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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시 6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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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시 67:1~7)

 
사람들의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해방 63주년과 건국 60주년을 맞는 한국 사회의 사람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해있는지 한 방송국에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냐는 질문에 행복하다는 대답을 한 사람은 73.5%, 행복하지 않다는 대답을 한 사람은 24.1% 였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이 느끼는 행복의 조건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돈이었습니다. 2000년에는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을 건강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36.8%, 두 번째로 가족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35.5%였습니다. 그리고 돈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14.5%에 불과했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첫 번째가 건강, 두 번째가 가족, 세 번째가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8년 만에 역전이 되어 2008년에는 첫 번째 행복 조건을 돈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32.3%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건강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31.5%, 세 번째로 가족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24.24%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은 건강과 가족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후진국형 행복 조건이라며 우려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과 비교해볼 때 한국인이 행복해하는 정도는 얼마나 될까요? 영국의 한 경제 단체와 대학이 한국인들의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인은 178개국 가운데 102위를 차지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가 발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올림픽경기에서의 매달 순위가 첫 날에는 1위로 나왔고, 3위, 4위, 5위로 내려 앉았지만 종합순위에서 10위 안에 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국가 발전에 비해 한국인의 행복도는 너무 낮습니다. 그리고 돈이 행복의 우선조건이라는 생각은 세계적인 추세에 역행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국인들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물질적인 의존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국인들은 돈에 대해서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 잘 알 수 있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이 다르고,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열등감 속에서 아파하거나 우월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너무 빨리 화를 내고 남의 탓을 합니다. 너무 빨리 불평하고 원망하며 소리 지르는 삶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돈의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세계의 행복의 조건을 정신적이고 영적인 조건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말씀하는 행복, 하나님이 말씀하는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행복이라는 말보다는 복 또는 축복이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합니다. 행복이라는 말 자체를 많이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여기에는 우연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이라는 말은 어디서부터 우리에게 다가 오는지 명확합니다. 

어느 구약학자는 기독교인들이 축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축복은 ‘복을 빈다’는 뜻으로 우리가 복을 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으로 복을 비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축복하는 말을 써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디에 혹은 누구에게 축복을 빌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복을 빕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내리기를 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시편 기자는 깊이 묵상하며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복주시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 옆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물질의 것, 소유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영적인 것입니다. 첫 번째, 물질의 복은 소유할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복, 먹고 마시는 복입니다. 눈으로 자연을 즐기는 복입니다. 그리고 건강의 복, 손과 발을 움직이는 복입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정의 복, 자녀의 복입니다. 직장을 다닐 수 있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외적인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기자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67:6) 

하나님이 이 땅에 소산을 만들어 주심으로 우리가 먹고 마시며 모든 것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물질적인 축복을 다시 되돌아봐도 우리 인생이 하나님이 주신 복 전체로 되어있습니다.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잊고 살 때가 더 많습니다. 모든 것이 그냥 저절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느 날 몸이 아파 병원에 가서 건강진단을 해보니 갑자기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 때가 있습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호흡할 수 있고, 먹고 마시며 누릴 수 있는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병상에 누워있게 되면 비로소 깨닫습니다. ‘내가 지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복으로 주신 아름다운 삶을 누리지 못했구나. 옆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인생을 살지 못했구나.’ 


우리는 어려움이 닥쳐올 때에야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며칠 전 아내와 오랫만에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게 되었습니다. 콘서트 드라마 “여보 고마워”라는 작품입니다. 흔히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부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아내는 잘 나가는 여자 교수이고, 남편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일종의 백수로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서로에게 쏟아 붇는 부부였지만 몇 년이 지나자 작은 일에도 서로 오해하고 갈등하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그 동안 싸움도 많이 하고 다투기도 했지만 인생의 모든 것이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남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내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여보, 고마워.”라는 말을 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우리의 삶의 정서와 감성이 풍부하게 들어 있는 아름다운 연극이었습니다.  

