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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품 그리스도인 (민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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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품 그리스도인 (민 11:4~9)


옛 말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선생님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는 보고 배울 만한 인격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우리 주변 사람 중에는 보고 배워서는 안 될 사람들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애굽 땅에서의 종살이를 벗어나 가나안 땅을 향해서 나가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신앙과 태도를 기준으로 세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이들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의 바른 믿음의 삶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생각할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데, 그 중에 섞여 사는 사람 들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섞여 사는 무리>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 백 삼십 년 동안이나 종살이하면서 고생하던 애굽 땅을 벗어나 나올 때 순수한 이스라엘 백성들만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타민족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출12:38절을 보면 <중다한 잡족>이 그들과 함께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애굽에 흘러 들어와 살던 사람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종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모세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벗어나 나올 때 자신들로 종살이를 벗어나고자 이스라엘 백성들과 행동을 같이 한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핏줄을 타고 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피가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얼핏 보면 애굽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가짜였습니다. 가짜였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은 이들이 일으킨 문제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의 핵심은 <탐욕>이었습니다. 

그들의 탐욕이 무엇입니까? 4절을 계속 보면 <......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기를 먹고 싶어 한다고 그게 탐욕입니까? 아닙니다. 그걸 탐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특별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탐욕이란 <지나친 욕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엔 절대적 기준이 없습니다. 상대적입니다. 예를 들어 먹을 음식이 많을 때 밥 한 그릇을 먹은 사람이 한 그릇을 더 주문한다고 해서 그것을 탐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얼마든지 더 먹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게 없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먹어야 할 사람은 네 명이나 되는데 밥은 한 그릇 밖에 없을 때, 그 중의 한 사람이 혼자 다 먹으려고 한다면 그건 탐욕입니다. 그 때 그가 말할 것입니다. <겨우 밥 한 그릇 가지고 뭘 그래요? 전에는 두 그릇 먹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이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그 때는 먹을 음식이 많았으나, 지금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는 탐욕이라고 할 수 없던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탐욕이 됩니다.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게 탐욕이 아닙니다. 그러나 상황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그들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광야란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부족한 곳이었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게 먹고사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인데, 고기까지 먹고 싶어서 원망하는 것은 그 상황에서는 탐욕이었습니다. 이들은 참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여기서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오래 전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간 이후 거기서 사백 년이 넘도록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총리인 요셉의 가족으로 환대를 받았으나, 요셉이 죽은 후 그들은 종으로 전락했습니다. 벽독을 만들어 성을 쌓는 고역에 동원되었습니다. 후에는 남자아이를 낳으면 부모 손으로 죽여야 하는 처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애굽을 벗어나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었습니다. 출애굽은 우선은 지긋지긋한 종살이를 청산하고 자유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섞여 사는 사람들>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섞여 사는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이후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팔 일 후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섞여 사는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신이 따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섬기려고 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신을 섬기면 그 많은 신이 자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출애굽하면서 일찍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가나안 땅,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반드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가나안 땅에 반드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농사를 지어 얻은 곡식과 소와 양을 먹여 얻은 짐승으로 하나님께 자유롭게, 풍성하게 제사를 드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할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섞여 사는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대하여 가지는 집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가나안 땅이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이 살 수만 있다면 가나안 땅이 아니더라도 좋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교회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 같은 교인들이 있는가 하면, 섞여 사는 무리들과 같은 교인들도 있습니다. 섞여 사는 무리들과 같은 교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교회에 등록되어 있고, 교회에 오기는 옵니다. 겉으로 보면 다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을 들여다보면 너무도 다릅니다. 

우선 하나님이 그 마음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통해서 받는 은혜 보다 사람을 통해 받는 상처가 더 큽니다. 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고기만 많이 먹여주면 언제든지 애굽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 변절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비전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천국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반드시 가나안 땅에 가야한다는 집념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늬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마치 얼핏 보면 이스라엘 백성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섞여 사는 무리에 불과했던 사람들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국 교회의 거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고, 가나안 땅에 대한 집념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나요? 아닙니다. 본문은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섞여 사는 무리들과 별 차이 없이 행동한 것을 보여줍니다. 

