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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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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2~33) 


그 동안 지구촌을 달구었던 북경 올림픽도 오늘이면 끝이 나지 않습니까?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숱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듣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메달을 딴 선수들을 볼 때 인간 승리의 벅찬 감동을 함께 누리게 되지 않습니까? 참 우리 인간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가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매 경기마다 세계 신기록이 쏟아져 나올 때 그 놀라움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하게 보이는 우리 인생 역시 나약하고 작은 모습도 있습니다. 주체하지 못하는 슬픔 앞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서운 고독 앞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각한 질병 앞에서 하얗게 질려 버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나 가엾을 정도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모두들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이런저런 이유들로 사람들은 그 마음마다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내 자녀가 어떻게 될지,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내 남편의 회사는 어떻게 될지,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내 남편의 회사는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 어려운 내일을 걷고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면 불현듯 엄습하는 공포가 우리를 덮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의 쳇바퀴를 멈춰 세울 수 있을까요? 멈추고 싶다면, 정말 그것을 원한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깊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본 본문은 인생의 위기 앞에 서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읽은 본문 바로 앞에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벳새다 광야에서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장정만 5,000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얼마나 큰 축복의 사건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축복의 사건에 바로 이어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제자들은 벳세다 들녘의 기쁨도 뒤로한 채 이제 또 다른 사역의 현장을 향해 갈릴리 바다로 배를 타고 갑니다.

 24절에 보면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갑자기 바람이 물어오더니 큰 풍랑을 일으켰고, 그 풍랑으로 인해서 제자들은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 갈릴리 바다는 일종의 신비스러운 바다입니다. 언제 어디서 폭풍이 불어 닥쳐 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상한 바다입니다. 갈리리 바다에는 일기 예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형 자체가 폭풍이 몰려 올 어떤 조짐도 없이 갑자기 불어닥치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파도를 일으키는 강한 바람이 불어오면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됩니다. 이 파도를 이겨 보려고 애를 써도 1m도 전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상황을 만난 것입니다. 밤 사경에까지 그들은 풍랑과 싸워야 했습니다.

"밤 사경"이라면 새벽 4-6시 사이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는 건너기 시작한 때는 초저녁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몰아친 돌풍과 파도 때문에 그들은 밤새도록 그 파도와 싸워야 했습니다. 새벽까지 싸워야 했으니 제자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겠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제 지쳐서 절망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 할 만도 할 때입니다. 그런 고통과 위기가 밤 사경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은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24절에서 '물결'이라고 표현된 단어를 분석하면 큰 파도가 쉴 새 없이, 끊임없이 몰아치는 것을 표현하는 헬라어입니다. 또 ‘고난을 당하였더라’는 뜻은 임신한 엄마가 아이를 해산할 때의 울부짖음과 괴로움을 말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불어오는 역풍을 맞으며 피곤하고 지치도록 노 젓던 제자들이 고통스러워서 해산하는 여인이 고함을 지르는 것과 같은 괴로움 중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밤중’이란 단어에서 쉴 곳을 찾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이 갈릴리 바다를 제자들이 임의로 간 게 아닙니다. 여기 22절에 보면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러니까 주님이 인도하신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오히려 일어나던 풍랑도 잔잔해야하는데 왜 말씀 앞에 순종하며 가는 길에 이렇게 엄청난 폭풍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하는지 얼른 이해가 안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불행했던 삶이 행복해지고 또 인생의 고통이 평안으로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인생 길에 어려운 일들이 생기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1959년대 한창 전도자로서 활동할 때입니다. 가는 곳마다 집회를 하고, 가는 곳마다 전도를 해서 수많은 사람이 돌아오게 되자 매스컴을 타고 그 젊은 청년 목사가 미국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던 때였습니다. 그때 템플턴(C. Templeton)이라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도 가슴에 불을 안고 전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유럽으로 순회하며 전도할 때도 같이 가서 교대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템플턴이 빌리 그래함보다 더 유능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전도하면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불과 얼마 되지 않아 1200석 교회당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기를 만났습니다.