부부는 너무 가까이 있기에 고맙다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이입니다. 어쩌면 아내들은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그래서 몇 십 년을 함께 살아도 지금까지 고맙다는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할 때, 지위가 있을 때, 풍족할 때는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삶의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올 때에서야 겨우 고마웠다는 한마디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거칠어지고 사나워집니다. 조금만 무슨 말을 하면 자신을 흉보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이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와 자녀에게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을 해 보십시오. 그 순간 우리의 삶이 축복의 역사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이 따뜻할 때 한 번 더 만지세요. 그리고 쓰다듬으며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여기에서 새로운 축복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역사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와 위험에 처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귀한지 깨닫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늦게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 너무 늦게 고백하지 마십시오. 지금이 고맙다고 말할 기회입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괜찮습니다. 아직 때는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예배드릴 수 있는 건강 주심이 은혜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주님 뜻대로 순종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에 주신 모든 것을 누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기 전 우리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마음에 교만이 있어 자신이 가진 소유물로 안정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잘 나간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서지 않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최근에 신앙인이 된 문학평론가 이어령 씨가 시집 하나를 냈습니다. 시집의 제목은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입니다. 원래 무신론자는 기도를 안 하는 사람입니다. 무신론자는 기도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런 한 무신론자가 어느날 자신의 옛 과거의 부끄러움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기도한다는 표현을 통해 무신론자의 삶이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그에게 고백할 대상이 있고 감사 할 대상이 있다는 자전적인 이야기입니다. 자기 실존의 어둡고 깜깜한 적막 중에 들려온 하나님의 목소리가 마치 자비의 목소리, 은혜의 목소리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옵니다. 
어둠의 벼랑 앞에서 
내 당신을 부르면 
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 
“네가 그동안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 
왜 그렇게도 야위셨습니까. 
못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나이까.
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 상처를 조금 만져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혹시 내 눈물방울이 그 위에 떨어질지라도 용서하소서.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 있냐고 
더는 걱정하지 마옵소서. 
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이 신앙적인 고백은 그가 갖고 있던 것이 이성적인 한계에 부딪쳤을 때 나타났습니다. 삶의 실존에 평안이 없어졌을 때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고통 받는 현장에서 축복의 은혜를 깨닫는 것을 보면서 저자 역시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가면을 벗고 복주기를 원하시는 창조주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설 때 가면을 씁니다. 보다 멋진 가면, 조금 무섭게 하는 가면, 때로는 거짓말로 자기를 속이는 가면은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자녀들 앞에서까지도 가면을 쓴 모습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면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면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면을 버리고 벌거벗은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실존하는 방법입니다. 

지식의 가면을 벗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서십시오. 돈과 재물의 가면을 벗고 아무 것도 아닌 가난한 자로 서십시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실존입니다. 욕심과 야망의 가면을 벗고 하얀 백지 위에 마음대로 쓰십시오. 주님 쓰시는 대로 인생을 맡기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권력과 야심의 가면을 벗고 물을 찾는 암사슴처럼 영혼의 목마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뜻에 목말라 하나님의 진리 앞에 서고 싶다고 고백하십시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얼굴빛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나를 사랑으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지켜보시고 추적하셨던 하나님을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강요하지 않는 하나님, 억지로 붙들지 않는 하나님, 억압하지 않는 하나님, 자유를 주시기 원하는 하나님, 용서의 기쁨을 주기 원하는 하나님, 죄책감과 어리석은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사랑과 은혜의 역사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까지 내려놓으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 앞에 머리를 숙여 찬양하는 마음, 자원하는 마음, 기쁜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깨달으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편 67:1) 

시인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은혜이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얼굴을 비추어 구원하시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본문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아론의 축복문을 연상하게 합니다. 

저는 주일 예배가 끝날 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으로 축복기도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하심이 회중 속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수요예배가 끝날 때는 아론의 축복문(민수기 6:24-26)으로 기도를 합니다.

우리를 축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십시오.
 
아론의 축복문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얼굴을 비추시고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낙관주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황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어두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믿음의 사람은 거룩한 낙관주의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이룩해 주십니다. 바로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믿음의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품으면서 축복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베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축복의 말씀을 읽어 봅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24-2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제게 복을 주셨으므로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이 세상에 나가게 해주옵소서. 하나님이 복 받은 것을 증거 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온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온 민족이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하게 하옵소서.” 시편 67편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67: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복, 물질적인 복을 다시 확인할 때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복을 주시고 세상을 향해 믿음의 사람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두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있습니다. 거룩한 낙관주의가 우리의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환경을 보기 전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복 주시는 하나님 앞에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찬양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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