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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러워 할 평신도 (행 2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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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워 할 평신도 (행 21:7~14)


사도행전은 읽을수록 은혜가 있고 복음의 확장 원리가 담겨 있다. 특히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역할과 평신도의 역할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놓지 않았다.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두 인물이 나온다. 예루살렘교회의 시작으로서의 베드로와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서의 바울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말씀은 기독교 역사의 최초의 순교는 평신도였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방인을 향한 최초의 전도 시작은 평신도였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성령을 받은 성령의 사람들은 교회의 윗자리, 아랫자리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능력 전도에 쓰임 받았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지만 평신도행전이다. 탁월한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의 몫을 너무나 잘 감당해 나가는 책이다.

평신도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평신도가 살아서 움직이는 교회가 되려면 다른 왕도가 없다. 저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이 오셔야 한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빌립이란 사람은 성령 충만을 받으므로 우리 시대에 부러워하는 평신도가 되었다. 빌립에 대하여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일을 맡은 자로서의 빌립 (행21:8上)

행21:8上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이라고 적고 있다.

빌립이 집사가 된 것은 사도행전 6장을 읽어보면 교회의 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교회의 구제 사역에 누락되는 자들은 주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였다. 그래서 원망이 생겨나게 될 때 일을 맡은 사람 일곱을 택하게 된다. 그때 선택의 요건으로 행6:3을 보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칭찬 듣는 사람으로 정하였다. 그래서 선출된 사람이 스데반,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였고 빌립이 선택되었다.

여기 빌립을 포함해 일곱 사람을 집사로 선출할 때 예루살렘교회는 만 명이 넘었다.

행2:41 “제자의 수가 삼 천이나 더하더라.”

행4:4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 천이나 되었더라.”

행5: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행5: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이렇게 생각하며 읽어보면 예루살렘교회의 믿는 자의 수는 10,000명이 넘어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집사를 뽑게 된 행6:1을 보라.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사람들의 부흥이 더욱 더 많아지는 것에 대해 기록한 것을 보면 빌립은 대략 10,000명 이상 20,000명에 이르는 교회에서 선택된 일을 맡은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서 선택되었다고 해서 그를 훌륭하게 보고자 함이 아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일을 맡은 자를 뽑는 자격이 먼저 제시되는데 교회가 동의하고 좋게 여긴 후 그를 뽑았다는데 그의 신임장을 두려하는 것이다.

오늘의 이 시대는 사람은 많으나 일군은 적고, 믿는 자는 많으나 제자는 적다. 대개 사람들은 생각없이 '우리교회에 사람이 많으니 나 같은 것쯤은 일 안해도 되겠지?' 라고 한다. 잘못된 판단이다. 일군이 적다. 정말 평신도는 많으나 일을 맡길 지혜로운 사람, 칭찬 듣는 사람으로서의 사역자를 세울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이는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일군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훈련도 거절하고 성령 받는 것에도 무관심하고 칭찬 듣지도 못한다. 이런 면에서 빌립이 일을 맡은 자가 된 것은 그의 삶이 얼마나 본보기가 되었는지를 알게 해 준다.
  

2. 전도하는 사람으로서의 빌립 (행21:8下)

행21:8下을 보면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고 하였다. 

바울의 전도단은 여러 명이었다. 행21:1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21:5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행21:6 “우리는 배에 오르고” 등 이렇게 보면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는 사람은 바울 혼자가 아니었다. 바울과 함께 하는 전도 일행들은 바울과 실라, 디모데, 누가 등 최소한 4명 이상이다.

전도자의 애환을 누가 잘 아는가? 그것은 전도를 해 본 전도자가 잘 안다. 바울의 일행은 두로를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빌립의 집에 찾아갔는데 성경은 그 빌립에 대해 전도자 빌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영어로 Evangelist라고 쓰고 있다. 빌립은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 전도자로서 불리워진 것이다. 복음을 들고 다니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자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빌립은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사마리아 성에 그리스도를 전파한 사람이다. 그의 직분은 교회의 구제 사역을 공정하게 하는 일을 맡은 행정 담당자이지만 그의 호칭은 전도자였다. 그렇다. 우리는 어떤 일을 맡은 자든, 군인이든, 공무원이든,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빌립의 사마리아에서의 전도가 능력 전도가 되어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고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낫는 역사가 나타났다. 우리도 이 빌립을 부러워하며 능력을 구하자. 능력 전도자가 되자. 누구든지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따르는 능력에 있다. 그러나 전도자는 알아야 한다.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여 착각하지 않는다.