한 장의 사진 때문에 그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 사진은 북아프리카의 여인이 굶어 죽은 아기를 무릎에 앉혀 놓고 하늘을 향해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사진이었습니다.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진을 얻었나 봅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엄청난 가뭄으로 사람들이 고통 당하며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고, 많은 짐승들은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면서 템플턴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여인에게,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비인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여인에게 비를 주시지 않겠는가? 그 하나님이 그렇게 자비하시고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시다면, 어떻게 죽어가는 이 아이에게 비를 주시지 않겠는가?' 그 다음부터 그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 예수님도 포기해 버렸습니다. 전도자의 삶도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로 갔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는데, 이 사람은 한 순간에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없는 불가지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믿어?' 하고는 다른 길로 들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역시 인생의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파산을 당할 때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때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있고, 아침에 멀쩡하던 아이가 불행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한치 앞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비극을 당하여 몸부림 칠 때 하나님께서는 무관심한 것처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 같이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 누구나 "야! 정말 모르겠다" 하고 말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잘 모릅니다. 사실 인생의 사사건건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요구한다면 약간의 대답은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온전한 진리는 될 수 없습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불행을 당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의 친구 세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욥의 어려운 형편에 대하여 각자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전부 다 잘못된 견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그들을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완전히 아는 것처럼 떠든 그들을 좋게 보셨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할 때마다 인간적인 설명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더 미궁으로 빠지고 맙니다. 불행과 행복이 공존하고 의와 불의가 함께 병행하는 이 땅의 상황을 우리는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에서는 양식이 남아서 버리는데 다른 한 모퉁이에서는 하루 한끼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아 상태에서 죽어 가는 현실의 모순을 우리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고층 아파트가 서있는 그 맞은 편에 한숨과 탄식이 끊이지 않는 음습한 지하 셋방에서 살아가는 이 현실의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절대로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는 고통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C. S. Lewis 교수는 옥스퍼드 대학의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나올 때, 한 학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증거 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이런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겁니까?” 그 때 루이스 교수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이 있어도 교만한 인생인데, 만약 인생의 길에 고통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교만하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확성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커갈 때, 남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잘 할 때, 손대는 일마다 잘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폭풍이 불고, 풍랑이 밀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폭풍을 만난 그들에게 예수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진 분이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만이 인생의 신비를 밝혀주실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빛이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왜 풍랑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그와 같은 고생을 했는가에 대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시선을 제자들에게 한번도 놓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 안에 모든 해답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25절을 보십시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의 이 고난을 보시는 주님은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당신의 자녀를 놓치지 않으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자녀 한 사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물길을 걸어서라도 그 한 생명을 찾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심지어 상식을 뛰어 넘어서라도 주님은 나에게다가 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노 저어 가는 내 인생 항해 길에서 고통받아 기진 맥진해 쓰러져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그 때도 나를 찾아오신 주님입니다. 그 찾아오심은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어디나 찾아가십니다. 누구와도 함께 가십니다. 내가 믿음이 약해서 쓰러져 바다에 휩쓸리려고 들 때도 사랑의 손길로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 주님입니다. 내 모든 고통의 현장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는 분들 계십니까? 그 억울함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겉도 아시고 속도 아시고 밖의 표현도 아시고 속의 생각도 아시는 그 분, 모두 보시는 주님은 내가 힘이 없어 기진 할 때도 찾아오십니다.

세상에서 인간 중에 가장 보호를 철저히 받는 사람이 있다면 대통령일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된 우리를 대통령보다 더 귀히 여기시고 더 철저히 보호해 주십니다. 대통령이 어디를 행차하면 몇주 전부터 난리죠. 답사를 하고, 맨홀 뚜껑까지 열어보면서 철저히 검색을 합니다. 그리고 수십 명이 에워싸고, 일단 유사시에는 경호원들이 몸을 던져 총탄을 대신 맞으면서까지 경호합니다. 그런데도 전 세계적으로 보면 국가 원수들이 암살되거나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완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가지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4:8절에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물론 험한 세상 살다보면 우리 성도들도 별의 별 일이 다 겪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서 주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것 사실이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사탄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우는 사자처럼 믿는 자들에게 달려들어 우리를 삼키려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 동안에는 어려운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결국은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시37: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또 하나는 내가 어떤 형편에 있다 할찌라는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26절을 보면 "제자들이 그 바다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바다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무서워했던 것은 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저들은 그들의 눈에 주님마져 보이지 않고 단지 유령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히11:1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눈에 안보여도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축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닫히면 함께 다니던 예수님도 유령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불 신앙인 것입니다. 실패보다 무서운 것, 고난보다 무서운 것은 불 신앙인 것입니다. 고난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절망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불 신앙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보십시오. 그들은 슬픔과 절망으로 젖어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동행하셨건만 알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당할 때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같이 두려워하는 우리를 두고 성경은 ‘둔하여졌다’고 말합니다. 존 맥스웰 목사님은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기력을 낳고, 모든 일을 미루어서 행동하지 않게 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며, 변명으로 그의 삶을 살게 하며, 에너지를 잘못 사용하여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데 에너지를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 ‘은둔형 외톨이’가 많다는 겁니다. 그들은 불안해하며 사람들과 접촉하기도 싫어하고,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만 콕 박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콕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10대~30대에 걸쳐 20~30만 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되고 풍요로워지면서 오히려 영혼이 빈약해 지는 겁니다. 우리보다 물질문명이 앞선 일본은 1970년대부터 그런 현상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히키코모리’(방안에 틀어박힘)라고 부르는데, 1억 2천 인구 중에 무려 1%에 해당하는 12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어떻게 하면 치유될 수 있을까요? 병원에 입원하면 될까요? 약물을 쓰면 될까요? 별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악화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혹자는 애완동물과 놀거나 영화 연극 감상, 음악 감상을 권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얼마나 효험이 있겠습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의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과 동행할 때 비로소 그 영혼이 치유되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여기 지금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소리치면서 두려워 떨고 있었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풍랑을 만나 생사의 불안을 느끼며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면서 위로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를 구하기 위해 오신 주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할 때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때요? 내가 정말 최선을 다 했는데, 또 희생하고 섬겨왔는데, 그 사실을 알아주기는커녕 무시를 당할 때 서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 신앙 생활하는 분들 가운데 '섭섭이'들이 많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이야기를 하든, 우리 인생을 끌어 안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이는 내가 너의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나온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제 갓 결혼한 듯 보이는 이들 부부는 부인이 하얀 털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착용했기에 멀리서도 눈에 확 띄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팔에 기대어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이는 젊은 부부의 모습은 참 평안해 보였습니다. 부인이 난소암으로 투병 중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저렇게 얼굴에 평안한 빛이 가득할 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신들의 지금 처한 현실이 두렵고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힘든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당하는 제자들 앞에 서서 “나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고 말씀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똑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네가 고난 당하는 그 현장 속에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너는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줄로 확신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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