혹을 주관하는 마귀의 종 노릇을 하든지 하라는 것이다. 원래 그들은 마귀의 종 노릇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자유와 특권을 버리고 옛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이전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지금은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과학 용어에 ‘이널시아(타력)’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변화되었지만 원래로 돌아가려는 습성을 말하는 것이다. 달리던 자동차가 gas가 소진되어 마침내 원래의 서 있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는 원래의 영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믿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영적 습성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긴장감을 잃어버리고 훈련에 집중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원래 죄성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이 훈련이 필요한 이유이다. 갈라디아인들은 지속적으로 양육되지 못했기 때문에 유혹 앞에서 옛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부작용2) 거짓 지도자들에게 끌리고 만다. 

17절을 보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거짓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주목하라고 요구하였고 서로을 이간시켰으며 유혹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유혹받지 않고 분별력을 갖기 위해서 훈련 받았어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다가오는 것이다. 

행 20:29-30을 보자.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사도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에 그 자리로 거짓 선지자들이 들어올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그들을 경계하여야 한다. 이단을 주의하라. 오직 말씀을 통해서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 

엡 4:14을 보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internet, radio, tape등을 통해서 참으로 많은 말씀들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 중에는 그릇된 가름침도 아주 많다. 이단의 가르침이 우리를 휩쓸고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씀을 통해서 올바른 것을 붙잡고 온전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과 분별력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분명히 알고 잡아야 한다. 우리는 진짜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더욱 확실히 알아가야 한다. 갈라디아인들은 훈련받지 않았고 양육받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거짓 선지자들에게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해결책1) 주님을 더욱 더 알아가야 한다.

호 4:6을 보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멸망한다고 하였다. 또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 3장에서 자신은 주님을 더욱 더 알기 원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이 말을 하였다. 그동안 그는 수많는 주님의 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소원이 주님을 더욱 더 알기 원함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본문 8,9절을 다시 보자.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역시 ‘아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아심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옳게 섬기는 길이 된다. 

요 17:3을 보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영원한축복이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같다.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 안에 바로 서는 길은 오직 ‘아는 것’이다. 내 주위가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질 때가 있다. 우리의 힘과 우리의 감정으로는 바로 설 수 없을 때가 있다. 이 때는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어두움에 파묻혀 있을 때에도 우리의 힘은 오직 주님을 아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 27:1에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에게 하나님은 빛이고 구원이며 생명의 능력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설 수 없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아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고전 10:13을 보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라고 한다. He is faithful’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음을 알고 믿음 속에서 지탱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당하고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기할 위기가 와도 이기게 된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하신다. 훈련은 이런 것이다. 더욱 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더 위대해지고 크심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훈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감에 집중하고 생명을 걸자.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의 언약을 알아가자.


(해결책2) 어미의 사랑으로 인내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옛 관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어미의 심정으로 인내하는 진실한 어미가 있어야 했다. 아이들은 그 일을 할 수 없다. 누군가가 길을 열어주어야 했다. 바로 영적인 부모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순장/순모, 새일꾼반 leader, 교사, 그리고 교역자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들이 어미의 심정을 가지고 해산의 고통을 피하지 않을 때에 그들의 영적 자식들이 바로 서 갈 것이다. 

12절을 보자.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저들이 훈련 받을 때에 저들이 사도 바울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일을 위해서 내가 먼저 저들과 함께 뒹글며 함께 생활하며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옮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군천사의 찬양과 경배를 받는 자리에서 마굿간으로 옮기셨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옮기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역사하시게 되었다. 

우리도 그 일을 하려면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찾아가야 한다. 끝까지 인내하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때에 어미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어미는 똥냄새가 나는 자식도 끌어 안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문제와 상황 앞에서 어미 만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랑이 그 문제와 상황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으면 그들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인내하며 그 자리로 내려가는 지도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형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2기 사역이 시작될 때 보다 머리가 많이 빠졌다. 당시에 그 막중한 사역을 앞에 두고 첫번 설교를 어떤 말씀으로 전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기도하면서 요 21:15-17을 정하였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완전히 망가진 모습이었지만 ‘주님을 향한 마음’을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어보실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주님, 저는 broken된 그릇입니다. 하지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실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허락하신 사역에 충성을 다하자. 그때에 비로소 주님께서는 우리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실 것이다. 아멘.
(김승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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