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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삼상 10: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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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삼상 10:17~24)


지난 주 우리는 삼상9장을 통하여 하나님이 사울을 세우시는 내용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사람 세우심’에 대하여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자들만, 하나님의 사촌 쯤 되는 사람들만 지도자로 세우는 줄 알았는데, 
사울을 지도자로 세우시는 것을 보면 그렇지만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예를 들어, 사울은 삼상9: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함께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사울은 사환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이유는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보다는 3일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는 자신들을 더 걱정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걱정하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 사울의 태도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울의 인간됨이 풋풋하게 묻어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배려하는 태도를 놓치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현대인의 삶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배려하는 태도는 그 사람의 인품을 돋보이게 합니다. 


마5:39-41절에 이런 산상수훈의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예수님은 성도들이 기계적으로 이런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자동적으로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하면 얼른 겉옷을 벗어주고, 오 리를 가자면 자동적으로 십 리를 가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태도가 먼저입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내 오른 뺨을 때릴까?  그래, 화가 풀린다면 내 왼편도 마저 때려라.’ 
그래서 왼편 뺨을 돌려댄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궁색하면 남의 속옷을 가지려고 할까? 그래, 사람이 너무 궁색하면 체면 차릴 여유조차 없지. 나도 어려운 적이 있었는데 입겠다면 겉옷도 가져라.’ 

그래서 겉옷까지 벗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외로우면 오 리라도 함께 가자고 할까? 도움이 된다면 십 리라도 가주겠다.’ 
그래서 십 리를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살피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덕목입니까? 

사울은 바로 이런 태도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의 인간됨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한 발자국만 더 물러서서, 한 순간만 더 멈추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배려해보십시오. 

그럴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훨씬 더 깊은 인간미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런 태도를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울을 왕으로 부르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나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게 있는 걸까?’ 
‘설령 가슴에 찡하는 뭔가가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꼭 해야 할 질문입니다. 


1. 왜 이렇게 본문에는 지명과 상황 설명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을까? 

본문, 삼상 10장을 읽으면서 첫 번째 느껴지는 인상은 지명과 상황 설명이 유난히 상세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예를 들어 봅니다. 
2절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 

3절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나와 만나리니........” 

5절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그리고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왜 이런 얘기가 필요합니까? 
어떻게 보면 삼상10장1-16절의 내용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삼상9장에서 바로 삼상10장 17절로 넘어가도 이야기의 전개상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명과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하려면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상황을 설명해야 합니다. 
누가 했는지, 언제 했는지, 어디서 했는지, 무엇을 했는지, 왜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 사실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상10:1-16절의 묘사가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분명하고 구체적인 이유는 당사자인 사울에게 확신을 주기 위함입니다. 

사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울의 모습을 성경은 언뜻언뜻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 군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삼상9:21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많은 해석가들은 사울의 이런 태도를 ‘겸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과 ‘자신감 결여’는 다른 것입니다. 
저가 보기에는 사울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삼상 9:25-26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그들이 일찍이 일어날 쌔 동틀 즈음이라.......”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무슨 얘기가 그렇게 많아 밤새도록 얘기하고 동틀 즈음에 자리에서 일어납니까? 
확신이 서지 않아 주저하는 사울과 설득하는 사무엘의 대화가 들려오는 듯하지 않습니까? 

삼상10:16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그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의 말하던 나라 일을 고하지 아니하니라.” 

왜 그렇게 중요한 나라 일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천기를 누설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사울은 아직도 긴가민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외부에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삼상10:12절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경멸할 때 사용하는 관용어구입니다. 
사울한테 이런 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사울을 모욕하고, 빈정거리는 거지요. 

또 삼상10:27절에서는 사울을 노골적으로 비난합니다. 
“어떤 비류는 가로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이런 내적, 외적인 상황 때문에 사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이런 사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케 하는 세 가지 만남을 주십니다. 

① 첫 번째 만남은 2절의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② 두 번째 만남은 3절의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③ 세 번째 만남은 5절의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나리니’라는 동사가 세 번 되풀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절 “........ 두 사람을 만나리니.......” 
3절 “........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5절 “.........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만나리니’ 라는 동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범상치가 않지요? 
‘만남’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의 숫자도 처음에는 두 사람, 세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무리였습니다. 
만남의 강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은 이런 만남을 ‘징조’라고 합니다.(7, 9절) 

결국 삼상10:1-16절에서 이렇게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고 사인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읽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징조를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가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진리입니다. 


이제 우리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 부모님은 계획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셨습니다. 
부모님이 ‘우리’라는 생명체를 만들기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품속에 품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 없는 생명의 지속이 아닙니다. 

시139:13-18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 보다 많도소이다.” 

그렇습니다. 
부도덕한 부모는 있을지라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계획과 상관없이 태어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 없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도 우연히 하지 않으시고, 절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calling)이 있습니다. 
사울에게만, 목사에게만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배웠던 배우지 못했든, 남자든 여자든 우리에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자하는 열망을 가지십시오. 
‘도대체 왜 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살게 하십니까? 알고 싶습니다.’라고 진지하게 질문하십시오. 

한번 왔다가 한번 가는 인생, 되는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사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복음성가-두 손 들고)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오직 주 만이 나를 다스리네. 
나 주님 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3.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싶으면 다음 사항을 참고하십시오. 

1) 남보다 더 잘하는 것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유창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농담할 정도로 언어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학이나 음악, 기계를 다루는데 천부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500-700개의 다른 기술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의 뇌는 100조의 다른 정보들을 저장할 수 있고, 우리의 코는 1만 가지 이상의 냄새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놀랄 만한 능력 덩어리이며, 하나님의 기묘한 창조물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파악하십시오. 
남보다 더 잘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관이 있습니다. 


2) 남보다 더 가진 것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가정환경을 가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할 기회를 더 많이 가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경험을 가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더 가졌습니다. 
여러분이 남보다 더 가진 것을 파악하십시오. 
남보다 더 가진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관이 있습니다. 


3) 남다른 부담감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남다른 부담감을 주십니다. 
예를 들어, 다운 증후군 아이를 둔 부모는 다운 증후군 아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사람은 알코올 중독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사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사별의 아픔으로 시름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남다른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남다른 부담감에 유념하십시오. 
남다른 부담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관이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는 보람이 되길 축원합니다. 
한번 왔다가 가는 인생, 보람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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