4절을 계속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도 섞여 사는 사람들과 똑같이 고기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가나안 땅을 아는 사람이었지만, 섞여 사는 사람들과 부화뇌동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한 글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도>라고 했는데, 이 <도>자가 문제입니다. 섞여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더라도 이스라엘 자손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함께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역시 최상품은 못되었습니다. 마치 얼마 입지 않았는데, 실밥이 터지는 불량 옷과 같았습니다. 이들은 가짜는 아니었지만, <불량품>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로 소수의 참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까지 가는 여정에서 섞여 사는 무리들과도 다르고, 섞여 사는 무리들에 부화뇌동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달랐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우선 지도자 모세였습니다. 또 모세의 형 아론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시종인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못지않은 믿음의 사람 갈렙이었습니다. 이 몇 사람은 언제나 나머지 백성들과는 다르게 처신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라고 해서 고기가 먹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정성껏 키웠습니다. 고기반찬이 생기면 늘 아들 국그릇에 넣어 주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왜 고기를 안 드세요?> <응, 난 고기를 안 좋아해. 난 무 장아찌가 최고야!> 

나중에 아들이 커서 장가를 들었습니다. 며느리가 고기를 시어머니 국그릇에 넣으려고 하자, 아들이 말렸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고기 안 좋아 하셔. 무장아찌만 드리면 그만이야!> 여러분, 이 아들 어떻습니까? 어머니 입맛을 잘 알아드리는 지혜로운 아들인가요? 어리석은 아들인가요? 어머니라고 왜 고기가 싫겠어요? 다 아들 먹이려고 고기가 드시고 싶어도 참았던 것인데, 이 어리석은 아들은 어머니는 고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 입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왜 모세나 여호수아라고 해서 고기가 먹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들도 만나만 먹어야 하는 광야 생활에 지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들의 가슴은 가나안 땅에 대한 집념으로 가슴이 가득 했습니다. 그 곳에서의 감사와 경배의 제사를 꿈꾸었습니다. 그 집념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당장 햇볕이 뜨겁고 잠자리가 불편하고, 먹을 음식이 다양하지 못하고, 마실 물이 부족해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난도 참고 견딜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나라도 주셔서 굶어죽지 않고 가나안 땅을 향해 나갈 수 있음을 감사했습니다. 이들은 참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물건으로 말하면 진품, 명품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 교인들이 진품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관심사부터 달라야 합니다. 그들은 오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비전과 사명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 식탁에 어떤 메뉴가 오르느냐>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 대신 <현재 자신이 가나안 땅에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가>에 있습니다. <오늘 무엇을 먹느냐>하는 관심은 정지된 관심입니다. 그러나 <현재 가나안 땅에 얼마나 접근해 있는가>하는 관심은 계속 움직이는 동적인 관심입니다. 

예를 들어 마라톤 경기가 열렸을 때, 길거리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구경할 것인가, 시원한 냉차를 마시면서 구경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는 선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선수의 관심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지금 몇 킬로 지점에 와 있는가?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가? 내가 지금 잘 달리고 있는가? 내가 지금 컨디션 조절을 잘 하고 있는가?> 이런 차이가 바로 가만히 서서 구경하는 사람과 계속 달리며 움직이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달리는 선수는 사소한 데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스크림이든 냉차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 골인 지점의 금메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는 시원한 냉차를 준다고 유혹해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앞만 보면서 달립니다. 한 번 시작했으면 끝까지 달립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 6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공병호 경영연구소의 공병호 소장이란 분이 쓴 <명품 인생을 만드는 10년 법칙>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10년이 개인의 인생을 좌우한다며 소위 <십 년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10년 정도는 집중 투자를 해서 자신을 명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명품 성도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 신앙 개발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시력을 밝혀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까지 도착할 수 있는 지구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영적 근육을 단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만 먹고도 견딜 수 있는 강한 영력을 가져야 합니다. 달콤한 고기 맛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영적 의지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가나안으로 나아갔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은 결국 소수의 명품 같은 사람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숫자는 적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창조적 소수>였습니다. 

성도들이 진품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섞여 사는 무리처럼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평소에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였다가 조금만 어려워도 변질되는 연약한 그리스도인이어도 안 됩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오늘의 만나에 감사하고, 내일의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달리는 진품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달리는 그 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큰 힘을 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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