행8:26~40을 보라. 빌립은 주의 사자가 그를 가사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 가사로 간다. 능력을 행하는 빌립이지만 전도자의 관심은 주님의 음성 앞에 순종하느냐에 그 생명이 있다. 모든 이유와 변명을 다 내려놓고 광야로 간다. 그것이 전도자의 선택이다. 그리고 또 다시 행8:40을 보라. 빌립은 아스도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고 하였다. 빌립은 오직 주님이 이끄는대로 순종하며 동에서, 서에서 복음을 전한다. 그것이 전도자의 참모습이다.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아파트 밀집 지역이든지, 촌락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집이든지 주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는 자가 전도자인 것이다. 그 가이사랴에 이른 빌립은 바울의 일행이 찾아오는 곳에서 변함없이 가이사랴에 살고 있었고 전도자 빌립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시간상으로 20년이 지났다. 사마리아 전도자에서 가이사랴의 전도자로 불리워지는 것, 20년이 지났다. 그래도 변함이 없다.

우리는 모두 집사, 권사, 장로로 일을 맡은 자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지 말고 전도자가 되자. 평생을 전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최고의 훈장으로 알자. 행복한 성도의 이름으로 알자.

  
3. 신앙 전수자로서의 빌립 (행21:9)

행21: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빌립은 전도자라는 신앙인의 명성답게 자녀에게 신앙을 잘 전수한 사람이다. 빌립의 네 딸이 모두 다 예언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영성의 전수인가?

예언하는 은사, 그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다. 바울은 개인의 은사인 방언의 은사보다도 더 많이, 더 강조한 것이 예언의 은사다. 이런 은사가 자녀에게 있는 것을 보면 빌립이 얼마나 신앙 생활을 바로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사람들은 예언하는 것을 오해한다. 예언을 마치 점치는 것쯤으로 오해를 한다. 예언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언은 목회적 덕을 세워나가는 것으로서 사람의 신앙을 권면하여 안위하는 기능이다. 예언의 은사가 개발되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 음성을 듣는 일은 민12:6~8을 보면 이상과 꿈으로 알리신다. 

욥33:14~17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알리신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언하는 것은 영성이 탁월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믿고 늘 자신을 정결케 씻으며 기도에 깨어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빌립의 딸 넷이 예언자였다는 것은 아버지 빌립의 신앙 생활의 올바름을 뜻한다. “어떻게 하면 딸에게 신앙의 모범이 될 것인가?”라고 의식해서 살았다기 보다 본래 하나님의 사람답게 산 신앙의 삶이 딸들에게 전수된 것이다. 빌립은 신앙을 차세대에게 전해야 하는 아비의 길을 올바로 걸은 것이다. 

우리 모든 아버지들은 신앙의 전수자가 되어 신앙을 유산으로 넘기는 것을 위해 기도하자. 크리스챤 부모들이 아직도 신앙의 가치가 최고인 것을 외면하고 자꾸 물질적인 것만 전수하려 한다. 물질적인 것은 얼마 가지 못한다. 기업의 부란 40년을 이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삶의 진정한 문이 되는 신앙을 물려주어야 한다. 

1923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이들이 시카고 호텔에서 모였다. 그들의 부를 신문에 게재하였다. 그러나 27년 후 철강 회사의 사장 찰스 슈와브는 죽기 5년 전부터 돈을 빌려 쓰는 자가 되었다. 밀 투자가 아서 커튼은 파산하여 해외에서 죽고 뉴욕 증권 거래소 사장 리차드 휘트니는 형무소에 복역했고 윌가 유력 인물 제시 커비모어는 자살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우, 진로, 동아, 신동아, 국제 상사 등은 다 어디로 갔는가? 

선박 주조수국 1위, IT산업 1위, 경제규모 12위, 해방이 후 전쟁의 폐허 위에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이는 정말 자랑스럽다. 그러나 물질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다. 기독교가 근대화와 물질의 부를 가져오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한 번 물려주면 영원한 것을 주는 신앙의 전수자가 되자.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신앙을 코웃음치며 비웃는다. 가장 가치있는 것을 내버리는 이들에게는 허무, 쾌락, 불안, 근심만이 다가온다.

이제 신앙의 전수자가 되어야 함을 다시 각오하자. 빌립의 딸들이 신령한 은사자로 서 있는 것을 보면서 영적 전수자가 되기를 기도 드리자. 빌립은 존경스럽다. 직분에 무능하고 전도에 무능하고 신앙 교육에 무능한 우리들에게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정말 부러워 할, 따라가고 싶은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다.

빌립이란 평신도 사역자를 보고 나도 평신도로서 이런 사역자로 남게 되기를 꿈꾸자. 우리의 심중에 이 거룩한 삶에 대한 광기가 넘치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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